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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함박눈이 펑펑 내립니다. 언젠가부터 눈이 내리면 기쁘기보다 걱정이 앞서곤 하는데 오늘만큼은 눈을 즐기고 싶습니다. 눈 내릴 때 읽으면 제격인 책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막다른 골목의 추억>이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집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의 책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표지 디자인이 이쁩니다. 표지만 이쁜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도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지난 토요일, 시험 보는 딸을 기다리면서 중학교 강당에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어느 막다른 골목, 그 곳에 가면 바래져 버린 추억이 하나둘씩 되살아 날 듯합니다. 모두 5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이야기가 가장 재밌고 진하게 여운이 남아 소개해 봅니다.
첫째 번 이야기는 연인도 아닌 우정도 아닌 어정쩡한 동네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어울리지 않게 <유령의 집>입니다. 남자는 롤 케이크 가게 아들이고, 여자는 돈가스 가게 딸입니다. 동네에서 꽤 유명한 가게들이죠. 사명감을 가지고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일본은 여자처럼 가업을 잇는 경우가 참 많은 듯합니다. 바람직한 현상이죠. 남자는 가업을 이을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유복한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본가에서 나와 금방이라도 스러질듯한 집에서 사는 남자는 가끔 전주인이었던 노부부가 보인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호러가 된 듯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남자 눈에만 보이는 노부부 유령은 여자네가 하는 돈가스 가게에 자주 왔던 단골이었습니다. 돈가스 집 딸 어머니 기억으로 노부부는 규칙적으로 돈가스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하였더랍니다. 노부부가 항상 같이 와서 항상 같은 메뉴를 먹는다 상상해 보세요. 아름답지 않나요? 젊은 남녀가 손 잡고 다니는 것도 아름답지만 노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듯 손잡고 다니는 모습 보면 자연스레 '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닮고 싶은 모습이지요.
미지근한 두 남녀가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여자의 눈에도 노부부가 일상 생활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영화<건축학 개론>이 겹쳐지더군요. 사랑한다 말도 못한 채 서로의 마음을 접어버린 두 남녀의 이야기가 참 안타까웠죠. 그 영화 보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 아들아, 넌 저 아저씨처럼 사랑한다 말도 못하고 그냥 스스로 마음을 접으면 안 돼. 고백이라도 해봐야지. 알았지?" 라고 말이죠. 이 남녀도 답답하기가 그 둘 못지 않습니다. 독자가 보기엔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서로 붙잡지도 기다리라 말하지도 않고 헤어집니다. 참 대책 없는 남녀죠. 아니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정말 컸거나. 인문적 통찰로 따지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남녀일 수도 있구요. 이 남녀는 어떻게 될까요? 이대로 영영 헤어지게 될까요? 아님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까요? 고백도 못하고 스스로 접어버린 짝사랑 경험이 있으신 분은 이 이야기 읽으면서 공감이 팍팍 될 겁니다.
눈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가슴 한 켠에 묻어 둔 첫사랑이 그립지 않나요? 아니면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자신의 소설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읽다보면 여러분도 막다른 골목에서 그 때는 많이 아팠지만 돌이켜 보면 소중했던 추억과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금주는 내내 강추위가 이어진다고 하네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다른 책도 읽으면서 마음이라도 따듯하게 데워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