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N PEAKS〉
        시즌 2 
        에피소드 12 (20)
        타이틀 The Black Widow
        각본 Harley Peyton & Robert Engels
        감독 Caleb Deschanel
        방영일 1991
년 1월 12일 
 

 


1. 이야기  

데일은 트윈 픽스에 오래 머물 요량으로 집을 구하다 우연히 코카인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 곳에서 장 르노, 행크 제닝스, 어니 나일스, 캐나다 경찰 킹이 마약 거래에 관한 회합을 벌였으며, 바비 브릭스는 벤자민 혼에게 고용되어 행크 제닝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사하다 이 현장을 발견한다. 오드리 혼은 데일에게 이 증거를 전해주고, 데일은 DEA 요원 드니스 브라이슨과 수사에 착수한다.  

에블린의 집에 머물고 있는 제임스 헐리는 점차 그녀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녀는 남편에게 주기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으며, 그녀의 오빠이자 운전사인 말콤은 제임스에게 에블린에 대한 동정심과 남편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긴다.  

젊은 여인 라나와 결혼한 더그 밀포드는 복상사로 죽었고, 그의 형인 드웨인 밀포드 시장은 라나가 범인이라며 보안관들에게 수사를 종용한다. 딕 트레메인은 꼬마 니키가 악마라 생각하고 그의 출생의 비밀을 의심한다. 사라졌던 브릭스 소령이 갑자기 집에 돌아온다.  

 

 

 

 

2. 걸프전(Gulf War)  

17번 째 에피소드가 방영된 1990년 11월 17일을 마지막으로, <트윈 픽스>의 방영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뤄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걸프전 때문이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에 철수를 요구하며 제재를 가했지만,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일방적인 합병을 선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쿠웨이트 유전에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프랑스, 이집트 등 주요 국가들이 다국적군에 합류했고, 유엔은 11월 29일 무력사용을 허용했다.  

이 전쟁이 유독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최초로 TV로 생중계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CNN을 비롯한 각 방송사들은 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다양한 앵글로 전장의 스펙터클을 생중계했으며,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타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을 브라운관으로 ‘즐기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현실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미국 촌구석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보다(게다가 이미 로라 파머의 범인도 밝혀진 상태였다), 지금 저기서 벌어지는 스펙터클에 관심을 두었다. 시청률에 움직이는 ABC 방송사 입장에서는 드라마보다는 전쟁 생중계에 더 관심을 두었고, <트윈 픽스>는 2주간 결방을 한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돌입하자, <트윈 픽스>는 12월 1일에 방송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 따라 결방이 이어졌고, 이것은 연속극의 입장에서는 독(毒)이 되는 편성이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편성으로 SBS의 드라마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비교해본다면, 당시 ABC 방송국의 행태가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결방과 로라 파머라는 드라마의 동력을 잃은 상태에서, 그리고 시리즈의 크리에이터인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의 관심 저하로 엉거주춤하는 사이, <트윈 픽스>는 점점 힘이 빠져가기 시작했다.  

 

 

3. 문학적 인용  

<트윈 픽스>에는 문학적 인용이 많이 들어있지만, 유독 이번 회에서는 그 인용이 넘친다. 피트 마르텔과 캐서린 마르텔의 축하 자리에서는 예이츠의 시가 흘러나오고, 졸지에 미망인이 된 라나를 본 남자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낭송한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나니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진리로 알 것은 다만 이것뿐. 
              나는 술잔을 입에다 들고 
              그대를 바라보며 탄식 하노라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sigh  

- William Butler Yeats 「Wine Drinking Song」 -             

 

  

 

              아, 횃불은 그녀에게서 불타는 법을 배워야 하겠구나! 
              검은 에티오피아인의 귀에 걸린 값비싼 보석처럼 
              밤의 볼에 걸려있어. 
              사용하기엔 너무 고귀한, 속세의 것이 되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여!  

              44 O, she doth teach the torches to burn bright! 
              45 It seems she hangs upon the cheek of night 
              46 Like a rich jewel in an Ethiope's ear; 
              47 Beauty too rich for use, for earth too dear!  

