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제345호 2014.04.26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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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속내가 복잡한 건 새정연이다. 자칫 세월호 침몰 참사를 정치적으로 엮으려 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정연 쪽에서 참사 이튿날부터 '입단속'에 나선 것은 그런 염려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 닥치고 '좋은 말씀'만 하는 것도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의 태도는 아니다.- p. 29

 


 


나라가 이 정도로 파국이 났으면 이제 서민들을 좀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일인가 6일 전에 새정연은 새누리당 절충안과 함께 애초 당론을 담았던 법안을 수정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사in은, 우리는 뭘 기대한 걸까.

이런 거 보면 4대연금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은데 정직원이라 선택권이 없다.

퇴화시킬 거면 적어도 안 낼 수 있게 해줘... 돈 아까워... 


 이 때만 해도 시사in은 특집 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지, 세월호 참사를 커버스토리로만 조용히 다룬 다음 평소처럼 여러가지 국제기사들을 실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언론과는 다른 기사를 준비하는 시사in답게,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언론인들과 종편의 행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흐름이 돋보였다. 그러나 기사 제목에서는 그런 흐름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말을 아끼는 정치권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깔끔하게 설명해 놓은 것, 학부모 한 명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심정을 객관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도 볼만했다.

 다양성 영화 전용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본인도 영화를 스크린으로 직접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가끔 우리나라의 큰 영화관에서 상영해주지 않는 영화들이 있어서 직접 보러 서울까지 올라가는 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강릉에 독립극장 신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무리해서 서울에 올라가는 일 없이 신영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지 시사in 기사에서도 나오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현재 본인이 기부금을 내는 기관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고 있는데, (최근 통장을 정리하다보니 상당히 많은 기관들이 발견되었다;;;) 그 조사가 끝나고 한바탕 걸러내고 나면, 그 극장에 기부회원이 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다. (사실 나이가 드니 크고 북적북적한 영화관보다는 작고 조용한 데가 좋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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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14.04.22 - 1072호
위클리경향 편집부 엮음 / 경향신문사(잡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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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경제연구소가 지난해 말 낸 '웨어러블의 미래, 패션에서 길을 찾아야' 보고서가 제시한 가설에 따르면 종전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DOP(Display Only Product)라는 전형적인 '폼팩터'로 제작된 기기다. '직사각형의 디스플레이가 적용된 네모난 기기'라는 기본틀 아래 제조사나 제품군은 화면 비율이라든지 버튼의 위치 등을 두고 차이가 난다. 말하자면 경쟁의 룰이 이미 정해져 있는 제품이다. 하지만 웨어러블 기기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웨어러블은 틈새시장에 가깝다.- p. 20

 



이미 드래곤볼에서 나오는 정도의 기술 대부분은 실용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웨어러블 기기들이다.


 아마 위에 그림이 실용화된 것이 구글 글래스일 것이다. 하지만 구글 사장님이 계속 그 안경을 끼고 거리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별반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무색할 정도로 스타일리쉬하고 가벼운 웨어러블 기기가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야망은 유비쿼터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미 핸드폰에 있는 앱을 웨어러블 기기에 전송하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이미 유비쿼터스 관련 백신사업까지 추진 중에 있다 하니, 창업을 하여 '새로운' 웨어러블 사업에 뛰어들기엔 이미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 기사에서도 지적하듯이 삼성이 문제다. 뭐 이전부터 삼성의 과대광고엔 이골이 났으니 심장박동을 체크해 준다는 그 기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분명 그 기술이 도움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갤럭시노트 3와 갤럭시워치를 동시에 시장에 내놓았을 때, 얼리어댑터들은 여러가지로 실망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애플과 속도로 경쟁하려는 생각은 좋았다. 덕분에 삼성을 의식한 애플이 웨어러블 기기를 출시하는데 상당히 지체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삼성의 웨어러블 기기는 그냥 삼성 핸드폰 기기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게 큰일이다. 다른 웨어러블 기기들은 자유롭게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쉽게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삼성은 '자사 제품을 더 많이 팔게 하기 위해 그랬다'라고 해명하는데, 마케팅 수단이라고 좋게 말할 수도 없고 소비자들에게는 답답한 기분과 불쾌감마저 든다. 이제 점점 세계의 기업과 대결할 날이 가까워오는데 이런 회사에서 최소 외국 대기업만큼의 창의성을 바랄 수 있을까 싶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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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말씀의이삭 1
최인호 / 샘터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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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이 우리들에게는 멸망이요 작별이며 떠돌며 우는 슬픈 일이지만 주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부활이며 영원한 만남이며 다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 주님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할 뿐입니다.- p. 299

 


 


역시 난 오덕이라 이 책 제목을 보면 성경보다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생각난다 ㅋㅋㅋ


 딴 길로 새나가는 것 같지만 이 썰은 꼭 풀어나가야겠다. 문학작품에서도 돌연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에도 성경구절이 문득 튀어나올 때가 있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뭔지를 떠나 불교 경전이나 성경이나 베다를 읽은 적이 없다면 그건 그냥 헛껍데기에 다름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잉여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구절이 그렇다. 사실 전체 문장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이다. 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으로서 첫번째 질문엔 여러가지 답변이 있었지만, 두번째 질문엔 단 한가지 대답뿐이다. "스승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신적 지주인 카미나 형이 세상을 바꿀 혁명을 이루려다 죽자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시몬은 큰 좌절과 실망을 겪지만 결국 자아를 찾고, 형이 이루려는 혁명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을 이루려 결심한다. 이 대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줬지만 정작 이 대사가 성경에서 나왔음을 아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발브레이브의 신부설도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나온 것이다.

