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Britanica Atlas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미 그때부터 역사와 지리에 동갑내기들보다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터라, 유럽 민족분포, 1차 세계대전 이후 국경선 변화도, 당시 사회과부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상세 지도 등을 입이 떡 벌어져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너무나 갖고 싶은 책... 그러나 물어물어 종로에 있는 브리태니커 본사(뿌리깊은 나무)를 찾아간 중학생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1980년대에 64000원! 고민이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뿌리깊은 나무가 아니라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그러나... 친구에게 맨날 책가방보다 큰 지도책을 빌려와서 보고만 있는 자식이 안스러우셨는지, 어머님께서 어느날 나를 데리고 브리태니커 본사로 가셨다.  지도 외에도 영어 교재를 두세 종을 더 사시더니(돌이켜보면 그건 어머님의 배려였다. '지도'만 사러 온 게 아니란 듯이...) 10만원이 넘는 액수를 그 자리에서 지불하셨다...

그런데,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한국 페이지를 넘겨서 독도 부분을 확인했다. 지금처럼 국민적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어딘가에서 독도가 국제 지도엔 일본 땅으로 되어 있대... 뭐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친구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친구 것은 오래 전 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해는 SEA OF JAPAN, 독도는 Takesima로 되어 었었다. 나는 순진하게 직원에게 "아저씨, 여기요, 여기, 독도가 다케시마로 되어 있네요." 라고 말했다. 당황한 뿌리깊은 나무 직원들... 구입액도 많고 무거우니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해서 우리는 홀가분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집으로 배달된 브리태니커 아틀라스, SEA OF JAPAN과 Takesima만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쑥쑥 지워놓은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지금이라면 이렇게 흥분하고 분노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다. 에이, 씨, 이게 뭐야... 비싼 책에... 그리고 반품은 물론이고 항의조차 안 한 채 세월은 흘러가고... 그때 바로 종로로 달려가 멱살을 잡고 한판 붙었어야 했구나...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그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거친 먹칠이, 바로 1980년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어른들, 윗세대 역사인식의 산 증인이라고.  중국의 동북공정 이야기를 듣고는 거품을 물지만 막상 고구려사 책 한 권을 사보기 싫어하는, 독도는 당연히 우리땅이라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한국이나 일본 근대사 책 한 권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길 귀찮아하는, 나날의 생활에서는 일본제품만 쓰면 귀족이 된 줄 알면서 과거사 이야기만 나오면 왜놈들 왜놈들 하던, 허세로만 가득 찼던 윗세대의 초라한 자화상이라고.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기억이 곧 힘이 되는 것이 역사다. 기억하려는 노력 없이 힘만을 바라는 자들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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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4-07-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지 못한 숙제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과거는 그저 과거인 채로 남아있지 않고 우리보다 먼저 달려가 미래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 우리 주변의 나라들은 엄청난 투자로 과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우리 윗세대의 초라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이런 방면에서 일종의 위태로움을 느낍니다.
 

After several years of studying and hard work, I have finally learned scientific jargon. The following list of phrases and their definitions will help you to understand that mysterious language of science and medicine.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나는 드디어 과학계의 전문용어들을 익혔다. 다음의 인용문과 그 실제의 뜻에 대한 해설은 과학/의학분야에서 사용하는 신비한 언어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IT HAS LONG BEEN KNOWN"...("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던 대로...")
== I didn't look up the original reference. (원전을 찾아보지 않았다.)


"A DEFINITE TREND IS EVIDENT"...("뚜렷한 경향이 드러나듯이...")
==These data are practically meaningless.(이 데이터는 아무 의미 없다.)


"WHILE IT HAS NOT BEEN POSSIBLE TO PROVIDE DEFINITE ANSWERS TO THE QUESTIONS"...("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구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An unsuccessful experiment, but I still hope to get it published.(실험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논문으로 내야겠다.)


"THREE OF THE SAMPLES WERE CHOOSEN FOR DETAILED
STUDY"...("샘플 중에서 세 개를 선택하여 분석하였습니다...")
==The other results didn't make any sense.(나머지 샘플은 해석불가능했다.)


"TYPICAL RESULTS ARE SHOWN"...("대표적인 결과값들을 표시하였습니다...")
==This is the prettiest graph.(이 그래프가 제일 이쁘죠.)


"THESE RESULTS WILL BE IN A SUBSEQUENT REPORT"...("그것에 대한 결과는 차후의 논문에서 다루어질 것이며...")
==I might get around to this sometime, if pushed/funded.(연구비 제대로 받으면 언젠가 쓸 생각입니다.)


"THE MOST RELIABLE RESULTS ARE OBTAINED BY JONES"...("가장 신뢰할만한 결과는 Jones의 실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He was my graduate student; his grade depended on this. (그는 내 밑에 있는 대학원생이었고, 학점을 받으려면 그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IN MY EXPERINCE"...("제 경험에 따르면...")
==once(한번.)


"IN CASE AFTER CASE"...("여러 사례를 보면...")
==Twice(두 번.)


"IN A SERIES OF CASES"...("일련의 사례들을 보면...")
==Thrice(세 번.)