- William Shakespeare 『Romeo and Juliet』: Act 1, Scene 5 -             

 

물론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학적 인용을 하겠냐만, 때로는 진심을 드러내는 직설적인 대사보다 이런 에둘러 표현한 인용이 멋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기억할만한 지나침  

니키의 부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Be Killed)는 말 때문에, 딕 트레메인은 니키를 불운을 몰고 오는 악마라고 생각한다. 니키를 보여주는 숏은 일부러 <오멘>의 데미안을 떠올리게 찍었다.  

 

 

벤자민 혼은 게티즈버그 전투 놀이에 집착한다. 그는 특히 남부의 로버트 에드워드 리(Robert Edward Lee) 장군에 집착하는데, 벤자민 혼의 상황과 리 장군의 상황은 일면 맞아 보인다. 그는 역사를 패배한 역사를 되돌리고 싶어한다.  

 

말콤은 제임스를 자극하고, 에블린은 그런 제임스를 유혹한다. 너무나 전형적인 팜므 파탈 그리고 느와르.  

 

드웨인 밀포드 시장은 제수씨인 라나가 자신의 동생을 무리한 섹스로 죽였다고 믿는다. 유난히 섹스에 집착하는 밀포드 시장은 이미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의 매력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5. 덧붙임  

a.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b. 콘텐츠 중 캡처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c. Refer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 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TWIN PEAKS #2.012』 스크립트, 5th Revisions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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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공포 만화로 분류되지만, 모로호시 다이지로와 이토 준지는 장르로 규정짓기가 딱히 애매한 작가들이다. 굳이 장르를 규정짓자면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는 순정 만화의 틀을 빌려, 규정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은 시침 뚝 떼고 진행한다. 귀신과 요괴는 물론이고 (H. P. 러브크래프트에게서 빌려온 게 분명한) 이계의 존재들을 끌고 와 소소한 일상(?)을 풀어내는 솜씨는 작가의 투박한 그림체를 잊을 만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항상 시미코네 집에서 하고 있는 헌책방이라는 점이다. 헌책방이라기보다는 고서점이 더 어울리는 우론당에는 신기한 책들이 넘쳐난다. 귀신과 악마를 불러들이는 주술을 다루는 책은 평범한 편이며, 직립어류에 관한 책, 잘린 목을 키우는 방법에 관한 책 등은 물론이고, 생물처럼 살아있는 책들도 있다. 이들 살아있는 책은 글자를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독서하는 사람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책이 사람을 잡아먹다니! 

   

 

하지만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중 책에 대한 가장 압권은 『밤의 물고기』에 실린 「헌책 지옥 저택」이다. 이 헌책 저택엔 거의 쓰레기로 분류되는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중 독서가들이 정말로 읽고 싶었던(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갖고 싶었던) 절판된 책들이 숨어 있다. 운이 좋아 원하는 책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책을 빼서는 안 된다. 책을 함부로 빼면 헌책(으로 이루어진) 저택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선 이 안의 룰을 따라야 하는데 그 방법이 참으로 기막히다.   



 

하지만 책 욕심이 앞선 시미코는 룰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책을 빼내고 결국 저택은 무너지고 만다. 알고 보니 이곳은 헌책을 모으다 죽은 원귀들이 있는 헌책 지옥이었다. 이들의 사연은 참으로 박장대소하게 만들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아 섬뜩하기도 하다. 나는 책을 읽는가, 아니면 책을 모으는가. 읽는 것과 모으는 것, 사는 것과 빌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면, 항상 내 독서습관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직까지 쉽게 나지 않고 있다.

 

시오리는 시미코가 가지고 싶었던 책을 뺏아 지옥에 던짐으로서 현실 세계로 나올 수 있었다. 저승에서 원하는 책을 갖는 게 나을까, 아니면 현실에서 책 없이 지내는 게 나을까?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제괴지이: 호중천』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했었다. 이상적이지만 너무도 쓸쓸한, 그래서 염세적으로 느껴지는 대답.   