본인도 BL인지 잠시 헷갈렸으나 나중에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성경을 인용한 것임을 알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 살아있을 적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이 붙었던 적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예수의 행위를 고자질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신랑으로, 신자들을 신부로 비유한 구절도 여럿 있기는 하다. 그러나 카인이 프루를 숭배하듯이 다루는 것을 보건대 절대 프루를 자신의 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세례자 요한의 말을 인용한 게 틀림없다.

 이 책은 신약성서 중 유명한 글귀들, 특히 4개의 복음 중 가장 어렵다는 요한복음을 가장 많이 해설해놓은 책이다. 성경구절을 적어놓고 옆에 관련있는 그림을 달아놓은 뒤, 다음 장에 소설가 최인호의 해설이 적혀있는 식이다. 에반게리온에서도 그랬지만 최근에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대사 중 성경의 구절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달아놓는 게 트렌드인 것 같다. 서브컬쳐를 보는 사람들도 고전이나 경전을 한 번쯤 눈여겨보시길 바란다. 재미가 두 배가 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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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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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파국으로부터가 아니라 파국의 예언자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것 같다. (...)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아서 쾨슬러가 계속 상기시켰듯이(헛수고였다.) 인위적인 맹목은 유전이다...- p. 114

 



 인간은 호모엘리건스. 즉 자유롭게 태어나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운명은 어쩔 수 없으나 자신의 인격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배우자도.)

 

 그러나 대부분은 구조화, 즉 확률의 조작으로 인해 선택지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선 마케팅 전략이라던가 심리학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간단히 예를 들어, 커피무료이용권 없이 로마로 갈래 아니면 커피무료이용권 얻고 로마에 갈래 아니면 그리스에 갈래?라는 선택을 여행사에서 제시할 때 대부분 로마 여행을 선택한다거나. 저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단어가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라 말한다. 그래서 세계에 맞설 용기가 없는 인간들이 간혹 '현실로 돌아가야겠다'라는 븅산탈춤같은 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자, 단지 텍스트에 불과해.'라고 고개를 으쓱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결정적인 문제는 이런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정신병동에 끌려가서 '난 미친 년이 아니다'라는 소리를 해봤자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안 믿으면, 결국 내가 신종 미친 년이 되는 것처럼, 답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냥 미친 년이라고 주장하진 않는다. 수많은 가정들과 근거들이 만들어진다.

 

 1. 경제성장은 만능유일의 길이다.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돈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하고 유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물어보면 보통 사람들은 침묵한다. 혹은 '적당히 돈이 있으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구체적인 액수를 말해보라 하면 침묵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높은 곳에 계신 인간들은 그것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고 판정한다. 결국 신경제주의라는 이론이 생겨 '보이지 않는 손'을 모독한다. 몇 번의 위기상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탈규제를 밀어붙여 부자들이 그 손을 조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아님 매경이코노미같은 잡지를 보면 이 탈규제를 어떤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세뇌시키는지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천재는 소수인데,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 유명인사들과 꼽사리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낙수효과도 결국 경제성장추구의 결과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퇴직 관료 마피아라 한다.)

 

 2. 영구적인 소비증가는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다.

 오빠의 말로는, 서울의 거지들이 제일 비싼 가구를 사서는 집에 들여놓으려고 용을 쓴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요컨대 가난한 현실에 쫓겨 사랑을 받고 자라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치장된 사랑을 구매하면서 인간은 나르시시즘을 느낀다. 그리고 '진짜' 소비자는 실패한 소비자에게 모든 사회 시스템 책임을 귀속시켜, 창피를 느끼게 하고 시스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세월호 추모자들이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않았다며 99%의 시민들에게 빅엿을 날렸던 최근의 익명 기사가 아주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시스템에 분노하지만 배움마저 부족하여 그 힘을 산발적으로 표출하고, 효율적으로 드러낼 줄을 모른다. 결국 남들보다 한 발 앞서야 승리할 수 있다, 내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방식은 개인의 손실을 회복할 수는 있지만 또 다른 불평등을 낳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아랫사람들에게 동정(...ㅋ)을 느껴봤자 시스템의 불평등은 더 심해진다.

 

 3. 불평등은 자연적이라 삶의 불가피성에 말려들어서 사는 게 모두의 이익이다. 경쟁은 사회의 정의인 것이다.

