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 할매와 나
윤구병 지음, 이담 그림 / 휴먼어린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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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빠져 있는 이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다. 이담 님의 그림책을 다 모을 것 같다. 이담 님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데 그게 우울함이 아니라 숙연함이다. 그림을 자꾸 보면 사색을 하게 만든다. 이담 님의 그림이 다른 유화들과 조금 다르다는 느낌만 갖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야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왁스 페인트를 불에 녹여 종이에 바르고 철필로 긁어 내기를 거듭하여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20여년 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데 방법을 바꿔 볼까 하던 차에 이 작품 <당산 할매와 나>를 통하여 아직도 왁스와 더불어 갈 길이 무궁무진함을 알게 되셨다고 한다. 당분간 이담님의 왁스를 녹여 철필로 긁어 내는 방식의 그림을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른 작품보다 철필로 긁어 낸 흔적이 훨씬 잘 보인다.

변산공동체학교를 운영하신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적 글과 이담님의 중후한 그림이 잘 어우러진 정말 훌륭한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런 나무를 마주하게 되면 그 나무가 주는 정기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출 것 같다. 그렇게 그도 이 나무에 이끌려 변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이 나무를 당산 할매라 부르고 당산 할매를 볼 수 있는 곳에 지낼 곳을 마련한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좌우 대칭으로 비슷하다.

마지막 장면이다. 첫 장면이 당산할매를 만난 장면이고, 마지막 장면은 당산할매를 떠나는 장면이다.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도 같다.

이담 님은 특히 초록색을 너무 잘 만드시는 것 같다. <모르는 게 더 많아>에서도 초록색이 가장 끌렸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초록색에서 숨이 턱 하니 멎는다.

그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당산 할매의 나이를 물어 보지만 그 어르신들이 이렇게 어린이였을 때조차도 그 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는 것을 보아 정말 오랜 시간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보다. 어르신들이 <당산 나무>는 아니라 하였지만 그는 <당산 할매>로 믿었다.

그렇게 당산 할매가 있는 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 학교 어린이들이 당산 할매 곁에서 고기도 잡고, 나물도 캐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당산 할매에게 오면 비를 다 피할 수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당산 할매의 나이지만 뻗어가는 뿌리를 보면서 그 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당산 할매와 흙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당산 할매에게는 젖꼭지도 있다. 나무에게 젖꼭지라니? 오래 되어 속이 텅 빈 나무는 자기 스스로 아픈 데를 감싸느라 이런 젖꼭지가 생겨난 것이란다.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스스로 자신의 아픈 상처를 감싸 안는 당산 할매의 끈질긴 생명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변산공동체를 찾아 온 손님들이 있으면 으례히 당산 할매를 찾아가 이렇게 절 세 번을 올리게 하였단다. 옆에 보이는 할아버지가 바로 윤구병 선생님일 테이지.
마을 입구에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였던 당산 나무. 나도 언젠가 가족들과 나들이를 갔다가 우연히 지나치던 마을에서 이와 비슷한 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진 풍파를 견뎌낸 듯한 그 나무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정겨움 같은 느낌에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던 느낌이 들었었다.
당산 할매를 처음 봤을 때 윤구병 선생님 마음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내 마음은 더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싶어 했다.
더는 내려갈 곳 없는 맨 밑바닥에 몸을 눕히고 싶어 했다.
아래로, 아래로, 물이 흐르면서 맑아지듯이
당산 할매 뿌리가 가늘어지면서 드디어 흙과 하나 되듯이.>
내 나이 일흔이 되면 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윤구병 선생님도, 이담 작가님도 멋진 분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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