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준다면

 

 

 

1

 

잠실까지는 10km, 한 길이었다. 나는 걷고 걸었다. 거대한 모델하우스와 신도시의 공공 분양 세대수가 적혀 있는 판넬을 지나쳐 또 걷고 걸었다. 책을 읽으며 걸어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저 걸었다. 뭔가를 한번에 하려다 뭐 하나 똑바로 해낸 적이 없다.

 

노란 잎을 뿌리는 가로수 아래로 청바지 입은 아가씨가 달려가는 길이기도 했고 졸린 눈을 한 아저씨가 구겨진 종이봉투를 들고 터덕터덕 걷는 길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을 몇 개쯤 세다가 잊어버렸다. 호수에는 손 맞잡은 사람들이 넘쳤다.

 

발에 자그맣게 물집이 잡혔다.

 

 

 

2

 

밤의 길이로 행복을 재볼 수 있다. 사랑이 있으면 밤이 짧고 이야기가 넘치면 밤이 모자란다.

 

 

 

3

 

잔을 넘친 이야기의 거품은 마술처럼 한 방향으로만 흘렀고,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자의 방향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작은 테이블 위에 수십 조각의 과거가 쌓이고 쌓인다.

 

밤새 만졌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은 내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 놓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때문에 늘 밤이 짧았다. 한번도 충분한 밤이 없었다. 봄에나 가을에나 부족했다. 하지에나 동지에나 아쉬웠다. 밤은 물처럼 녹고 땀은 꿀처럼 달고 모든 직유는 은유가 되고 몸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에게 이런 밤이 아직 잔뜩 남았다고? 놀라면서 잠이 들었고 눈 뜨면 있어서 마저 놀랐다. 오른손에는 사랑, 왼손에는 행복이라고 쓴 이름표를 들고 지금 이 순간에다 어느 쪽 이름표를 달아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 오른쪽에 누운 사람은 사랑스러웠고 왼쪽에 누운 사람은 행복했다.

 

 

 

4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공간은 연속체고, 그래서 젊음이 한 줌이라도 남은 이들은 영원히 아인슈타인을 숭배한다. 그 사람은 우리의 필요에 공식을 선사했다. 사랑에 올라탄 마음은 빛처럼 내달리고 그들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천천히 간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도 그 사람이다. 가끔은 그 모든 걸 덮는 이불 같은 게 있어서 그 안에 딱 두 사람만의 작고 어둡고 젖은 우주를 만들어 숨고 싶다. 돌아가지 못하도록 숨겨놓고 싶다. 진공 속의 진자처럼 손실 없는 진동을, 외력이 없는 공간의 등속직선운동처럼 영원히, 엔트로피 아래 우주처럼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흐트러지고 또 무한하게 흐트러진다면,

 


 

 

빨갛게 타오르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행은 어둠 속에서 벨라의 담배가 불꽃을 일으키던 것을 기억했다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이제우리 모두는.

김연수일곱 해의 마지막

 

― 당신네 남자들은 젊은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지요에로틱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줄 알고진짜 여자를 못 만나 그래요그건 정말 다르지요.

― 다르다.

그녀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 진짜 여자는 여기 있어요그녀가 말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곘는데요.

― 몰라요알 텐데.

잠시 후에 그녀가 말했다.

― 그래서오늘 와이프는 어디 있어요?

― 밴쿠버에 갔어요동생을 보러.

― 밴쿠버까지 갔군요.

― .

― 멀리 갔네요내가 그동안 배운 게 뭔지 알아요그녀가 말했다.

―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지요.

제임스 설터스타의 눈


  

 

 

--- 읽은 ---


 

192.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

 

마을에 피었던 능소화가 다 졌다. 절에 많이 심는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 큰 절은 담이 아니라 주차장으로 대로와 면해 있어서 꽃이 빈하다. 대신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꽃들이 알아서 웃자란다. 능소화도 있었다. 있어도 있는 줄 몰랐고 피어도 능소화인 줄을 몰랐다. 모르는 사이에 꽃이 다 졌다.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기회도 놓친 셈이다. 사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능소화도 모르고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는 삶도 삶이라고 오래 살았구나. 시구 앞에서 삶이 부끄러워질 일일까. 시인이 시집 말미에 넣어놓은 말이 이렇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 알면 아는 대로 / 모르면 모르는 대로꽃도 더 많이 보고 악기도 들여놓아야겠다. 다시 능소화가 피어오르면, 창가에서 연주할 것이다.

