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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ㅣ 푸른도서관 50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이금이 작가의 신작을 만났다. 사막에서 볼 수 있다는 그 <신기루>가 이번 신작의 제목이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소녀가 머리를 휘날리는 채로 약간 슬픈 표정으로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 뭔가가 바로 신기루가 아니였을까!
이 소설은 15세 소녀인 다인이와 45세인 다인의 엄마 숙희씨를 각각 화자로 하여 다인이와 엄마, 엄마 친구들이 함께 갔던 사막 여행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작가의 원래 구상대로 다인이 이야기만 있었다면 좀 허전했을 듯하다. 2부에 엄마의 이야기가 추가되어서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이유는 1부에서는 나의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서 다인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어 좋았고, 2부에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인 숙희씨 이야기를 통해 현재 나의 어머니, 나의 자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결국 딸이었던 시절, 엄마인 시절을 모두 공감할 수 있어서 시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부 다인이의 이야기는 10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정말 톡톡 튄다. 이금이 작가의 화려한 말솜씨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하였다. 이금이 작가는 10대 소녀가 가질 수 있는 감성을 정말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읽으면서 나도 나의 10대 시절로 되돌아가서 공감이 팍팍 됐다. 다인이가 꽃미남 가이드 바뜨르에게 느끼는 풋풋한 호감 또한 이해가 간다. 그래서 엄마를 비롯한 다른 엄마 친구들도 40대 주부가 아닌 다인이와 같은 똑같은 10대로 돌아가 무조건 여자이고 싶고, 꽃미남인 바뜨르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였을까 싶다. 아줌마들이 웬 주책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줌마들의 행동이 귀엽기까지 하다. 그녀들도 그 순간만큼은 다인이와 같은 15세 소녀 마인드였던 것이지.
개인적으로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재작년과 작년 딸과 둘이서만 일본과 중국 여행을 갔던 경험이 있던 터라 다인이가 엄마와 함께 여행간 그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는 다른 일행들과 섞여서 여행을 다녔고 바뜨르처럼 잘 생긴 가이드가 아니여서 이런 설레임과 갈등,질투,적대감, 실망 등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모녀가 함께 여행간다는 그 설정만으로도 이 책이 너무 반가웠다.
여행이란 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다인이도, 아줌마들도 만약 바뜨르를 한국에서 만났다면 이처럼 무작정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게 바로 여행지에서 만났기에 그렇게 앞뒤 따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떤 면에서 그래서 더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다인이가 바뜨르에게 가지는 호감과 아줌마들에게 가지는 적대감과 질투 등이 이금이 작가의 화려한 글솜씨로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읽는 내내 내가 다인이가 된 것처럼 설레고, 속상했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는 사이 내 차례가 됐다. 나는 내숭이 아니라 손을 내밀기가 진짜 쑥스러웠다. 바뜨르 역시 아줌마들 손은 나뭇가지인 양 스스럼없이 잡더니 내게는 선뜻 내밀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우리의 손이 서로의 마음인양 수줍게 다가가는 순간 엄마가 갑자기 ' 빨리 안 건너오고 뭐해?' 하면서 내 손을 덥석 잡고는 확 잡아당겼다. 수십 가지의 버전에는 결코 없었던, 고꾸라질 뻔한 추한 모습으로 개울을 건넌 나는 엄마를 물속에 밀어 넣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부분 읽는데 정말 웃겨서 읽다가 푸하하 웃었다. 완전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져보거나 몰래 짝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상황이 잘 이해될 것이다. 진짜 오만 가지 버전으로 상상을 했는데 엉뚱하게 일이 종료된 상황. 다인이의 그 절망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야기의 절정은 미남 가이드 바뜨르와 헤어지고 나서 사막 한가운데서 신기루를 보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흑흑 울음이 터져 나오는 부분이다. 아줌마들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왕대접을 받는 오빠와는 달리 엄마에게 매일 푸대접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울지 않던 다인이도 왜 신기루를 보면서 울었을까?
신기루를 보고 모두들 한바탕 울던 그 사건을 기점으로 화자는 다인이로부터 엄마 숙희로 전환된다. 이제 숙희씨의 이야기이다. 올해 45세인 숙희씨는 여행 오기 직전 자궁암 초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기 전에 딸과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결심한다. 한 때는 문학 소녀였지만 자신처럼 자궁암 선고를 받고 스스로 농약을 먹고 목숨을 끊어버린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지닌 채 살아왔던 그녀이다. 숙희씨의 이야기는 자신이 왜 신기루를 보고 울었는지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자신이 왜 신기루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는지 알고 있지만 그걸 애써 부인하고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마주 하기 싫은 그 진실을 정직하게 마주 할 때라야만 묵은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숙희씨 이야기는 보여주고 있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엄마를 미워하면서 사랑했다.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엄마라면 자식들이 다 클 때까지 어떻게든 살았어야 했다. 너무 늦은 발견으로 암 선고와 시한부 선고를 동시에 받았다고 해도 끝까지 싸웠어야 했다. 치료비와 남은 가족들의 고생을 핑계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18세 때 엄마의 자살로 인한 상처가 현재 45세인 그녀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그녀가 신기루로 인해, 아니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의 묶은 상처를 스스로 마주 할 용기가 생겨났다.
내가 그날, 모래 언덕에 앉아 울었던 건 신기루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신기루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을 본 순간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실은 신기루처럼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날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토록 시인하고 싶지 않던 그 진실을 고백하게 된다. 숙희 씨의 친구들 또한 그래서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신기루, 자연이 만들어 준 그 기이한 현상이 이렇게 대단한가 보다. 고비 사막을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저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하게 하여 그녀들로 하여금 목 놓아 울게 만들고, 그리하여 저 밑에 꽁꽁 숨겨 놓았던 자신만이 알고 싶었던 비밀이나 상처마저도 객관적으로 보게 하여 결국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 놀라운 힘을 신기루는 가지고 있나 보다. 그렇담 나도 꼭 신기루를 보고 싶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있는 그 어떤 것까지도 끄집어 내어 한바탕 울게 된다면 예전보다 한껏 정화된 나를 만나게 될 것만 같다.
다인과 엄마의 대화 중에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당연히 '바뜨르'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다인이가 <신기루>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모래 언덕에서 처음 봤을 때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기만 했고, 길 잃어버렸을 때 신기루를 두 번 봤잖아. 그때마다 진짜 호순 줄 알고 좋아했다가 아니라서 엄청 실망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속임수 같아서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진짜 호수를 만나고 길도 찾고 나니까 만약에 그때까지 신기루를 한 번도 못 봤으면 어떻게 불안하고 무서운 걸 참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다인이의 말 속에 신기루가 가지는 의미가 잘 내포된 것 같다. 신기루. '속임수' 같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하는 우리에게 한 조각의 '희망'이기도 하다는 게 말이다. 다인이도, 숙희씨도 이번 고비 사막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치유받고 오는 것 같다. 기대되는 건 다시 자신들의 일상적인 자리로 돌아갔을 때 예전과는 다를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장 좋은 교육이 바로 독서와 여행이라고 말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