 이 책은 불평등의 격차가 지나치게 심해진 현 상태를 돌아보며 '대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개소리에 대한 규탄을 넘어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론이 헛된 것임을 주장한다. 놀랍게도 외국인들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데카르트와 칸트 이론의 맹점도 깔끔하게 인정한다. 결국 모두 똑같은 소리인데, 한마디로 남들 대다수는 다 따르는데 왜 님은 안 함? 이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경제적 평화에 대해서 설파하고 계신다. 주위에 토마스 홉스 이론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데... 철학적인 면에서도 흥미로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우리는 이미 옛날 고전 소설이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다. 지금 9시 뉴스가 한창 나올 시간인데, 그것만 보면 이미 세월호 침몰에 대한 엄청난 뉴스가 나오고 있다. (내가 보기엔 지금은 국민뉴스같은 팟캐스트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이미 이런 가혹한 일들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다시 희망의 끈을 놓고 절망하고 있다. 돌베게에서 나온 <분노하라> 저서가 강남 코엑스 전시회를 들썩하게 만든 건 이미 머나먼 옛날 일 같다. 지금 국가인권위원회가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는데 쓰레기같은 놈들에게도 최빈곤층 사람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우리 우물 안 개구리들의 고정관념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마치 침략을 당하는 제3세계의 사람들이 그렇듯 무기력한 결말을 맺는다. 아무리 전세계에서 파국의 예언자들이 속속들이 생겨나도 이 파국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한다. 나도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새누리당을 뽑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찬다. 하나만 물어보자. 이 뭣도 없는 인간들아. 당신들이 부자들 편 들면 부자가 될 성 싶으냐? 돈도 빽도 두뇌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으면서 왜 부자들 편을 드는 정치가들을 뽑으려하고 재벌 2세들에게 알랑거리는가? 정신적 딸딸이냐?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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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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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진리. '나는 해야만 한다'는 것.......그것에 의해 살고, 그것에 의해 나의 생과 정신을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 해야만 한다'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결정해 줘야 한다.
자기 훈련, 목적 의식, 겸손하고 자기의 환경을 의식한 일에 대한 인내, 인생에 다르게 마련인 가지가지 불쾌감에 대한 관용.......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밤낮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만하고 완벽한 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신으로의 복귀한 당위적 자아로의 복귀, 진정한 자아로의 복귀, 본질에로의, 근원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 p. 80

 


 


오늘 3시간 잤고 부들부들 떨다가 진짜 리뷰쓰는 거 포기할까 생각하다 간신히 글 올린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이젠 정말 진지해져서 그 말 꺼내다간 돌 맞을 시기다.

4.19 새벽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위하시고 계시고 4월 20일 지금은 부활절에 경찰들과 대치중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봤다.


 어느 언론이 '시신 수습 성공'이라는 단어를 올려서 맘에 걸린다. 욕하기 전에 검색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시신을 수습하다'와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동시에 구글에 검색해보았다. '시신을 수습하다'라는 검색어엔 그나마 얌전한 기사들이 나온다. 그러나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검색하니 갑자기 '호박죽 만들기에 성공하다'같은 기사가 떠서 본인을 멘붕에 빠뜨렸다.

 


 그렇다. 분명히 어감이 다르다.

 '성공을 거두다'라는 말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는 국가니 종교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님의 시신을 거두다'같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시신을 거두기에 성공하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마 그 땐 수습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분명 자살한 사람의 감상적인 독백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지식인이 되고 싶은 여성으로서 최고로 부러운 교육들을 받았다. 한국에 와서도 독일어 교수로 채용되어 명문대를 전진하고 다니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많은 활동을 했다. 아마 자기계발서 같은 걸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여성의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자서전이 아닌 비밀스런 일기를 쓰고, 31살이란 젊은 나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러나 요컨대 너무 큰 '성공'을 했다는 게 문제이다. 영혼과 지식이 너무나 풍부했던 그 여자는 겸손했고 자신이 좀 더 성숙해지길 바랬다. 우회해서 발언했지만 박정희식 정치의 맹점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지붕수리한다고 망치를 땅땅 치느라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 '불통의 시대'였다. 사회적 동물은 소통과 공감을 못하면 정신이 고파서 죽는다. 그 유명한 예수님도 총 12명의 제자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지 못하여 그 감정을 '목이 마르다'라고 표현했다. 신체상으로 볼 때 물은 3일 이상 안 마시면 죽는다.

 그녀는 '그의 의식에 비친 내 의식에 구토를 느꼈다'라는 단 한 구절을 썼다. 이게 1964년 12월 8일날 쓰여졌고 그녀는 1965년 1월 10일에 자살했다.

 더 늦기 전에 내 모습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비치는지를 돌아보라. 그리고 그들과 자신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눠라. 아직 맨 정신이 유지되고 있을 때 실행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부모도, 나라도 아니다. 애초에 세상에 나오고 싶었는지는 우리 영혼에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을 테니. 그 질문을 할 만큼 머리가 무르익었다면 영혼은 속세에 찌든지 오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시신 수습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봐도 분노할 기운이 없을 만큼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 자들이 행복해지려면, 가끔은 이렇게 영혼을 갈고 닦아주는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각성과 근원적 자아로의 복귀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근원적 자아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올 때, 우리는 그것과 기꺼이 헤어지며 또 만날 순간을 즐겁게 기다려야 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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