 

 

 

--- 읽는 ---

아무튼, 달리기 / 김상민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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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0-25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작가 소설 읽고 있는데요. 쇼님은 일곱해의 마지막 잘 읽히시나요? 저는 되게 더디게 읽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네요.

syo 2020-10-25 16:03   좋아요 2 | URL
네. 잘 읽히던데요?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07   좋아요 1 | URL
나도나도 백만년 만에 김연수 볼까 했어요ㅋㅋㅋ 집에 있는거 볼까 했더니 일곱해의 마지막 도서관 신간 들어와서 빌릴까 말까 하다가 졸려서 낮잠을
자야겠다...

syo 2020-10-25 16:09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책은 어디가지 않고 있으니 잠이 달아나기 전에 걔부터 붙드시길^-^

나비종 2020-10-2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와닿았던 표현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자의 방향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시간이 필요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필요에 공식을 선사했다, 진공 속의 진자처럼 손실 없는 진동을, 외력이 없는 공간의 등속직선운동처럼‘

(공감한 인용 문구)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지요.

(4번 단락) 너무 좋아 몇 번을 읽어봅니다.
다만, 저는 ‘젖은‘ 우주 말고 ‘포근한‘ 우주를~

아까 가로수가 가린 햇살을 바라보고 걸으며 ‘세상에 나의 영혼과 공명하는 영혼을 가진 이가 한 명만 있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죠.

제목이 다했네요. 촌철살인의 포스가..^^

syo 2020-10-26 18:16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까지 정리정돈된 칭찬을 해주신다구요? ㅎㅎㅎㅎ
나비종님의 꼼꼼함에는 정말 못당하겠네요^_^

포근한 우주도 정말 좋겠네요. 포근한 우주를 만드시길. 후에 거긴 어떤지 이야기해주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10-2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기 좋은 하루였습다.
전 구리 동구릉 8킬로 걸었습니다.
가을 가기 전 강추 드립니다.
가시면 깜짝 놀라실거예요. ^^

syo 2020-10-26 18:17   좋아요 0 | URL
요즘처럼 기온이며 햇살이며가 걷기에 좋은 시간이 일 년 중에 그리 길지 않겠지요.
조금만 더 지나도 걷기에 너무 춥다싶겠죠?
북다님께서도 많이 걸어두시기를^-^

2020-10-25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定礎

 

 

 

이제 와 멀리 갈 순 없을 것이다. 언감생심 그런 걸 바라기에 나는 너무 태만했고, 멍청했고, 심지어 속도 없었다. 차라리 그냥 어디도 가지 않았으면 싶다. 가만히 있고 싶다. 그렇게 산다.

 

그렇지만 인간은 숨만 쉬어도 녹슬고 바스라지는 연약한 구조물이다.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도대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샅샅이 뒤지고 바닥까지 훑어서 가진 것들의 짧은 목록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남루하겠으나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초석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에서 딱 한 뼘씩만 천천히 천천히 세상으로부터 훔쳐내는 것. 한 아름 바깥의 것들은 다 임자가 있으니 그대로 두고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듯이 나로부터 세상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걸까내 수준에 맞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나는 몰라서 불행해지는 걸까알고 싶었다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지웅살고 싶다는 농담


"자네는 젊으니까 자네 마음에 드는 삶일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긴 하지만근본적으로 내겐 마찬가지라고 했다그러자 사장은 삶의 변화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난 결코 삶을 바꾸지는 못하며어쨌거나 모든 삶이 똑같고지금의 내 삶이 조금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사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가 늘 빗나간 대답을 하고 야망이 없다면서그건 사업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했다사장의 불만을 사지 않는 게 더 좋았곗지만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 삶을 바꿀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알베르 카뮈이인


 

 

--- 읽은 ---

 


190. 궁극의 리스트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0

 

리스트의 리스트.

 

두려움, 욕망, 호승심, 숭배, 허영심,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사람을 책상 앞에 앉혀 목록을 적게 한다. 그런 감정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동안, 사람은 목록을 만든다. 사람은 목록을 만드는 동물이다.

 

저자의 나열은 대체로 독자에겐 의미 없는 정보의 과장된 홍수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독자는 열거된 목록을 건너뛴다. 어차피 그 목록을 모두 외울 수가 없어서, 독자에겐 나열은 그냥 거기 목록이 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나열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목록 뒤에 숨겨놓은 마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열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라가는 일에서 지겨움이 걷힌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이번에야말로 아우스터리츠를 똑바로 읽을 수 있게 되려나 보다.