 

이토 준지도 책에 대한 공포를 다룬 적이 있다. 『신 어둠의 목소리: 궤담』의 「장서환영」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토 준지는 콜렉터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화자인 부인은 장서가인 남편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이 장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15만 권이 넘는 책을 세 번 씩이나 완독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있다. 그는 그 많은 책의 위치를 다 꿰차고 있으며, 한 권이라도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질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아버지가 아꼈던 『유극지옥』이라는 책이 사라지는 일이 생긴다. 남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는 어린 남편에게 밤마다 공포소설을 읽어주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책이었던 것이다. 책이 사라진 날, 남편은 꿈에서, 사라진 책이 아버지로 나타나 책을 읽어주는 고문을 당한다. 지옥과도 같은 고문을 견디어내자, 『유극지옥』은 사라진다. 그런데 이번엔 어머니가 아꼈던 『겨울바람의 르네』가 사라진다. 『겨울바람의 르네』는 남편의 어머니가 가출하기 전, 밤마다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책이다. 남편은 『겨울바람의 르네』를 꿈꾼다. 그리고 그 책이 낭독을 끝마치자, 『유극지옥』처럼 사라지고 만다. 남편은 더 이상 어머니를 추억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간직하려는 듯,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암기하기 시작한다.   







 

책은 정보의 기능도 있지만, 지워버리고도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이자,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기도 하다. 악몽과 추억이 서로 공존하는 서가라는 공간. 그리고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매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책에 담긴 정수를 느끼는 것일까.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이런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Reader와 Collector의 차이. 그 차이마저 수집하고 싶어 하는 이토 준지의 무시무시한 공포.  

 

 

*덧붙임:  

예전에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고 합니다. (⇒ 클릭)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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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7-1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 준지 책은 정말 대단해용^^ 재밌긴한데 무서워서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더군요^^

Tomek 2010-07-16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두 번 정도 빌려보다가 기어이 샀습니다. 이상하게 빨려들더라고요..
:)

라로 2010-07-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패스해야겠어요,,,워낙 겁이 많은지라,,^^;;;

Tomek 2010-07-16 08: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번 읽어보시면... :D
 

 

 
        〈TWIN PEAKS〉
        시즌 2 
        에피소드 11 (19)
        타이틀 Masked Ball
        각본 Barry Pullman
        감독 Duwayne Dunham
        방영일 1990
년 12월 15일 
 

 

 

1. 이야기  

데일 쿠퍼와 함께 캠핑을 즐기던 브릭스 소령이 사라졌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다. 호크가 데일에게 브릭스 소령이 사라지기 전에 했던 ‘하얀 오두막’과 ‘검정 오두막’에 관한 전설을 말해준다.  

데일에 관한 심리가 진행되고 예정대로 DEA 요원 드니스 브라이슨이 트윈 픽스에 도착, 사건을 맡는다. 그와 동시에 데일은 윈덤 얼에게 편지를 받는다.  

제임스는 트윈 픽스에서 조금 떨어진 바에서 에블린이란 여인을 만나고 그녀 남편의 차를 수리한다. 네이딘은 학교에서 빅 에드 대신 레슬링부의 마이크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령숲 개발과 패커드 제재소를 잃은 벤은 실의에 빠진다. 행크가 나타나 벤에게 애꾸눈 잭의 소유권이 이전되었음을 통보하고 떠난다. 벤은 충격에 빠진다.  

조시는 조직의 수장인 토마스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트윈 픽스로 돌아왔다. 그녀는 캐서린을 찾아가 남편 앤드류를 죽인 일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빈다. 캐서린은 그녀를 하녀로 삼는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앤드류 패커드가 나타나 캐서린과 음모를 꾸민다.  









