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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ㅣ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9
패트리샤 맥코믹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아무렇게나 칠해진 벽에 난 자그마한 창문 사이로 슬픈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 보고 있는 소녀가 바로 라크슈미이다. 라크슈미라는 이름은 온 세상을 돌며 가난하고 순수한 사람들에게 부와 축복을 내리는 라크슈미 여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마 부모는 라크슈미 여신처럼 이 아이가 부와 축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제비 꼬리 모양의 산꼭대기에서 사는 네팔 소녀 라크슈미는 가난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며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다. 소녀의 희망은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양철 지붕을 가지는 것과 온 식구가 굶지 않는 것 그리고 크리슈나와 결혼하는 것 정도이다. 이런 소박한 꿈을 지닌 열 세살의 소녀를 무참히 짓밟은 사람들이 있다.
첫째 부모이다.먼저 새아버지는 노름꾼에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며 거저 먹고 살고 있으며 착하디 착한 라크슈미를 1000루피에 가정부로 팔아 먹은 그야말고 파렴치한이다. 그 다음은 네팔 사회 제도에 너무 순응한 나머지 자신의 딸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면서 <그저 여자니까 견뎌야 돼. 그게 이기는 거야> 말하는 너무나 무책임한 아마(엄마)이다. 새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친어머니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딸을 넘길 수 있을까 싶다. 착하다는 것과 무지하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아마가 보여준다. 아마는 착하다. 하지만 무지하기 때문에 라크슈미를 그런 고통에 빠뜨리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마가 여자이기에 운명이다 생각하며 걸어왔던 길을 자신의 딸도 당연히 걸어가야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마가 좀 더 진취적이고 좀 더 지혜로왔다면 새아버지를 보며 < 그래도 남자가 집안에 있어야 돼> 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팔의 사회 제도가 어떻든지 간에 아마가 좀 더 지혜로운 어머니였다면 라크슈미의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 라크슈미를 짓밟는 사람은 바로 라크슈미가 잡혀 있는 인도의 홍등가를 찾아 오는 모든 남자들이다. 더러운 남자들, 늙은 남자들, 거친 남자들, 뚱뚱한 남자들, 술 취한 남자들, 아픈 남자들 그 모든 남자들이 라크슈미를 짓밟는다. 매춘의 역사는 거의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거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의 최초의 직업 또한 창녀라고 하니 이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어렵다. 단. 창녀를 찾는 남자가 끊이지 않고 있기에 인간의 역사 이래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이 부분에서 왜 하나님은 남자의 성욕을 강하게 하셔서 이토록 고통 받는 여자가 생기게 만드신 걸까 묻고 싶어진다. 요즘 우리 나라를 들썩이는 끔찍한 성폭행 사건 모두 어린 여자 아이를 상대로 한 성폭행 사건임을 보면 정말 분노하게 된다.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했다는 사건은 듣도 보도 못했다. 물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건 아니나 끊임없이 성욕을 발산하는 뭇 남자들 때문에 이런 어두운 현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통탄할 뿐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로만 만족하는 사회라면 이런 끔찍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셋째는 바로 뭄타즈라는 포주이다. 이 아줌마야 말로 절대악이라는 생각을 한다. 본인도 여자이면서 홍등가를 찾은 남자들에게 이제 갓 12세, 13세인 소녀들을 넘겨 주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정말 괴물이다. 이 여자의 괴상한 계산법-고리대금업도 아니고-에 라크슈미는 마지막 가졌던 희망마저 꺾이어 스스로 남자들을 유혹하며 무슨 짓을 해서든 돈을 모아서 이 곳을 나가기로 마음먹지만 뭄파즈의 부하인 쉴파에게서 들은 네팔에 있는 식구들에게 단 한 푼도 돈이 가지 않았다는 것과 뭄파즈에게 진 빚을 평생 갚을 수 없다는 것을 듣고 절망한다. 결국 라크슈미가 홍등가에서 당한 모든 일들은 아무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프다. 정말 한 가닥의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렸을 때의 라크슈미의 절망이 그대로 전해진다.
넷째 뭄타즈를 묵인해주는 경찰이다. 예전에 보았던 <투 캅스>에 나오는 비리 경찰을 보는 듯하다. 뭄타즈가 있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비리 경찰들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고 라크슈미 같은 소녀들이 홍등가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또한 비리 경찰들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법이 만들어진 이래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세상이 되었으련만 이래 저래 법을 피해 가는 사람들과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 보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나라도 법을 지키는 사람은 어느새 바보 취급하고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능력자, 권력자가 되어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절망 끝에 있던 라크슈미를 도와준 사람들도 있다. 홍등가에 같이 있었던 샤한나 , 차 파는 소년, 데이비드 베컴 소년 등 이들이 있었기에 라크슈미가 그 힘든 일들을 겪고도 자신의 목숨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 중학교 영어 시간에 처음 배우는 문장 <내 이름은 라크슈미입니다.> < 나는 네팔에서 왔습니다. > <나는 열네 살입니다. >이 이렇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이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한 줄기 희망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네의 일기>와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안네의 일기는 이 책이 일기 형식으로 씌어져 있으면서 안네처럼 일정한 공간에 갇히어 지내는 것과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이 흡사해서였고- 하지만 안네보다 라크슈미가 겪은 일이 더 비참하다고 생각된다. 안네에게는 함께 하는 가족이 있었지만 라크슈미는 그 끔찍한 일을 혼자 겪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는 라크슈미가 겪은 일들이 바로 타의에 의해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처참히 짓밟히는 거라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책을 읽을 때 언제쯤 라크슈미가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올까 전전긍긍하며 숨가쁘게 읽었다. 그런데 갈수록 비참해져서 읽는 내내 분노하였다. 라크슈미를 짓밟은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이런 일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내 무지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아마처럼 무지하면 안되는데 그리고 잊어서도 안되는데.... 자꾸 남들의 아픔과 고통을 잊어버려서 미안하다.
매년 50만 명 가량의 어린이들이 성 노예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끌려갔던 것처럼 똑같은 현실이 되풀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몇 년 전 사창가를 없애는 등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였지만 암암리에 매춘 행위가 행해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과연 인간의 역사가 끝나는 날 종영되는 것일까? 적어도 마음껏 뛰어 놀고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나이의 어린 아이에게만큼은 이런 일들이 일어 나지 않도록 사회 제도를 마련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