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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1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원수
내
청춘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하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
나
지금 사상의 가을에 닿았으니,
삽과
갈퀴 들고 다시 긁어 모아야지,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곳곳이
커다란
웅덩이들 파놓았으니.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활력이 될 신비의 양분을
얻을지를?
ㅡ오 괴로워라! 괴로워라! <시간>은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정체모를
<원수>는
우리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지는구나!- p. 24
악의 꽃 삽화는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듯하다.
딱히 악의 '꽃'이라는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시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든다.
그러나 아무리 후대에 천재 시인이라 칭송받더라도 시인 그 자신은 부모의 인정을 못 받아서 얼마나 고뇌했는지 알 수 있다. '돈 하나 벌
줄 모르고 방탕한 친구들과 시짓기나 하는' 보들레르는 그로 인해 돌아가신 부친이 남겨둔 재산까지 제한당하자, 그 때부터 모친도 냉대한 듯하다.
다른 모든 예술가들이 가족의 냉대엔 관심도 없었다 할지라도, 근대 방랑시인의 이미지를 처음 남겨준 보들레르 그 자신은 관심이 없진 않았던
듯하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라는 시를 써서 자신을 그 새를 비유할까. 어떤 이유로 인해 하늘에 추락해서 발에 땅이 묶인 새. 하늘을 날아다니면
크고 멋있지만, 땅에서 걸어다니면 거치적거리기만 하고 뒤뚱거리게만 하는 날개. 그로 인해 놀림당하는 부끄러운 자신.
보들레르는 말년에서야 어머니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서는 어떨까. 이 시에서 나는 씁쓸함과 가슴아픈 연민을
느낄 뿐이었다. 남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할 예술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푹 빠져들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정으로든 남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푹 빠져들만한 책이다. 안타깝게도 세월이 너무 지나 사람들은 영상으로 고어와 선정성있는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그의 작품성은 문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이제 악의 꽃에서 나오는 시 뿐만 아니라 삭제조치되었던 작품들조차
보들레르가 독자들이 느끼리라 기대하고 추구했던 충격을 경험할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