 

 

 

2. 가득 찼지만 텅 비어있는  

<트윈 픽스>의 19번 째 에피소드는 거의 파일럿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등장인물과 사건이 쏟아져 나오지만, ‘로라 파머의 죽음’ 같은 강렬한 구심점이 없는 관계로 이야기는 각자 따로 진행하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이제는 트윈 픽스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극을 이끌게 된다.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가 "이상한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을 떠올려보면, <트윈 픽스>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딴 곳으로 향해 가는지를 알 수 있다.  

가장 큰 실패는 제임스에 관한 에피소드다. 애당초 제임스 헐리는 그렇게 특별한 캐릭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그를 이야기의 한 축으로 설정했다. 게다가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트윈 픽스를 벗어난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다. 이것은 명백한 기획 의도의 오류임 동시에 시즌 오프의 개념이다. 트윈 픽스의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과 그 장소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인데, 작가들은 그 전제에서 자꾸 벗어나고 있다.   



 

 

 

3. 흰 오두막, 검정 오두막  

브릭스 소령이 사라지기 전, 데일은 브릭스 소령으로부터 ‘흰 오두막’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호크 보안관보가 데일에게 '흰 오두막'과 '검정 오두막'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걸 대체 어디서 들은 거죠?"

 

호크: 지역 전설이죠. 흰 오두막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자연을 지배하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곳이에요.
데일: 한 번 보고 싶은 곳이군요!
호크: 많은 사람들이 그랬죠. 하지만 그곳은 오로지 영적인 단계로만 존재해요. 또 ‘검정 오두막’에 관한 전설도 있죠. 흰 오두막의 어두운 면이자 이 세계를 어둠의 힘으로 이끄는 장소이죠. 악몽의 세계에요. 주술로 아이들이 사라지고, 성난 영혼들이 숲에서 나오며,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무덤이 열리죠.
데일: 무시무시하군요.
호크: 전설에 따르면 모든 영혼은 완전한 세상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거쳐야 한다고 했어요. 그곳에서 자신의 어두운 자아를 만나죠. 우리 종족들은 그것을 ‘문지방의 거주자’라고 불러요. 하지만 만일 그 영혼이 검정 오두막에서 부족한 용기로 자신의 자아를 대하지 못하면, 그 영혼은 완벽하게 파괴된다고 하지요.
데일: 세상에나.  

 

흰 오두막과 검정 오두막은 데일이 꾼 꿈속의 빨간방을 확장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설정은 굉장히 안타까운 결과물을 낳았는데, 데이빗 린치가 애초에 생각했던 선과 악의 모호함이 사라지고 확실하게 갈리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그 경계의 모호함에 있던 인물/존재들이 편을 갈러 나뉘기 시작한다. 모호함은 사라지고 구분만이 남은 세상. 트윈 픽스는 회를 거듭할수록 그렇게 아우라를 하나씩 잃어 간다.   

 

 

3-1. 앤스락스, 안젤로 바달라멘티, 트렌트 레즈너  

예전엔 고유명사 같은 독특한 이름이었지만, 911 테러 이후 보통명사가 된 헤비메탈 그룹 앤스락스(Anthrax)는 <트윈 픽스>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드라마에 빠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트윈 픽스>에 영감을 받은 곡을 만들었는데, 그 곡이 바로 「Black Lodge(검정 오두막)」이다. 이들은 한 술 더 떠 <트윈 픽스>의 음악을 맡은 안젤로 바달라멘티를 모셔와 공동 작업으로 곡을 만들었다.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나인 인치 네일스(NIN)의 트렌트 레즈너 역시 <트윈 픽스>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트윈 픽스>의 방송일이 제멋대로 잡힐 무렵 NIN은 전미 투어를 잡았었는데 <트윈 픽스>의 마지막 방송일이 잡히자 트렌트 레즈너는 “<트윈 픽스>를 봐야한다”는 이유로 투어를 취소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런 점이 기특해서였는지(?), 데이빗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를 감독할 때 그에게 음악 감독을 맡긴다. 린치의 신임을 듬뿍받은 트렌트 레즈너는 <로스트 하이웨이> OST를 자신의 역작 <올리버 스톤의 킬러(Natural Born Killers)> OST와 같이, 기막힌 노래들로 가득 채워 놓았다.  

