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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이를 씻겨 유치원에 보낸다. 그리고 집안일을 마치고 허용된 잠시의 시간. 그리고 나머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긴 시간. 아이만 재우고 깨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의지는 까무룩 들어버린 잠을 번번이 이기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의 '결혼한 엄마 여자'의 일상이다. 그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고 여긴 적이 많다. 그럴 때마다 생각의 기차를 탄다. 늘 마시던 머그컵이 아닌 손님용 잔을 꺼내 일상을 낯설게 느끼도록 해 보기도 한다. '친애하는 나의 삶'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다. 그게 성에 차지 않아 문득 진짜 기차를 타고 싶다고 여겼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만나서는 안될 하지만 너무나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혹은 무작정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보기 위해서, 아니면 기차 안에서의 어떤 화학 작용을 기대하며 기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탈에 대한 욕망이 해소된 적 없기에 늘 꿈꾸게 된다.
앨리스 먼로의 이번 소설집 [디어 라이프]에는 <기차>라는 제목의 단편 외에도 <일본에 가 닿기를>, <아문센>에 기차가 묵직한 존재감으로 등장한다. 가치관이 너무나 다른 남편 피터와 사는 '결혼한 엄마 여자'인 그레타에게 기차는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경로이고 (<일본에 가 닿기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고 싶어 기차를 탔지만 결국 비비언에게 기차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한 상실감을 고스란히 실은 공간이며(<아문센>), 벨에게 기차는 아버지의 죽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원적 죄의식이기도 하고, 잭슨에게는 현실을 대신할 다른 곳으로 안내할 도구(<기차>)이다. 비록 생각의 기차일지언정 내게도 기차는 이들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을 잃었을 때 탔던 경춘선 열차, 문득 외롭다 느낄 때 위로해줄 누군가를 기대하게 하는 부산행 열차,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꿈에나 그려본 오리엔트 특급 열차 등 내가 품고 있는 기차에 대한 생각은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실에서건 소설에서건 기차는 때때로 사고처럼 내 삶에 끼여들어 나를 나도 모를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또는 어딘가에 존재할 나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모양이다.
앨리스 먼로의 최신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디어 라이프]에 수록된 많은 소설들은 기차에 대한 공감 외에도 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 점이 인상적이다. 비단 내가 자라온 곳들이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타운 규모의 지역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앨리스 먼로가 타운이라는 작은 공간적 배경에서 인물들의 일상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러나 섬세하게 그려낸 덕분에 나는 사건이 아닌 인간에 집중하며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이라고 불러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내가 탄 생각의 기차가 나쁜 생각을 싣고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혹은 '그래, 지금도 참 좋아. 하지만 조금 엇나가도 그것도 참 좋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안도감일 수도 있고 편안함일 수도 위로일 수도 있을 유별나지 않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야기 속의 화자나 주인공이 '결혼한 엄마 여자'인 경우가 많아 그로 인해 생긴 공감대일 수도 있겠다. 그녀들은 모성애를 가진 존재이기도 하고(<일본에 가 닿기를>), 욕망에 충실한 여인이기도 하고(<자갈>), 현실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깨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모습이기도 하며(<안식처>), 반면 현실이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모습(<돌리>)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에게 드러난 개개인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때때로 드러나는 내 안의 부분들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그녀들의 삶은 사소한 계기로 흔들리지만 송두리째 변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어떤 경고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린 것조차 내 삶이니 굳이 그것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 했다. 이는 특히 소설 말미에 느낌표처럼 솟아오르는 문장들이 그러했다. 그런 문장들을 읽으며 내 마음의 죄책감 혹은 부담감이 많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 <자갈> 중
그렇게 그들은 그냥 내버려둔다. 달리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었다.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일이. - <코리> 중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 <디어 라이프> 중
굳이 '피날레' 라고 이름 붙여진 네 편의 자전 소설(<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소설들 속에서도 앨리스 먼로의 모습일 것이라 여겨진 것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한 여자로서 드러난 인물들이 어쩌면 앨리스 먼로일 것이라는 생각은 내 곁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하는 듯한 문장들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내게만 말해주는 비밀스런 이야기 같기도 했다. 소설이되 진실을 말하는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기에 한 글자도 허투루 읽지 않았다. 앨리스 먼로의 나이가 80을 넘었다고 하는데 마흔을 바라보는 나와 시공간을 슬쩍 비껴나지만 우리는 어쩜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양쪽의 사이에서 양쪽을 다 바라보는 시선으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더 가까움을 느낀다. 어떤 행동을 한 특정한 사람을 향한 비난이 아닌 그 현상 자체가 일어났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맘에 들었다. 비비언의 입장이 아닌 비비언과 닥터 폭스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감정에 집중했고(<아문센>), 아버지와 어머니 닐과 나의 한가운데에서 그들 모두를 수용(<자갈>)했다. <자존심>에서는 서로 다른 삶을 산 이들의 공생이 가능함을 보여줬고, <코리>에서는 코리와 하워드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인가, 있기는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이 모두가 나는 앨리스 먼로가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 있어 사건은 사건일 뿐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진실된다면 그로 인해 변하는 삶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사건을 겁내지 말고 사건을 겁내는 자신을 겁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흐름을 따라가는 것. 자신을 내맡기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내맡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머리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너져야 했다. 진실함에는 그것이 요구되었다. - <일본에 가 닿기를> 중
상점과 간판처럼, 섰다 출발하는 자동차 소음도 모욕이었다.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 <돌리> 중
"이 세상에 무서워할 건 없어. 자기만 조심하면 돼." - <시선> 중
12월이 들어선지도 보름이 넘었지만 여태 이 한 권만을 다 읽은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며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많이 떠올렸다. 그때처럼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읽다보니 이제야 이 한 권을 읽었다.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레이처럼 내게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결핍이 존재한다. 그 결핍을 무엇으로 채워야할까에 대해 마땅한 답이 없다. 그가 리아의 이름을 떠올리며 안도감을 느꼈듯 내게는 어떤 이름이 떠올라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까? 가끔은 이런 소설들이 그 이름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충분히 음미하며 이 책을 읽었다. 앨리스 먼로가 나의 삶에게 들려준 열네 편의 이야기를 따라 나도 당분간은 나의 삶에 다정히 'Dear'을 붙여줘야겠다. 그리고 다가올 기차를 기다려야겠다 오후 네 시처럼.
* 이 글의 제목은 [디어 라이프]의 <돌리>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