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선생님이 밴드에 좋은 소식을 하나 올려주셨다.
도봉구청에서 고은 시인이 김수영 시인에 대한 강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도 괜찮고 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독서 모임 선생님도 몇 분 오신다고 하여 강연 끝나고 번개 모임을 하자고 하였다.
방학 동안 뭐하고 지내시나 무슨 책 읽고 계시나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도봉구청은 구청장이 진보 성향이 강해서인지 실시하는 사업이 혁신적인 게 참 많다.
얼마 전에 "기적의 도서관"을 건립한 것도 그렇고
" 함석헌 기념관"을 만든 것도 그렇다.
이런 인문학 강의도 자주 하고, 모셔 오는 강사도 진보쪽이 많다. (다음 주에는 강신주 씨가 온다고 한다. )
세월호 유족을 모시고 하는 행사도 도봉구에서 진행된 걸로 알고 있다.
다른 구에서는 거절당했다고...
좋은 강연이 많은데 강연 시간대가 주로 근무 시간대라서 들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방학이라 청강할 수 있었다.
수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지는 듯하다.
강연 날짜는 폭염이 가장 절정이었던 목요일 오후 2시였다.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중랑천을 가로질러 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그렇게 많이 덥지는 않았다.
폭염인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많은 분이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머리가 희끗하신 분도 여러 명 계셨다.
시간대가 2시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들도 많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대강당을 채운 덕분에
도봉구청장도, 고은 시인도 감동 받았을 듯하다.
솔직히 김수영 시인에 대해 안 지는 얼마 안 된다.
알라딘 서재 여기저기에서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관련 서적이 나오기 시작해서 궁금하여 시집을 구매하였으나
책꽃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읽어보진 않았다.
유시민 씨가 쓴 책에도 김수영 시인이 등장해서 눈여겨 보니
말랑말랑한 시를 쓰는 분이 아니었다.
뜨거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래도 그렇지 이름 석 자만 알고 갈 순 없어서
강연에 가기 전 가장 익숙한(유시민 씨 책에 실려 있던) 시 한 편을 골라 읽어봤다.
제목도 몰라 한참을 헤맸다. 바로 이 시다.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럴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965. 11.4
(김수영 시 전집, 민음사)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 그래, 나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정작 중요하고 큰 일에는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있지. 어쩜 나랑 똑같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도 그랬던가 보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고은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시는 누구의 아류가 절대 아니라 그 자체라고 하였다.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을 모방, 표절한 것이 아니라
김수영 시 자체가 처음이라고 하였다.
김수영 시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도 가만히 읊조려 보면, 이야기가 있다.
그게 다른 시와 차별화된 점이라고 하였다.
김수영 시인이 추구한 것은 "자유"라고 하였다.
내가 배우던 국어 교과서에 김수영 시가 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마 김수영 시인의 이런 현실 직시와 자유로운 사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후배들 교과서에는 그나마 김수영 시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고은 시인과는 마치 피붙이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살아 생전에 김수영 시인이 고은 시인를 보고 " 천재" 라고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고은 시인의 시를 보고 한번에 평가하지 않고
서울로 가져왔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시인이 활동하던 그 시대는 시문학 전성 시대가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고은 시인이 김수영 시인이 지은 가장 마지막 시를 육성으로 들려줬다.
얼마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시던지 장내에 있던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시도 좋고 들려주는 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뭉클하였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5.29)
(김수영 시 전집, 민음사)
고은 시인은 늦었지만
김수영 문학관을 널리 알리고,
김수영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직시하며 지내고 싶다고 포부를 말하셨다.
김수영 시인의 부인도 오셔서 강단에 올라 인사를 하셨다.
참 미인이셨다.
고은 시인 말로는 김수영 부인이 아니었다면
본인이 문학을 하셨을 재능 있는 분이라고 하던데
본인은 김수영의 부인으로 시인의 고질병이었던 결핵성 치질 수발을 열심히 잘하셨다고 환하게 웃으셨다.
김수영 시인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났지만
그와 그의 시는 우리 곁에 늘 남아
식어버린 마음을 뜨겁게 달궈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