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휴전 Dear 그림책
존 패트릭 루이스 지음, 서애경 옮김, 게리 켈리 그림 / 사계절 / 2012년 12월
절판



존 패트릭 루이스는 <그 집 이야기>를 통해 처음 만났고
또한 그 책이 전해 준 진한 감동으로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버린 작가다.
지난 크리스마스 즈음에 그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크리스마스 휴전>이 바로 그 책이다.

이번엔 또 어떤 감동을 줄까 잔뜩 기대하며 첫 장을 넘겼다.

그림책의 시간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서부 전선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영국군이 힘들고 지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와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도 생각난다. 그건 독일인의 시점으로 바라 본 것으로 원하지도 않는 전쟁에 끌려나와서 헛되이 목숨을 잃는 독일 청년 병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지금도 유명한 반전소설로, 레마르크는 이 소설로 인해 독일나치에 의해 자신의 소설이 모조리 불태워지는 등 핍박을 받아 망명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크리스마스 휴전>은 영국인의 시점에서 이야기 한다.
젊은 영국 청년 오웬은 신병 모집 포스터를 보고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림작가 게리 켈리에 따르면,여기 보이는 이 포스터는 그 당시 영국에서 모병을 하기 위해 실제 붙였던 포스터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오웬처럼 많은 영국의 젊은이들이 이 포스터를 보고 전쟁터로 갔을 것이다. 아마 그 때에는 자신 앞에 얼마나 참혹하고 비통한 전장이 펼쳐질 지 상상도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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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서부전선으로 배치를 받는다.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그 전선에서 전쟁이 끔찍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벌레처러 몸을 말고 있어야 할만큼 작은데다 질척거리기만 하는 진흙 참호와 무인지대에서 풍겨오는 썩은 시체 냄새 그리고 언제 총알이 내 심장을 관통할지 모르는 그 두려움 속에서 오웬은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 지 하는 한 가닥의 희망으로 어두운 현실을 버텨낸다.

그러나...



이 그림책의 가장 뛰어난 점은 충실한 고증을 바탕으로 당시의 전쟁 상황을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가장 마지막의 그림은 두 다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는 좁은 참호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오웬의 모습이다. 그런데 참호에서 죽는 병사들은 저 자세 그대로 죽는다. 죽어서까지 두 다리를 마음껏 펼 수 없다는 현실에서 얼마나 전쟁이 비참한 것인지 정말 새록새록 느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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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점점 가까워져 갈수록, 그 희망은 사그라져 가기만 할 뿐이다.
결국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결국 오웬은 고향이 아니라 참호 속에서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게 된다.
그 마음이 얼마나 심란했을지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조용한 밤을 비집고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귀 기울여 보니 고향에서 크리스마스만 되면 늘 듣곤하는 <고요한 밤>이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만 되면 모처럼 맞이하는 풍성한 식탁을 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부르곤 했던 그 노래...

그 노래가 전선의 저 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독일군의 목소리로....

몸은 비록 고향에 가지 못하나 그 노래로 인해 마음만은 고향에 갈 수 있었던 오웬은 독일군의 노래가 끝나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번엔 <저 들 밖에 한밤중에>라는 노래를...



왼쪽의 그림이 <고요한 밤 >을 부르고 있는 독일군의 모습이고 오른쪽의 그림이 <저 들 밖에 한밤중에>를 부르고 있는 오웬의 모습이다. 벌린 입 밖으로 나오는 입김까지 묘사되어 참으로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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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 지 모르는 전장에서
이번에는 서로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오고갔다.

날아든 총알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 뿐이었지만 들려온 노래는 서로의 마음에
'모두 다 같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에 가고 싶어할 뿐인 사람'이란 생각을 심어주었다.

이윽고 독일 진영에서 깃발 하나가 올라와 펄럭인다.
"총을 쏘지 말라"는 그 깃발과 함께 독일군이 뚜벅뚜벅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온다.
무방비로 걸어오는 그들에게 영국군 역시도 발포를 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마음엔 이 순간만큼은 적이라는 개념이 모두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아닌, 모두 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만나 그들은 악수를 하고 얼싸 안거나 우정의 표시로 군복의 단추를 교환한다.
그 시간 지구 위에서 가장 어둡고 참혹했던 곳에서 가장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휴전은 짧게 끝났다.
바로 다음 날부터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무인지대 너머에 있는 독일 진영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에 보이는 독일 진영은 더 이상 쏘아 죽여야 할 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다만 그토록 그리워하는 고향의 모습 뿐....



오웬의 눈 앞에 펼쳐지는 상상된 고향의 모습


게리 켈리는 그 그림의 구도를 이렇게 신병 모집 포스터를 볼 때의 그림과 똑같이 함으로써 오웬의 마음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오웬이 군인이 되어 처음 총을 차고 있는 모습과 크리스마스 휴전이 끝나고 독일 진영을 바라보는 오웬의 모습 역시 똑같은 구도를 취함으로써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인해 얼마나 오웬이 달라져버렸는지 느끼게 한다. 일단 오웬은 더 이상 총을 잡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군을 보다 가깝게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잡는다. 하지만 그 눈에서 우리는 이제 그 망원경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총을 든 오웬의 눈은 비정해 보이지만 망원경을 든 오웬의 눈은 그리움이 짙게 배인 눈이다. 같이 크리스마스 휴전을 나누었던 독일군을 향한 인간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망원경에 비친 독일군의 모습은 더 이상 적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웬 손의 저 망원경을 보다 가까이서 그들의 얼굴을, 모습을 느끼고 싶다는, 적이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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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정하고 참혹했던 전장에 있었지만 오웬의 마음은 이제 지옥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늘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을 보았다.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한 전쟁 기계에 불과했던 오웬은 이제 적이라 할망정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여 우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건 치열한 전쟁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결국 존 패트릭 루이스와 게리 켈리는 어떻게 이 기적이 가능하게 되었나를 보여주기 위해 이 그림책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때의 서부전선만큼이나 나와 너를 나누고 서로 간의 적대가 커지고 있는 지금에 있어 우리가 정말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답은 간단하다. 그건 크리스마스 휴전 당시의 영국군과 독일군이 그러했듯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또 그가 어떤 나라 출신인지 따위는 과감히 던져 버리고 오로지 나와 같은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같은 노래로 지난 날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평화는 <크리스마스 휴전>이 보여주듯이 꿈이 아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기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실화라는 것이 더욱 확실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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