 

 


 

191. 영어독서가 취미입니다

권대익 지음 / 반니라이프 / 2020

 

syo가 초등학교 다닐 때, 수학 시험은 답을 쓸 때 맞춤법이 틀려도 숫자만 맞으면 정답으로 인정하던 풍조가 있었다. 국어 시험도 아니고- 가 그 근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글러 먹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마인드로 이과생을 키우면 자신의 지식과 연구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어른이나 만들 뿐이다. 책도 그렇다. 영어독서를 권하는 책이니 그 내용만 알차게 채워 넣으면 그걸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맹자의 논어를 읽는 것보다 중학교 선생님이 자료를 정리해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더 좋아합니다.” 라고 써 놓으면, 저자가 논어는커녕 논어를 정리해 놓은 자료조차 똑바로 읽지 않았으면서 읽은 것처럼 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읽어나갈 동력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저자가 저런 실수를 했더라도,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런 거 잡아내는 일로 벌이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고 있었을까?

 

 

 

 

--- 읽는 ---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 마이 티 응우옌 킴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인티 차베즈 페레즈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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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4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5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24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금희 작가님이 제발트! 해서 읽고 싶었는데 아직 본 게 없어요. 토성의 고리 하나 갖춰놨어요. 저는 행복하지 않을 때 일기를 많이많이 썼는데(요즘엔 잘 안 씀...쓸 기력조차 없음...) 날이 추워져 그런가 syo님 요즘 많이 쓰시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yo 2020-10-25 15:51   좋아요 1 | URL
밖이 많이 춥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발트는 어렵고, 소설이 대한 내공이 좀 있는 독자나 ‘의식의 흐름‘류 소설을 쉽게 읽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한테 알맞는 책 같습니다. 제 독서가 망하고 있거든요 지금....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10   좋아요 0 | URL
그럼 제 독서도 망할 확률이 아주 높네요...일단은 꽂아만 두는 걸로....

syo 2020-10-25 16:17   좋아요 1 | URL
<아우스터리츠>가 유독 심하다는 평입니다. <토성의 고리>는 제가 안 읽어봤지만, 반님의 내공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니 한번 시도해보시죠. 시간 나실 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김연수도 겨우 읽은 쪼렙이라 이번 생 안에는 제발...제발트... ㅋㅋㅋㅋㅋ

syo 2020-10-26 18:19   좋아요 1 | URL
제발제발트 애매하다. 애매하게 웃었어요 ㅎㅎㅎ

추풍오장원 2020-10-2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 읽기 시작 책은 어떤지요? 제 마르크스 책은 입문서만 늘어가는 것 같군요...^^

syo 2020-10-25 15:50   좋아요 1 | URL
음, 말이 시작책이지 실제로는 아르네스트 만델이 자본 번역서에 서문 단 걸 모아놓은 책입니다. 서문이 보통 제일 마지막에 쓰인다고 하잖아요. 실제로 <자본>을 다 읽은 사람을 가정하고 쓴 글들이라 유익하고 깊이있지만 접근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 댓글에다가 이런 걸 써버리면 나중에 페이퍼에다 쓸말이 없어지는데 ㅋㅋㅋㅋ
 


눈물을 마시는 악어

 

 

1

 

날이 저물고, 쓸쓸해졌다.

 

 

 

2

 


혼자서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보고는 펑펑 울었다. 잘 참아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길. 나는 석양이 깔리는 도시가 높은 곳에서 조명되는 장면에 늘 약하다.

 

무너지는 과정에서 린젠칭이 품었을 마음의 모양에 대해 나는 선연하게 알고 있어서, 다가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헛된 말들을 쌓아나가는 마음과, 그 말들을 견디며 옆을 지켜주는 이를 위해 해줄 것이 없는 스스로를 망연히 바라보는 시선과, 비참함 위에 초라함을 얹고도 부족하여 열등감으로 나를 망치고 너를 망치고 결국 우리를 망치는 궤적에 대한 기억이 흉터처럼 박혀 있어서, 크게 울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아파서, 컴퓨터를 끄고 누운 자리에서 또 한 번 쓰게 울지 않고는 잠들 수가 없었다. 꿈을 꿀까 봐 무서운 밤이었다.

 

 

 

3

 

꿈도 꾸지 않고 잘만 잤다.

 

정작 꿈은 하루 전에 꾸었다. 편의점에서 비닐 포장된 미니 악어 세 마리를 사왔는데, 봉투를 뜯자마자 얘네들이 싱크대 위로 재빠르게 질주하며 물을 마시더니 자꾸만 커졌다. 나는 얘들을 포획하기 위해 전기 모기채를 들고 왔는데, 그 사이 꽤 큰 녀석들이 싱크대 아래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달려가 모기채로 싱크대 아래를 주욱 훑었더니 뭐가 턱 걸려 나왔다. 보니까 악어의 하반신이었다. 상반신은 뜯겨나가고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 싱크대 아래를 봤더니 집채만 한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서 악어 두 마리하고도 반 마리를 꼴깍 삼키는 중이었다. , 옛말에 구렁이는 쫓아내는 게 아니랬어. 나는 웃으며 싱크대 아래쪽 뚜껑을 덮고 삼겹살을 먹으러 출발했다.

