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앵무새 죽이기>책을 넘겨 받고
반아이들과 함께하는 아침독서10분을 이용하여 이 책을 읽었다.
아침독서 시간에는 대부분 아이들 책을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일부러 아이들한테 자극을 주려고 전시용으로 읽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두꺼운 책도 읽는다는 것도 보여줄 겸 겸사겸사...
내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으니 두꺼운 책을 가져와서 읽는 아이도 보였다.
물론 중간에 포기하였지만서도
그 시도가 갸륵하다.
" 얘들아, 중학생 정도 되면 너희들도 꼭 읽어보세요. " 라고 말하며
가끔 가다 책 내용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태생이 책벌레가 아니라서 이렇게 두꺼운 책은 아직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하여 하루에 50쪽씩은 읽자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한 날도 여러 날 있었다.
왜냐하면 아침독서 10분 동안 50쪽을 읽을만큼 속독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다.
딸도 다 읽었는데 엄마가 되어가지고 포기할 순 없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딸을 라이벌 삼아 열심히 꾸준히 읽었다.
읽다보니 딸이 대단해 보였다.
읽기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데 재밌다고 끝까지 읽고
리뷰까지 썼으니 말이다.
딸은 스카웃이 성인이 된 이야기 <파수꾼>을 읽다가 중간에 책이 사라져 읽기를 멈춘 상태다.
나도 아직까지 <안나 까레니나 3>을 찾지 못해 결말을 모르고 있는 것과 똑같다.
에궁! 우리 모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읽고나서 제자리에 꽂아 놓으면 되는데...
어제 잠깐 <파수꾼>내용을 남편이 말해줬는데 그 내용을 듣고나서 읽고 싶지 않아졌다.
<앵무새 죽이기>의 진한 여운이 사라질 것 같다.
내년쯤에 읽어보련다. 궁금하긴 하니깐.
원래 하퍼 리가 <파수꾼>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고
출판사 쪽에서는 그걸 조금 수정해서 즉 스카웃의 어린 시절을 써보자고 제안하여
<앵무새 죽이기>가 나왔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파수꾼>을 읽던 딸이 <앵무새 죽이기>에 나왔던 알렉산드라 고모가
<파수꾼>에서는 누나로 나와 헷갈린다고 하였다.
하퍼 리는 이 책만 쓰고 더 이상의 책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인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고 사랑하는 책이라고 하니
대단한 자부심이 있을 듯하다.
그녀는 지금 90세가 넘었고 심한 치매에 걸렸다고 하니
인생이 참 허무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소설 버전이라고 하고 싶다.
미국인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고 사랑한 책.
과연 그들은 왜 이 책에 열광하였을까?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뭔가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완연한 불의, 편견, 선입견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그러면서도 전혀 절망하거나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에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절망을 많이 느끼게 된다.
스카웃의 오빠 젬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옳은 게 분명한데 그게 꺾일 때 불의가 승리할 때 우린 절망하곤 한다.
하지만 핀치 변호사는 불의를 선택한 메이콤 사람들과 배심원 사람을 정죄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한 일이 부질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언젠가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사람들에게 절망해 봐서 잘 안다.
옳고 가치 있는 일인데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에 서운함과 함께 정죄를 자꾸 하려고 든다.
그런데 핀치는 자신을 "깜둥이 애인" 이라고 비난하는 옆집 할머니를 비롯한 메이콤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핀치 변호사는 한 마디로 성인군자다.
스카웃과 젬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라 고모와는 전혀 딴판이다.
매일밤 아이들에게 신문을 읽어주는 아빠
잘못을 야단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아빠
무엇보다 약자의 편에 서서 변호해 주는 아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아빠
정말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핀치 변호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절망하고 포기하는 순간, 실패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책이었다.
버티어라
살아내라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라
언젠가는 승리하리라
나처럼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일까? 궁금하신 분을 위해 한 마디.
번역가 말이 원어로는 앵무새가 아니란다.
지빠귀 종류인데 처음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올 때 그렇게 번역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앵무새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앵무새를 장난이나 놀이 삼아 죽이곤 한다.
이 당시 상횡이 이와 똑같았다는 의미이다.
흑인이 백인에게 피해나 손해를 끼치지 않았어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는 것이다.
책에 나온 톰 로빈슨처럼 말이다.
톰은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는다.
즉 앵무새는 약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단지 약자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고통 당하는 존재는 없는가
항상 살펴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