"IT IS BELIEVED THAT"...("...라고 추정되며...")
==I think.(그냥 내 생각에는.)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A couple of other guys think so too.(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생각한다.)


"CORRECT WITHIN AN ORDER OF MAGNITUDE"...("오차를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참이며...")
==Wrong.(틀렸다.)


"ACCORDING TO STATISTICAL ANALYSIS"...("통계학적 분석에 따르면...")
==Rumor has it.(소문에 따르면,)


"A STATISTICALLY ORIENTED PROJETION OF THE SIGNIFICANCE OF THESE FINDINGS"...
("이 실험결과를 통계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해 보면...")
==A wild guess.(적당히 때려맞춰 보면.)


"A CAREFUL ANALYSIS OF OBTAINABLE DATA"...("데이터 중에서 입수 가능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해 보면...")
==Three pages of notes were obliterated when I knocked over a glass of beer.(맥주를 엎지르는 바람에 데이터를 적은 노트 3장을 날려먹었다.)


IT IS CLEAR THAT MUCH ADDITIONAL WORK WILL BE REQUIRED BEFORE A COMPLETE UNDERSTANDING OF THIS PHENOMENON OCCURS"...("이 현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이루
어지기 위해서는 후속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며...")
==I don't understand it.(이해할 수 없었다.)


"AFTER ADDITIONAL STUDY BY MY COLLEAGUES"...("동료 학자들에 의한 추가적 연구가 이루어진 다음에...")
==They don't understand it either.(그들도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THANKS ARE DUE TO JOE BLOTZ FOR ASSISTANCE WITH THE EXPERIMENT AND TO ANDREA SCHAEFFER FOR VALUABLE DISCUSSIONS"...("실험에 도움을 준 Joe Blotz와 의미있는 토론에 동참해 준 Andrea Schaeffer에게 감사드립니다...")
==Mr. Blotz did the work and Ms. Shaeffer explained to me what it meant.(실험은 Blotz군이 다 했고, 그 실험이 도대체 뭐하는건지 Schaeffer 양이 모두 설명해 주었다.)


"A HIGHLY SIGNIFICANT AREA FOR EXPLORATORY STUDY"...("탐구할만한 가치를 갖는 매우 의미있는 분야라고 생각되며...")
==A totally useless topic selected by my committee.(학회에서 정해 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연구주제.)


IT IS HOPED THAT THIS STUDY WILL STIMULATE FURTHER
INVESTIGATION IN THIS FIELD"...("저의 논문이 이 분야에 있어서의 추가적 연구들에 자극이 되기를 바랍니다...")
==I quit.(저는 그만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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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 한참 맛들이던 시절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쓰인 책의 반은 출판되지 않는다.

출판된 책의 반은 팔리지 않는다.

팔린 책의 반은 읽히지 않는다.

읽힌 책의 반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 책의 반은 잘못 이해된다.

 

그리고 요즘 와서 드는 생각, 나라면 여기다 주 둘 더 보탠다.

 

이해된 지식의 반은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다.

(현실에) 적용된 지식의 반은 악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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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님의 "불칼로 얼음 써는 소리란 - La campanella, Leonid Kogan"

올려주신 귀한 음악, 잘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절제된 정서, 단아한 음률이 하이페츠와 닮은 데가 있군요. 브람스 협주곡은 기본적으로 코간과 코드가 안 맞는 곡 같습니다.(그런데 웃긴 건 전문가들 사이에선 콘드라신(필하모니아)-코간의 브람스가 오이스트라흐를 제치고 최고의 명반으로 꼽혔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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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는 두뇌싸움의 하이라이트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놀라 달아나게 하다"(死諸葛走生仲達)라는 장면을 꼽는다. 이 표현은 수백 년간 인구에 회자되며 아예 격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더 감탄했던 장면은 가후가 조조를 따끔하게 혼내주는 부분이다. 

조조가 연주에 기반을 두고 화북을 장악하려 애쓰던 시절, 이각 곽사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장수(張繡)와 대결하게 되는데, 다른 쪽에서 압박이 들어오자 장수와의 싸움을 그치고 군대를 물린다. 이때 신이 난 장수가 쫓아가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필시 준비를 해 두었을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데리고 나간 장수, 옴팡 깨져서 돌아온다. 풀이 죽어서 가후한테 미안해하는 장수... 그런데 가후는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추격해보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지만... 뭐 어쨌건 그대로 따라 해 본다.그랬더니 역시 조조군은 대오가 흐트러져 박살나고,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진영에 돌아온 장수가 가후에게 묻는다. "어쨌든 자네 말대로 하니 성공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리 되리란 걸 어찌 알았는가?" 가후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조는 자기가 항상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물러날 때도 꼭 꼼수를 써 두지요. 하지만 한번 추격했다가 장군께서 당한 것을 보고는 틀림없이 교만해져서 방비를 풀었을 것입니다."(이 스토리는 <연의>만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에도 나온다)

정말 대단한 심리전의 고수 아닌가?  <삼국지연의>가 단순히 문학작품이 아니라 CEO의 바이블이 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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