    

 

 

 

4. 드니스/데니스 브라이슨  

데일과 관련한 마약 수사를 위해 트윈 픽스에 도착한 드니스/데니스 브라이슨(David Duchovny)은 복장 도착자(transvestite)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지금이야 <엑스 파일(X-Files)>의 주인공 멀더의 흑역사로 치부되지만... 그는 여성 복장을 했을 때는 자신을 드니스(Denise)라 소개하지만, 남성 복장을 할 때는 데니스(Dennis)라 소개할 만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구분을 가지고 있다.   



         

 

그가 여성복장을 입는 이유는 꽤나 독특하다. 수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성 복장을 입었는데, 그 옷이 그렇게 편했기 때문에 아예 여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의 <광란자(Cruising)>의 귀여운(!) 오마주다. 차이가 있다면 <광란자>의 스티븐 형사(알 파치노)는 동성애자가 되어버리고 괴로워하지만, 드니스는 스스로 이 상황을 즐긴다는 점이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은, 미국에선 1980년대나 1990년대 모두 동성애자나 복장 도착자들을 위험하거나 신기한 존재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때 제작된 <양들의 침묵>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조나단 드미 감독 역시 성도착자이자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테드 라빈)을 ‘미친놈’으로 스케치했다. 199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성애자들은 시위를 벌였고,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인물에 접근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만들었다.  

    

 

 

 

5. 기억할만한 지나침  

네이딘은 같이 학교에 다니는 마이크(바비의 단짝!)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더 이상 에드에 관심이 없다.  

"에드는 집에 있고 마이크는 학교에 있어. 에드는 집에만 있는데 마이크는 나가길 좋아하지. 좀 현실적이 되자고. 가끔 에드는 우리 아빠같이 나이 들어 보이거든." 

에드가 노마와 함께 같이 지내지 못한 것은 네이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이딘이 스스로 떠나려 한다. 에드와 노마에게는 물론 네이딘까지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인 셈이다. 물론 호시탐탐 행크가 노리고 있겠지만.  

 

 



죽은 줄 알았던 앤드류 패커드(Dan O'Herlihy)의 등장은 놀라움 보다는 한숨이 나오는 설정이다. 이미 그 자체로 완료형이었던 인물들이 드라마의 연장을 위해 하나씩 불려나오는 설정은 안타까울 뿐이다.  

 

 

유령숲 프로젝트와 제재소 소유권을 빼앗긴 벤자민 혼에게 행크는 애꾸눈 잭의 소유권이 이전됐다는 소식을 통보한다. 이제 벤자민에게 남은 것은 그레이트 노던 호텔뿐이다.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정신 공황에 빠진다. 더 이상 돌릴 필름이 없는 스크린 앞에 서 있는 벤자민의 모습은 그의 인생이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윈덤 얼이 드디어 움직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행보는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한다.  

 

 

6. 덧붙임  

a.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b. 콘텐츠 중 캡처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c. Refer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 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TWIN PEAKS #2.011』 스크립트, 3rd Revisions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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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7월 2주

 