 

개 안 나오는 개꿈 팔아요.

 

 

 

--- 읽은 ---

 


187. 산시로

나쓰메 소세키 지음 /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

 

syo가 나쓰메 소세키에 홀딱 빠진 것은 의외로 장편이 아니라 짧은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몽십야라는 책에, 열 개의 꿈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실려있다. 또 그 책에는 환영의 방패라는 단편도 있는데, 지금 내용은 거진 까먹었지만 처음 읽었을 때 아주 지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좀 더 많은 작품을 내놓고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장편 산시로에서 짤막한 이야기를 다루는 나쓰메 소세키의 엄청난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syo의 똥글로 오염된 안구를 위해 정화의 시간을 가지소서. 그리고 소세키 월드로 오소서. 소쌤 입문에는 아, 산시로가 아주 그만입니다용.

 

  "내가 아까 낮잠을 자면서 아주 재미있는 꿈을 꿨네그게 말이야내가 평생 딱 한 번 만난 여자하고 꿈속에서 갑자기 재회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긴데신문 기사보다는 이 얘기가 듣기에도 유쾌할 걸세."

  "어떤 여자입니까?"

  "열두세 살쯤 되는 예쁜 여자아이네얼굴에 점이 있지."

  산시로는 열두세 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실망했다.

  "언제쯤 만난 겁니까?"

  "20년쯤 전이네."

  산시로는 깜짝 놀랐다.

  "그 여자아이라는 걸 용케 알아보셨네요."

  "꿈이야꿈이니까 아는 거지그리고 꿈이니까 이상해도 되는 거고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나는 깊은 숲 속을 걷고 있었네저기 색 바랜 여름 양복을 입고 저 낡은 모자를 쓰고 말이야……그래그때는 하여튼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네모든 우주의 법칙은 변하지 않지만 법칙에 지배당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변한다그렇다면 그 법칙은 사물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꿈을 깨고 나서 보니까 시시하지만꿈속이니까 진지하게 그런 걸 생각하며 숲 아래를 지나다가 돌연 그 여자아이를 만났네그냥 가다가 만난 건 아니야그 여자아이는 가만히 서 있었거든옛날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옛날 그대로의 차림새로 머리도 옛날 머리 그대로고물론 점도 있었지다시 말해 20년 전에 봤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열두세 살짜리 여자아이였지내가 그 여자아이한테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하니까 그 여자아이는 나한테 무척 나이를 드셨군요하더라고그래서 내가 너는 왜 그렇게 변하지 않은 거냐고 물으니까 이 얼굴이던 해이 복장이던 달이 머리를 한 날이 제일 좋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야그건 언제쯤 일이냐고 묻자 20년 전 당신을 만났던 때라는 거야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걸까하고 스스로 이상해하니까 여자아이가 당신은 그때보다 좀 더 아름다운 쪽으로 옮아가고 싶어 하니까 그런 거라고 가르쳐주었네그때 내가 여자아이한테 너는 그림이라고 하자 여자아이가 나한테 당신은 시라고 했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산시로가 물었다.

  "그러고 나서 자네가 온 거지."

  "20년 전에 만났다는 것은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입니까?"

  "진짜 있었던 일이니까 재미있지."

  "어디서 만났던 겁니까?"

  선생의 코는 다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선생은 그 연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헌법이 공포된 게 메이지 22(1889)이었지그때 모리 문부대신이 살해당했네자네는 기억하지 못할 걸세몇 살이었나자넨그래그렇다면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로군난 고등학교 학생이었네대신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면서 여럿이서 총을 메고 나갔지묘지에 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체조 교사가 다케바시(竹橋안으로 끌고 가서 길가에 정렬시켰지우리는 거기에 서서 대신의 관을 전송하게 된 거야말이 전송이지 실은 구경한 거나 다름없었어그날은 아주 추운 날이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꼼짝하지 않고 서 있으니까 구두 속의 발이 아프더군옆의 학생이 내 코를 보고는 빨갛다고 했지드디어 행렬이 왔네하여튼 긴 행렬이었어추운 가운데 눈앞으로 마차하고 인력거 여러 대가 조용히 지나갔네그 안에 내가 말한 그 여자애가 있었지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도 희미하기만 한 것이 도저히 또렷하게 떠오르지가 않아다만 그 여자애만은 기억하고 있지그것도 해가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져서 지금은 떠올리는 일도 좀처럼 없어오늘 꿈을 꾸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고 있었네하지만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낙인을 찍은 것처럼 뜨거운 인상으로 남았지……묘한 일이야."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한 번도 못 만났습니까?"

