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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ㅣ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4년 6월
평점 :
우연히 학교 도서실에서 이 그림책을 발견하였다. 나온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일상에 묻혀 살다보니 까많게 잊고 있었다. 도서실 당직을 서다 무심코 잡아든 이 책이 바로 그 그림책일 줄이야.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읽었다. 읽는 도중 마음이 울컥하였다. 이 그림책은 실화이며 이산 가족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역시 서진선 작가는 전작 <오늘은 5월 18일>에 이어 점점 잊혀지려 하지만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되는 묵직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주는 분이다. 즐겁고 경쾌하며 밝은 이야기도 좋지만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서작가처럼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이가 있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 "서진선" 이라는 세글자를 꼭 기억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이산 가족이다. 자라는 내내 아버지는 밥상에서 식기도를 할 때마다 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였다. 아버지의 기도가 늘 똑같아서 제발 그 기도는 그만 했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던 적도 있었다. 기도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하는 반항심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지만서도. 어제 아버지는 90세 생신을 맞이하셨다. 청년일 때 고향을 떠나온 아버지는 이제 초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예전보다 기도를 잘 못하시지만 아직도 식기도를 하실 때 더듬더듬 통일이 되어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하신다. 총명함이 많이 가셨는데도 그 기도는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 무의식 속에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 남아있나보다. 아버지 살아 생전에 통일이 이뤄질까. 가족을 만나볼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의 화자와 아버지 또한 이산가족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화자의 가족은 쏟아지는 비행기 폭격에 토굴에도 숨어보지만 남으로 피난을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에 먼 길을 나섰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향을 지키시겠다며 우리를 배웅하셨다. 아버지는 부모님만 놔두고 갈 수 없다며 어머니와 우리 먼저 피난을 떠나라며 발길을 돌리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화자, 동생들은 추운 겨울, 피난길에 오른다. 짐 속에 아버지의 옷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추운 겨울 두툼한 옷도 없이 지낼 아버지 생각에 화자는 다시 집에 갔다 온다며 떠났다. 그러다 병원 버스를 탄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병원 버스를 타고 길을 가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차에 태울 수 없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와 화자만 부산 영도 다리 아래까지 피난을 왔다. 아버지는 그 곳에서 천막 병원을 열어 환자를 치료하셨다. 화자는 피난민을 위해 임시로 지어진 천막 학교에서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봉선화"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니 어머니가 더 그립다. 이 장면에서 저자는 화자의 이름을 살며시 보여준다. 화자의 이름은 장가용. 그렇담 아버지는 장기려 박사? 그렇다. 이 그림책은 장기려 박사와 그의 둘째 아들 장가용 교수의 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을 만나기 전, 나도 장기려 박사의 슬프고 애잔한 가족사 이야기를 듣고 같은 이산가족으로서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장기려 박사와 북에 있는 부인이 주고 받은 편지를 읽고 울컥해지기도 했다. 장기려 박사와 북한에 남겨진 부인과 가족들,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고, 서로를 위해 평생 기도한 그 부부와 그 가족의 마음이 너무 절실하게 다가왔다. 저자도 그랬단다. 장기려 박사의 가족사를 듣고 아버지를 따라 피난내려왔던 둘째 아들 장가용 교수에게 마음이 쏠렸다고 한다. 아버지와 단둘이 피난와서, 엄마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헤어져 지내야 했던 가용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하던 중, 북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소포 하나가 온다. 육성으로 녹음한 봉선화 노래 테이프, 고향집 봉선화 씨앗, 가족 사진이었다. 그걸 받은 날, 가용이는 엄마 사진을 끌어안고 울고, 아버지 장기려 박사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꺼이꺼이 우는 장면은 정말 슬펐다. 다음 날, 아버지와 가용이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사진이었다. 가용이의 가족은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이산 가족 상봉이 추친되고나서 모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방문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이에 박사는 이산 가족이 모두 다 만나고 난 후 가족을 만나겠다며 특별 대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장기려 박사는 그리워하던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고, 둘째 아들 장가용 박사가 북에 있는 가족들과 상봉을 하였다고 한다. 자료를 살펴보니 장가용 교수도 벌써 고인이 되셨다. 이건 비단 장가용 교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모든 이산 가족의 슬픔이다. 슬픔이 끝났다고? 아니다. 슬픔은 계속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