며칠 전에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을 봤습니다. 이 영화는 인디포럼 월례비행에서 본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처럼 보는 순간 극도의 인내를 요하는 힘든 영화지만, 보고 난 후에야 정말 엄청난 영화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에 휘둘리는 것이 아닌, 온전히 경험하고 나서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1913년 오스트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을의 의사가 외진을 다녀오는 길에 낙마하는 사고를 겪습니다. 누군가가 길에 줄을 묶어 놓아 일부러 사고를 일으킨 것이죠. 증거가 없어 사건은 흐지부지 되어가는 와중에 소작농 부인이 사고로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을을 지배하는 남작의 관할지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사건은 부인의 잘못으로 처리됩니다. 그 후 남작의 아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마을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얀 리본>은 몇 줄로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제가 낑낑대며 쓴 줄거리는 영화를 1/10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얀 리본>은 몇 명의 주인공에 집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을 둘러싼 불길한 기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한적한 시골마을은 불길함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엄격한 목사는 잔인한 방법으로 자식들을 통제합니다. 인자한 의사는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이고, 마을의 산파와 밀회를 갖습니다. 아이들은 이상한 비밀을 지닌 듯 무리를 짓고 다니고, 그 중 한 명은 꿈속에서 다음 희생자를 봅니다. 이것은 언뜻 <트윈 픽스>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마크 프로스트와 데이빗 린치가 창조해낸 가상의 마을 트윈 픽스 또한 같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차이가 있다면, 데이빗 린치는 이 이야기들을 '불길하게 드러냅니다.' 사운드는 뒤틀려 있고, 화면은 어두우며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괴합니다. 외부인인 데일 쿠퍼가 마을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하지만, 결국엔 그도 그 마을의 일원이 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착한 데일은 '검은 오두막'에 잡혀 있고, 나쁜 데일이 트윈 픽스에 있게 되죠. 데이빗 린치는 트윈 픽스의 미스터리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밥(BOB)'이라는 악의 형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트윈 픽스>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지, 아니면, 숲에 거주하는 악의 소행으로 볼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카엘 하네케의 방식은 다릅니다. 그는 이 기괴한 이야기에 감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음악도 영화 속에서 연주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한 곡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살을 다 발라내고 뼈만 남겼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다루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이상한 힘이 아닌) 반복되는 폭력의 순환입니다.  

<하얀 리본>의 작은 마을은 계급 사회입니다. 남작이 지배하고 부르주아 계급인 목사와 성직자가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살고 있지요. 계급을 막론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은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새장 안에 갇혀 길들여진 새는 자유를 모르기 때문에 새장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폭력으로 아이들을 제어하고 협박하며 자신의 시스템 안에 길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모방하기 마련입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에 복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어른들의 방식으로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이 지나치도록 무서운 폭력의 순환! 속하지 못하면 내치는 전체주의의 발로! 작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새 국가와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뀝니다. 일련의 죽음들 속에서,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황태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는 묘한 울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자신들만의 공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가 있습니다. 끔찍한 사회를 견디지 못해 문명 세계의 모든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국해 살아가는 어른들은 옆 마을(바깥세상)에 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말끔히 지워버립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미신의 시대에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엄청난 법이니까요. 어른들의 편리로 아이들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갇혀 지냅니다. 결국 모든 비밀이 밝혀지지만,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먼 소녀입니다. 그녀는 마을로 돌아가 그녀가 겪은 일을 자신의 상상력에 기대어 이야기 할 것이고, 그렇게 마을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공고히 다져질 것입니다.  

<하얀 리본>의 하얀 리본은 정직과 순수를 의미합니다. 목사는 저녁 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매질을 하며 하얀 리본을 매게 한 후, 이 하얀 리본을 보면서 정직과 순수를 떠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강제로 맨 하얀 리본을 통해 배웠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폭력, 위선, 시기, 절망, 분노가 바로 아이들에게는 하얀 리본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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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7-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캐이블에서 해줬던 스티븐 킹 원작의 살렘스 롯(뱀파이어 빌리지)도 분위기 하나 만큼은 끝내주더군요.

