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역린>을 봤다. 정조 역을 맡은 현빈의 멋진 근육-난 별로 근육질을 좋아하진 않지만서도-이 처음부터 시선을 잡아 끌었다. 조선의 역사 중에서 사도세자의 죽음만큼 애절한 사연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하여 그 이야기는 늘 회자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역린>에서는 정조가 중심이 되어 정순왕후와의 대결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회상신에 삽입되어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영조가 이해가 안 됐다. 분노가 일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찌 아들을 죽일 수 있지? 그냥 혼만 내주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 더운 여름 날,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좁은 뒤주에 갇아 놓을 수 있지? 설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사도세자가 광기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해도 그래도 자식인데 어찌 그럴 수 있지? 세력을 부리던 노론과의 정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도 해도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영조가 오랜 기간 동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정을 하였다 해도 자식을 죽인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 것도 당연히 천륜을 거스리는 일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해하는 것은 그보다 더 천륜을 거스리는 일이 아니던가! 세계사에서 영조처럼 자식을 죽인 왕이 또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아무튼 부모가 되어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를 다시 보니 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을 제 몸보다 더 아끼는 게 인지상정인데 어찌하여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영조의 변을 듣고 싶다.
영화에 나왔던 장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사도세자가 죽고나서 영조가 세자의 저고리에 편지를 썼고 이걸 정조가 비밀리에 간직하고 있었다. 아마 사도세자가 허망하게 죽고나서 아비였던 영조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자식을 그렇게 죽게 놔뒀는데 마음이 안 아팠다면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다. 왕이지만 정적이 매일밤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정조는 어떤 마음으로 이 엄청난 현실을 버티었을까.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줬다. 바로 정조와 그를 평생 모신 내관이 외던 중용 23장이 답이다.
중용과는 인연이 깊다. 고1 담임 선생님을 사모하고 존경하던 적이 있다. 지금도 물론 존경심은 그대로이다. 한문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늘 한문책과 더불어 다른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셨다. 야자를 할 때도 본인은 늘 책을 읽으셨다. 책벌레셨던 것이다. 아마 내가 본 어른 중에서 가장 책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그래서 닮고 싶었던 분이셨다. 외모도 출중하셔서 손석희 앵커와 흡사했다. 그 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했던 게 바로 " 중용" 이었다. 그 때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흔들림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이라고 말이다. 그 말이 참 멋졌다. 치우지지 않고 흔들림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도 당연히 "중용"이 되었다. 한문 선생님이었던 담임은 아마 책 <중용>을 읽으신 후 좌우명으로 삼으신 게 아니었던가 싶다. 아직까지 <중용>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역린>이란 영화를 보고나서 언젠가는 꼭 완독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커다란 슬픔과 항상 자객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정조가 택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영조와 정조를 놓고 본다면 정조가 훨씬 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영조는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신이 왕으로 있을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조는 제 눈앞에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고, 늘 정적에 둘러싸여 지냈지만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화목하려고 애썼다. 노론을 싹 쓸어버리지 않은 것만 봐도 정조가 얼마나 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연산군은 자기 어미를 죽인 사람을 모조리 쓸어버지 않았던가. 나를 아프게 한 사람, 나를 욕보인 사람,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참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들을 한번에 휩쓸어버릴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걸 억누르고, 정적과 함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것만 보더라도 정조가 영조보다 훨씬 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용 23장에 나온 것을 정조는 실천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자신을 죽이려는 정적을 향해 복수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굴복시킬 줄은 몰라도 근본적으로 내면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정조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정조가 중용의 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의 죽음이 커다란 슬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노론에 대한 복수심도 물론 만들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런 마음에 갇혀 있지 않았다. 정조는 아다시피 자객의 위험 때문에 밤새 잠도 안 자고 책을 읽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많은 책이 정조에게 "복수하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라. " 말하지는 않았을 성 싶다. <중용>처럼 정조에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을 것이다. 좋은 책은 그렇게 정조의 슬픈 마음과 복수심을 다독여 줬을 거라 생각한다. 정조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해 줬을 거라 생각된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이 커다란 상처가 된 건 사실이나 그로 인해 정조가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이 정조를 더 단단하게 만든 셈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 시키고
남을 감동 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역린> 중에서 중용 23장
영화 <역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배우 현빈의 등근육과 식스팩이 아니라 중용23장이었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는 그 말, 남을 감동시킬 때 결국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 말을 2015년 새해의 다짐으로 삼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