  "전혀 못 만났지."

  "그럼 어디의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는 겁니까?"

  "물론 모르지."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안 찾아봤네."

  "선생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메어왔다.

  "그래서?"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겁니까?"

  선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로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네난 자네보다 훨씬 산문적으로 생겨먹은 사람이야."

  "하지만 만약 그 여자가 왔다면 아내로 맞이하셨겠지요?"

  "글쎄."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맞이했겠지."

  산시로는 가엾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선생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때문에 독신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면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불구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지하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결혼을 할 수 없는 불구자도 있고그 외에 여러 가지로 결혼하기 어려운 사정을 가진 사람도 있네."

  "결혼을 방해하는 사정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걸까요?"

  선생은 연기 사이로 가만히 산시로를 보고 있었다.

  "햄릿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햄릿은 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은 많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입니까?"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해놓고 선생은 입을 다물었다연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예컨대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고 하세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를 의지해서 자랐다고 치세그 어머니가 또 병이 들어 곧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자신이 죽으면 아무개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지그 아이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지명하는 거야이유를 물은즉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자꾸 물으니까 희미한 목소리로 실은 아무개가 친아버지라고 말하는 거야……뭐 그냥 이야기지만 그런 어머니를 가진 아이가 있다고 하자고그러면 그 아이가 결혼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 사람은 좀처럼 없겠지요."

  "좀처럼 없겠지만 있기는 하지."

  "하지만 선생님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선생은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네는 분명히 어머님이 계셨지?"

  "."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헌법이 공포된 이듬해에 돌아가셨네."

나쓰메 소세키산시로, 305-309 



  

 

188. 희다

이향 지음 / 문학동네 / 2013

 

흘러간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듣는 것도 좋아한다. 애틋하거나 슬픈 사연이면 더욱 좋다. 슬픈 사랑의 경험담을 말하며 자신의 색깔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내가 뭐, 젖은 눈을 하고 거짓말을 만들어서라도 자빠뜨려볼 만한 사람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고 생각하고 만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집중하여 말하는 이의 주름을 더듬어본다. 이야기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표정이나 태도, 흐려지는 말꼬리, ‘’ ‘그냥’ ‘어차피’ ‘아니처럼 뜻 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모양, 술잔의 테두리를 훑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랄지, 멀리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투명하고 축축한 시선이랄지,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사람은 그런 것들로 시를 쓴다. 사랑할 때는 말로, 사랑이 끝나면 그런 것들로 사람은 시인이 된다. 나는 시 읽기가 좋다.

 


 

 

189.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기본적으로 글을 잘 써야 하겠고, 센스가 있어야 하겠고,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겠고, 제목도 잘 뽑아야 하겠고, 하겠고 하겠고로 이러다 한 페이지를 채우겠고, 하여튼 그런데, 결국은 다 결과론인 듯. 잘 되는 애들은 잘 돼서 잘 됐고, 잘 못된 애들도 잘 된 애들만큼이나 갖출 만큼 갖췄고.

 

 

 

--- 읽는 ---

코스모스 / 칼 세이건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영어독서가 취미입니다 / 권대익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최윤 외

지리의 힘 / 팀 마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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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2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코스모스 저도 읽고 있어요*•ᴗ•*

syo 2020-10-23 22:58   좋아요 1 | URL
이걸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안 읽고 지내다가 결국 읽기 시작했는데, 또 읽다가 집어던져놨네요
ㅎㅎㅎㅎㅎㅎ 저는 아무래도 완독까지 두어 주 걸리겠어요.
파이버님의 집중적이고 쾌적한 독서를 기원합니다^-^

stella.K 2020-10-22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요님이 쓰게 울었다니 관심이 갑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오늘 스테이지 무비 <늙은 부부의 사랑>을 올레 틔비에서 봤는데
끝에 가서 좀 슬프더군요. 할매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든요.ㅠㅠ

그꿈 단편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군요.ㅎㅎ

syo 2020-10-23 22:59   좋아요 0 | URL
사람에 따라 평이 좀 많이 갈릴 것 같은 영화입니다.
저는 남자주인공의 인생사에 너무도 철저하게 공감을 해버려가지고.....

이게 악어꿈인지 구렁이꿈인지 모르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2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작년인가 재작년 이맘쯤 악어꿈꿨어요!! 자꾸 우리집에 들어오려고 해서 죽여버렸던가...

syo 2020-10-23 23:00   좋아요 1 | URL
저게 악어 꿈인 걸까요? 구렁이 꿈인 줄 알았는데... 구렁이 꿈이 길몽이라고 하더라구요.

scott 2020-10-2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어꿈은 추진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한데요 로또 한장 사시고 눈물뚝!

syo 2020-10-23 23:0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친구가 구렁이 꿈이 길몽이라는 건 알려줬는데, 악어꿈 또한 승승장구꿈이었군요.
으하하하. 뭐 하는 게 있어야 승승장구를 해도 할 텐데!