Tomek 2010-07-10 07:11   좋아요 0 | URL
전 살렘스 롯하고 옥수수밭의 아이들하고 자꾸 헷갈려요... ㅠㅠ 저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어느덧 2010년도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5기에 이어서 6기 신간 평가단에 참여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나름 행운이었고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5기 때는 (힘겨운) 직장 생활과 병행해 책을 허겁지겁 읽어 아쉬움이 많았던지라, 6기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을 작정을 했었습니다. 시간이 그만큼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꽉 짜인 일상에서 헐거운 일상으로 자리 이동 중,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와, 근 한 달 넘게 책을 읽지 않고 지냈습니다. 서재도 거의 방치하고 지내는 수준이었고, 짧은 기간 (나름) 많이 사귀었던 알라디너 분들과도 소원해졌지요. 5월 중순 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 기간 동안은 제대로 책을 읽지 않고, 활동도 하지 않은 무책임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5기와 6기 신간평가단을 지원할 때 어떤 마음으로 지원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서평단을 지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꾸준히 서평을 올려서 나태한 제 자신을 다잡는 기회로 삼고 싶어서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제 입맛에만 맞는 편식한 독서에서 벗어나보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좋은 신간을 발견하면, 알라디너들께 소개해 주고 싶은, 발견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에세이, 과학, 잠언 등으로 묶인 죽음에 관한 성찰입니다. 이 책은 어느 카테고리에 분류해야할지 망설임을 불러일으킵니다. 나쁘게 보자면, 죽음이란 주제를 진중하게 풀지 못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끌어다 쓴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죽음에 대해 여러 담론을 끌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 긍정적인 모습에 한 표 던집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야기의 톤이 시시때때로 바뀌어 당황스러웠지만, 다 읽고 나니, 죽음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이야기니까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는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혹은 오명)한 김태권 작가의 학습만화입니다. 아직 서양의 중세 이야기를 다 풀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발간한 이 '동아시아' 프로젝트를 처음 접했을 때는 반가움보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컸습니다. 도대체 언제 끝낼 것인가? "이번만큼은 믿어 달라"는 작가의 말도 있으니, 한 번 더 믿어봐야겠지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는 『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렸지만, 우리가 익숙해하는, 소위 '설(說)'에 반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사마천이 역사적 사실과 소문을 한데 담아, 독자가 취사선택할 수 있게 했다면, 김태권 작가는 소문은 덜어내고 오직 역사적 사실만을 유추하며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렇기에 조금은 딱딱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역사와 인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 이번에는 꼭 완간하시기 바랍니다.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은 일만하고 놀 줄 모르는, 노는 것은 음주와 쇼핑 정도 밖에 모르는 불쌍한 우리들을 위한 책입니다. 세상은 이만큼 진화했는데, 아직도 6~70년대 제조업의 기적을 바라는 높으신 분들은 무조건 야근에 책상에 앉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데에 쓰이기도 하죠. 이 책은 당연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노는 것은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일을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이의 반대말은 일이 아니라 우울함"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괴롭게 직장에 메여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은 고통이지만, 우리는 매 순간 즐거워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꿈꾸는 20대,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는 자기 계발서입니다. 다른 계발서와 다른 점이라면, 『사기』에서 이야기를 끌어온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는 이야기의 교훈을 도식적으로 분류한 것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를 지엽적으로 푼 것에 대한 반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수록된 '이야기'의 재미는 굉장했습니다. '쉽게 풀어 쓴 사기'라 해도 좋을 만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의 저자 김소영 씨는 교수이자 평론가이고 영화감독입니다. 그녀는 정성일, 허문영 씨와 함께 영화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풀어놓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씨네 21>에는 이들의 글이 정기적으로 실렸지요. 책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한국 영화의 절반가량은 저 같은 사람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작품들이라, 텍스트로만 만나야 하기에 아쉬움이 큰 편이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경관은 한 번쯤 따라 갈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순한 가이드가 아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소개는 영화, 특히 '한국' 영화는 시공간을 어떻게 경유하고 견뎌왔는지에 대한 사색을 전해줍니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술과 철학이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면서도 의외로 잘 어울리는 두 주제를 잘 버무렸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읽을 수는 없는 책이었습니다. 적은 분량에 고대부터 근대까지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술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취한 느낌이 든 것처럼 밀려드는 정보와 사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신선했다고 생각합니다.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 단어의 유래를 들어 서양사의 역사와 문화, 사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영단어 외우기 비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시험에 나오는 영단어를 설명하지도 않지요. 이택광 교수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영어를 시험으로 바라보지 않고, 문화로 대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이야기하는 영어 단어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언어는 문화’라는 기본 명제를 가장 잘 설명하고, 그만큼 쉽게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는 다분히 전투적입니다. 2010년 한국에서 불온하게 소비되는 '좌파'라는 단어와 순수 학문으로의 기능을 잃은 '인문학'을 접붙인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망선고를 받은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이택광 교수는 지금 2010년 인문학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역시 읽는데 만만치 않은 책이었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제대로 읽었는지 회의하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다 죽었다고 생각한 인문학의 효용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기 언급한 철학자들의 먼지 묻은 서적을 다시 꺼내어 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중요한 책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은 회화와 음악을 인문학적인 접근이 아닌, 저자 개인의 감상으로 접근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부분으로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과하게 풀어 놓아서 그 거부감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화와 미술은 창조자의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결과물입니다. 저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을 드러내며 회화와 음악을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접근 방법은 참신합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강연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멋대로 부제를 단다면, '이명박 프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리영희 선생님, 죄송합니다), MB 정권 시대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부터, 토건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대통령의 '삽질 마인드'까지 지금 대한민국에 드러나 있는 모든 문제점을 다루었습니다. 때로는 실소를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분노와 좌절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에 감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그냥 실천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것도 거창한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민주주의란 그렇게, 작지만, 개인이 움직여 큰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이 책은 이야기합니다.  

