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밥과 관련된 시 2편를 읽어주셨다.
설교시간에 웬 시냐고?
목사님은 자주 시를 읽어주신다. 완전 멋지다.
시 덕분에 설교가 더 귀에 쏙쏙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도 오래 기억되곤한다.
이번에 들려준 두 시는 진한 울림을 주어 집에 오자마자 검색을 해봤다.
"고두밥 진밥"은 금세 찾았으나 "할머니 소원"은 찾지 못하다가 시인이름으로 검색을 하니 나왔다.
동시여서 자료찾기가 어려웠던 거다. "할머니의 소원"이 동시집에 수록되어 있을 줄이야.
시인도 목사님도 감수성이 대단하다.
이런 시를 쓰고 이런 시를 설교에 응용하다니...
시의 힘이 위대해 보인다.
100마디 말보다
시를 가만히 한 번 읊조리는 것이 더 큰 감동과 깨달음을 주니 말이다.
할머니 소원
-곽해룡-
할머니 소원은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볕 잘 드는 곳에 묻히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평생 개펄을 파먹고 사셨다는 할머니는
돌아가시면 한 줌 가루가 되어
낙지 고등 꼬막에게도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염소를 먹이기 위해 길러지는 풀처럼
사람을 먹이기 위해 길러지는
고추 마늘 콩처럼
하느님이 사람을 기르는 이유는
누구에겐가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사람이 늙는 것은
먹기 좋게 익어가는 밤 대추 감처럼
물고기가 먹기 좋게
익어가는 거라 하셨습니다.
고두밥, 진밥
-김진기-
밥을 먹다가 문득
내가 진밥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맛에 따라
진밥을 지었다.
씹힐 때 고소하게 우러나오는 고두밥의 맛과는 달리
숟가락에 질척질척 매달리며
목구멍을 은근슬쩍 넘어가는 진밥이 나는 싫었다.
숟가락으로 푹푹 , 진밥에 화풀이를 해댔다.
유별난 철부지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눅눅하지 못하고
곤두선 고두밥알처럼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거센 세월의 비바람이 나를 지나갈때마다
내 고슬고슬한 고두밥은
꼿꼿한 관절을 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눅눅한 진밥으로 돌아앉았다.
밥은 나를 만만히 본 것인지
언제나 생각대로 지어지지 않아
때론 진밥 선밥 죽밥 삼층밥 고두밥 생밥의
각기 다른 개성으로 태어난다.
진밥은 그냥 먹지만 성미 까칠한 밥은
다시 물을 부어 강한 불로 주물러서
뼈대가 흐물흐물해지면
휘휘, 저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