모운 2020-10-22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시로를 650자로 줄여서 써야 하는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자

syo 2020-10-23 23:01   좋아요 0 | URL
각자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고통을 아름답게 감내하자

독서괭 2020-10-2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승승장구 절반을 구렁이가 먹어버렸...(동공지진) 구렁이가 길몽이니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거겠죠? ㅎㅎ syo님 쓴 눈물이 떠나보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

syo 2020-10-25 15:5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어차피 악어를 제가 먹을 수는 없었을거니까, 은혜갚은 구렁이 컨셉으로 구렁이가 저한테 뭔가를 해주길 기다리겠습니다.

2020-10-24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5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양의 모양 3

 

 

 

남자는 고개를 숙인다. 걷지 않으려 합니다. 그늘이 그렇듯이 서늘한 표정으로, 그림자가 그렇듯이 남자는 어두워졌다.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길이 열릴 때까지 다시 한 갑자甲子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 이리도 아둔하게 굴까. 남자가 조아린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모르는 사이에 또 쌓이겠지요. 시간은 눈처럼 녹지 않으니 기다리는 이를 속이지 않겠지요. 아이가 혀를 찬다. 어리고 어리석다. 지금껏 시간에 속아오지 않았니. 시간은 아지랑이처럼 모든 것을 속인다. 시간은 햇살처럼 모든 것을 녹인다. 너는 어둡고 투명하고 손닿지 않으니 네가 정을 준 이는 시간에 속는지도 모르고 속아 너를 잊겠구나. 또 그 마음은 시간에 녹는지도 모르고 녹아 너를 할퀴겠구나. 너는 어찌 또 저 엄혹한 시간에게 이기지도 못할 내기를 걸려 하느냐. 감당할 수 없는 것과 왜 드잡이를 하려 드느냐. 어리고 어리석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남자가 구름에 숨은 달처럼 입을 다문다. 아이는 보챈다. 가자꾸나. 걷자꾸나. 떠나지 않는 것들은 돌아올 수 없느니, 이 밤을 부지런히 나서자꾸나. 남자가 달을 숨긴 구름처럼 대답을 숨긴다.

 

동짓달이다. 계명성啟明星은 새벽하늘에 뜨는 개밥바라기다. 그 옅은 빛이 스러지기 전에 그들은 걸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돌아옴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궤도를 걸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도 걸어야 한다. 시간의 발걸음 소리를 머리에 이고, 밤을 따라 밤이 물러나는 것과 꼭 같은 속도로 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지구를 휘돌아야만 한다. 하오나 작달비가 붓겠습니다. 해보다 비가 먼저 올 것이고 해보다 그 사람이 먼저 일어나 일터로 나설 것이니 해가 나기도 전에 찬비를 만날 그 몸이 얼마만큼 춥고 또 외롭겠습니까. 어리석다 타박하셔도 저는 그 연하고 약한 몸을 위해 남고자 하니, 염려가 가시는 발걸음을 부여잡지 않도록 이 자리에 두고 나서시지요. 남자는 새벽 비처럼 차고 단호하다. 아이가 탄식한다. 이치가 선뜻 네 물질을 바수고 섭리가 살뜰히 네 개념을 흩을 것이다. 다음 길이 너를 마중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도 끝내 남고야 말겠니. 남자는 말이 없다. 빗소리가 새벽을 때리기 시작한다. 고집스럽구나. 내 너를 꺾지 못했듯 시간 또한 너를 꺾지 못하도록 그곳에 가서 기원하겠다.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 인사를 갚을 날이 없을 것이다. 아이의 울먹임이 빗소리에 녹아 서쪽 하늘로 흘러간다. 계명성의 그림자가 잠깐 남자와 아이를 덮는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꺼진다. 다시 켜졌다 다시 꺼진다.

 

, 미친, 새벽부터 비 오냐. 겁나 춥네. 여자가 모자를 눌러쓰고 묶은 머리를 뒤편으로 꺼낸다.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는 문을 열고 나간다. 비 오는 새벽의 차고 젖은 공기 한 덩어리가 문틈으로 침입한다. 신발장 앞을 비추던 현관 센서등이 꺼진다. 우산꽂이가 어둠 속에서 텅 비어있다. 그녀에겐 우산이 딱 하나뿐이다.