『우울의 심리학』은 우울증에 관해 이야기입니다. 우울증이란 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질병인지를 이야기하고, 그 무시무시한 우울증에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게 워낙에 개인별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방법이 통할까 궁금해 했었는데, 저자는 일반적인 치료법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울증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위로와도 같은 책입니다. 물론 저자가 겪은 우울증의 진폭은 좀 큰 편이지만, 그녀의 위로는 어설픈 심리 치료보다 훨씬 위안이 됩니다.  

『착한 여자는 왜 살찔까』는 비만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책입니다. 비만에 대한 너무 일반적인 접근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이 책은 비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 착한 성격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착한 그녀들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녀들의 삶은 거의 성직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나면, 자신을 위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뒤 고스란히 남는 스트레스. 부족한 시간과 스트레스는 먹을 것으로 귀결됩니다. 착한 여자들이 살이 찌는 이유는 그녀들이 (적당히) 이기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남을 위한 삶은 그만 살고,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에는 음식 보다 더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7기에도 지원하고 싶었지만, 7월 말에 있을 이사 때문에 지원을 못했습니다. 기회가 허락된다면 8기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신간평가단의 책 읽기는 항상 긴장과 비판과 즐거움이 수반되니까요. 그동안 좋은 책 보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구절  

롱펠로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불러온 것을 보니 내가 정말로 아픈가보구나.'

전 여동생하고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서로 쌓기만 하고 터뜨리지 않아 결국엔 터져버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한동안 거의 말을 지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쓰인 명사들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들을 읽으면서, 유난히 이 글귀에 마음이 아렸던 것은 동생에 대한 아마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과 애틋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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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신간평가단에 참여하면서 즐거웠던 일들 중 하나는 Tomek님 리뷰 읽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끝내지 못한 리뷰가 2권이나 있어서(엉~엉~) 빨리 끝내야...

Tomek 2010-07-09 13: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잘 썼어야 했는데 성격대로 너무 설렁설렁해서 아쉬움이 도네요...
굿바이님은 7기 지원하셨나요?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D

2010-07-09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0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습니다. Tomek님. Tomek님 덕분에 든든했답니다. ^-^
설렁설렁이라뇨, 무엇보다 정성스러운 페이퍼, 잘 읽었고, 고맙습니다.

저 위에 굿바이님은 7기 지원을 하지 않으셨답니다. 참 아쉬운 일이죠 ㅜ_ㅜ
그리고 Tomek님의 베스트 다섯권이, 저는 진심으로 궁금하니다. 하하.
이사 잘 하시고요. ^-^ 그간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지막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Tomek 2010-07-10 07: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지나고나니 자꾸 아쉬움만 남아요... 좀 잘 할걸...

전 모든 책이 베스트여서 다섯 권을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5기 때도 그랬고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책들에게 미안해서... :D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7기 때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