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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을 전하는 아이 ㅣ 푸른숲 역사 동화 1
한윤섭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10월
평점 :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가슴 아픈 역사가 꽤 많지만 동학 농민 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비극의 역사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이 성공하였다면 우리 나라의 복지 국가로의 행보가 한층 빨리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던진 중고등학생들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던지게 하는 나라가 과연 올바른 나라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친구들의 집단 따돌림, 성적 비관, 같은 반 남학생의 상습적인 성추행 등등으로 자신의 꿈을 향하여 한창 비상해 나가야 아이들이 스스로 날개를 꺾어버리는 이 나라. 그리하여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우리 나라 학생들의 행복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서찰을 전하는 아이가 비로소 " 행복" 이라는 낱말이 자신에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 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입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라는 독백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싶다.1%의 사람들을 위해 나머지 99%는 들러리 서다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희망이 없는 나라. 99%사람들의 입에서 "행복"아런 단어가 나올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복지국가 아닐런지...
200여 년 전 동학도들은 생존권이 위협받아 더 이상 그대로 있다간 죽음 밖에 기다리는 게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 신분으로 차별 받지 않은 세상, 밥 걱정 하지 않은 세상. 그들은 그런 평등하고, 인간 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정점에 서 있는 녹두 장군 전봉준의 입장에서 써내려 간 게 아니라 보부상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열 세 살 적 기억을 되살리며 들려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자신이 열 세 살의 기억을 그리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지 말이다.
작가는 역사 동화를 쓸 때 "동학 농민 운동 " 만큼은 피해 가고 싶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런 가슴 아프고, 분하고, 억울한 일을 제 정신 가지고 써내려갈 수 있을까? 나라도 못하겠다. 가슴 아픈 역사이기에 오히려 이렇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동학 농민 운동을 바라 보며 이야기를 풀어 간 게 훨씬 담백하면서도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그게 바로 작가의 상상력이 아닐까! 한때는 동학도였던 김경천이란 인물이 관군에게 전봉준을 밀고하였다는 역사적 기록 하나만을 가지고 이렇게 멋진 역사 동화를 썼다니 작가의 상상력에 무한 박수를 보낸다. 전작 <봉주르, 뚜르>도 작품성이 훌륭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초정리 편지>에 버금 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부상의 아들인 나는 어느 날 아버지가 스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서찰을 전라도에 전해줘야 한다고 하여 함께 전라도로 향한다. 아버지는 이 서찰이야말로 " 한 사람을 구하고, 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라고만 말한다. 아버지는 그 날 밤 주막에서 객사를 하고 소년은 천애의 고아가 된다. 아버지의 유품을 팔고 남은 돈은 모두 열두 냥, 소년은 고민 끝에 전라도로 향하게 된다. 서찰에는 한자10개가 적혀 있는데 사람들은 까막눈이 소년에게 한자를 읽어 주는 댓가로 소년에게 댓가를 치르라고 한다. 그냥 읽어 주면 안 되남? 책 장수도, 양반도, 도련님도.... 모두 그 댓가를 치러야 그 글자의 귀함을 오래 간직한다고 합리화를 시킨다. 처음엔 '참 사람들 야박하기도 하지? 몇 글 자 읽어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랬는데 후반부에 가면 소년 또한 이런 셈을 통하여 이득을 얻는 장면에서 작가의 치밀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알게 된 한자가 바로 " 오호피노리경천매녹두" 였다. 즉 "슬프도다 피노리에 사는 경천이 녹두 장군을 팔려고 한다" 는 뜻이다.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녹두 장군을 부하인 경천이라는 자가 관군에 팔아 넘긴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긴 서찰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그 서찰을 녹두장군에게 전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서찰을 전하라고 한 적이 없었지만 그 위험하면서 중요한 일을 스스로 담당하면서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자기가 해야 알 일을 알고 마땅히 그 일을 할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 행복은 또 한 번 사공을 만나는 장면에서 나온다. 다리가 곪아가도록 평생 노를 저었던 사공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데 소년을 위해 배를 띄워 강을 건네주면서 자신 또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인간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를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마지막 녹두 장군이 체포되어 압송되면서 아이가 꺼이꺼이 울면서 "왜 피노리에 가셨어요?" 라고 묻자 " 내가 우리 편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큰 일을 하겠느냐?" 라는 답하는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 서찰을 전하는 아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강에 배를 띄우는 사공, 죽을 지도 모르는데 피노리에 가는 전봉준. 어떤 이들이 보면 바보 같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해야 인간으로서 행복하도 말할 수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니깐. 인간은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할 수 있으니깐.
녹두 장군의 마지막 대사를 보면서 실패도 또 다른 교훈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역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도의 독백처럼 백성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겠지만 일어서고 또 일어설 것이라는 걸, 그걸 동학 농민 운동은 보여 준다.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인간처럼 살아보겠다는- 백성의 마음에 남아 백성은 다시 일어서고, 실패하더라도, 또 다시 일어설 것이다. 백성 하나하나는 서찰을 전하는 아이처럼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해야 행복하기 때문에 마땅히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일어설 것이다. 왜? 스스로 인간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