 

 

 

 

--- 읽은 ---

 


184. 이야기하는 법

양자오 지음 / 박다짐 옮김 / 유유 / 2019

 

양자오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인가? 도대체 못 하는 이야기가 없고, 하다하다 이제 이야기하는 법까지 이야기해준다. 양자오가 한국사람이거나 syo가 타이완사람이었다면 듣고 읽을 이야기가 얼마나 풍성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할 때가 다 있다. 싸랑해요 양쌤…….

 

 

 

185. 너무 맛있어서 잠 못 드는 세계지리

Gary Fuller, T. M. Reddekopp 지음 / 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7

 

저자 이름이, 영어로 등록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신기하다.

 

……에헴.

 

 

 

186.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박은지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났는데, 혹은 계속 있어 왔지만 쭈욱 모르고 있던 것이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 새로움과 선명함이 100%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기를 바라는 건 욕심을 넘어 방해다. 저항을 택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옳다고 믿으며) 간다. 설득시키고 양보를 받아내는 것도, 아니면 힘으로 쟁취하는 것도, 잘 보면 어차피 모두 쟁취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쟁취가 목적이다. 무대에 올려놓고 싸우면 된다. 비난과 무시와 입막음도 극단적 전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 정말 전략으로 사용하려면 수준이 필요하다. 모든 비판에 응 페미는 정신병이렇게 한 줄 띡 달아놓고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당신은 그냥 모래알이다. 모래알을 몰고 다니는 진짜 파도들은 비판을 위해서 상대방의 체제를 공부한다. 당신이 서 있는 입장이 옳을 수 있다. 당신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정말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당신의 상대방에게 유효타를 먹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니라면,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냥 마우스 클릭질 몇 번과 마우스 휠 몇 번 드르륵 내린 게 전부라면, 그건 그리 폼나는 작업은 아니다. 직접, 직접 하자. 그리고 내가 지금 정확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침묵하자. 만사 거기서 시작이다.

  

 

 

--- 읽는 ---

산시로 / 나쓰메 소세키

희다 / 이향

세계 경제가 만만해지는 책 / 랜디 찰스 에핑

궁극의 리스트 / 움베르토 에코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 갖춘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장판에서 푸코 읽기 / 박정수

가치의 모든 것 / 마리아나 마추카토

연년세세 /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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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0-22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상 세계지리 책표지에는 저자명이 한글로 써 있군요 ㅋㅋ 신기하다. 밖에 비오나요...이번주는 우산까지 들면 너무 무거울 것 같아요...

syo 2020-10-22 14:30   좋아요 1 | URL
어제는 하늘이 눈 내릴 것처럼 생겼더라구요.
오늘은 벌써 반절이 넘게 흘러갔지만, 아직 집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추운 날씨 늘 조심하세요.

2020-10-26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비어있는 모든 공간이 비어있지 않아서, 이제 웬만하면 대구에 가고 싶지 않다.

 

 

 

2

 

아무것도 말하거나 쓸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지난 일들은 지난 일들이고, 오늘의 내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거나, 오늘의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감지할 줄 모르는 반편이가 되어 있거나, 아무튼 말하거나 쓸 만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부유하는 오늘이 이어지고 있다.

 

 

 

3

 

닫히고 있다.

 

 

 

4

 

너와 나 사이에 폭이 만 리가 되는 강이 놓여 있더라도 나는 언젠가 어떻게든 그 강을 넘어 너에게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놓인 것이 달음질 한 번에 건너뛸 수 있는 좁은 개울일지라도 그 속에 딱 한 방울의 눈물이 보태어져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그 물을 넘어 너에게로 갈 수가 없겠다.

 

 

 

5

 

다치고 있다.

 

 

 

6

 

인간의 인식이나 사는 방식, 미감을 타격하여 흔들어놓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하다.

 

 

 

7

 

가끔 당신이 나를 훔쳐간다.

 

 

 

8

 

모니터 앞에 앉으면, 대본을 잃어버린 채 일주일을 보낸 뒤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가 된 기분이다.

 

 

 

9

 

말의 거처를 수소문한다.

 

 

 

 

--- 읽은 ---



179. 작가의 뜰

전상국 지음 / 샘터사 / 2020

 

딱히 할 말이 없다.

 

 

 


180. 죽기 전에 알아야 할 5가지 물리법칙

야마구치 에이이치 지음 / 정윤아 옮김 / 김찬현 감수 / 반니 / 2015

 

죽기 전에 알아야 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죽고 나면 알 수 없으니 그 전에 미리 좀 알아두라는 의미일까? 그건 동해 바다는 한반도 동쪽에 있다는 이야기잖아. 아니면, 죽고 나면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미리미리 좀 알아놓으라는 말일까? 제목에 쫄 필요는 없다. 오늘 당장 안 읽고, 죽기 전까지만 이 책을 읽으면 될 것 같다. 혹은, 죽고 나서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181. 천년의 바람

박재삼 지음 / 민음사 / 1995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시를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딱 하나만 외우고 말 거라면 이 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이 시가 말하는 마음이 뭔지 좀 알 것도 같다. 33년생이신 박재삼 선생님이 59년에 쓴 시니까, 이 시를 썼던 선생님보다는 더 오래 살았다. 하하하.

 

 

 

 

182. Chaeg 2020. 10

()(월간지) 편집부 지음 / ()(잡지) / 2020

 

이 잡지가 소개하는 책을 매달 한 권은 꼭 사게 된다.

 

 

 


183. 카운슬러

코맥 매카시 지음 /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

 

지금 이 맥락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문학은 독자를 유혹에 빠뜨린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덮어놓고 아는 척 뭉갬으로써 있어빌리티를 확보할 수 있겠다는 유혹.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이걸 전부 다 알아듣고 저러는 건 아닐걸?

 

이야기의 뼈대는 더없이 단순하다. 그런데 거기에 들러붙은 인간들이 내뱉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모든 각도에서 조망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서사를 초과하는 것처럼 어릉어릉 보인다. 근데 또 그런 말들이 하늘이 낸 글 솜씨와 결합하면, 간단명료한 서사를 값싼 미끼로 던져놓고 세상 모든 말을 다 낚아 올리려는 욕심처럼 보였다가, 모든 말을 하는 것처럼 굴면서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계획처럼 느껴졌다가 한다. 이런 모호함은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파도파도 끝없는 금맥과도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죽기 전까지 읽어도 매카시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 할 걸?

 

 

 

--- 읽는 ---

궁극의 리스트 /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하는 법 / 양자오

너무 맛있어서 잠 못 드는 세계지리 / Gary Fuller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 박은지

하마터면 얼심히 살 뻔 했다 / 하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최윤 외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 악셀 하케

산시로 / 나쓰메 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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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2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 있어빌리티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위에서부터 뭔가 쓸쓸하다, 가을이구나..이러면서 조용한 마음으로 읽다가 있어빌리티 완전 빵터졌잖아요 ㅠㅠ

syo 2020-10-21 22:10   좋아요 1 | URL
쓸쓸한 가을이야.... 그리고 있어보이고 싶어....
이렇게 조화로운 마음이잖아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10-2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말이 많은 날들 만드는 삶은 어려운 것 같아요. (저처럼)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예쁘게 고르고 고른 말만 하고 싶다면 더 어렵잖아요. 구질구질 세상에 없어도 될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말과 글 뿌리는 저를 반성합니다...

syo 2020-10-21 22:11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을 하세요.
요즘 알라딘 최고 핫플레이스가 반님의 서재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구질구질 지저분 어지러운 말 이런 단어 쓰시면 반님을 아끼는 이웃님들이 가만있지 않을 기세던데요 ㅎㅎ

stella.K 2020-10-20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터 앞에 앉으면, 대본을 잃어버린 채 일주일을 보낸 뒤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가 된 기분이다.
크~ 어쩌라고...! 흐흑~

syo 2020-10-21 22:12   좋아요 0 | URL
그런 기분에 대해서 스텔라님은 좀 더 잘 아시겠네요.
직접 무대에 올라서시기도 하셨나요?

stella.K 2020-10-22 19:11   좋아요 0 | URL
그런 적은 없구요, 넘 안 써지면 컴모니터를 창문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겪은 적은 있어요.
나를 창밖으로 던질 순 없잖아요.ㅋㅋ
전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작가를 했던 건데
기회되면 스요님도 연극 한 번 해 보세요.
전 다시 태어나면 작가 안하고 배우할 겁니다.ㅎㅎㅎ

페크pek0501 2020-10-2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syo 님의 글을 훔쳐 보곤 간답니당~~

syo 2020-10-21 22: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프로필 사진이 바뀌셨네요.
훔쳐보실 만한 글을 쓰기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요....

scott 2020-10-2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syo 님은 가을 남자 ㅎㅎ
천년의 바람 속 시를 외우고 싶어하는 남자~*

syo 2020-10-21 22:13   좋아요 0 | URL
가을 진짜 별로예요 ㅋㅋㅋㅋ 멘탈에 좋지 않은 계절입니다. 몸은 여름이 제일 고생스럽지만...

2020-10-21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1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20-10-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시로 너무 좋습니다. 소세키 작품이 감정이입이 잘되더라구요 저는 ㅎㅎ

syo 2020-10-21 22:16   좋아요 2 | URL
아, 저 역시 나쓰메 소세키로 청춘의 한 페이지를 물들인 소세키빠긴 하지만,
감정이입이라 치면 <산시로> 말고는 딱히 잘 안되더라구요.....

산시로 짱이라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