廢
1
비어있는 모든 공간이 비어있지 않아서, 이제 웬만하면 대구에 가고 싶지 않다.
2
아무것도 말하거나 쓸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지난 일들은 지난 일들이고, 오늘의 내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거나, 오늘의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감지할 줄 모르는 반편이가 되어 있거나, 아무튼 말하거나 쓸 만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부유하는 오늘이 이어지고 있다.
3
닫히고 있다.
4
너와 나 사이에 폭이 만 리가 되는 강이 놓여 있더라도 나는 언젠가 어떻게든 그 강을 넘어 너에게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놓인 것이 달음질 한 번에 건너뛸 수 있는 좁은 개울일지라도 그 속에 딱 한 방울의 눈물이 보태어져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그 물을 넘어 너에게로 갈 수가 없겠다.
5
다치고 있다.
6
인간의 인식이나 사는 방식, 미감을 타격하여 흔들어놓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하다.
7
가끔 당신이 나를 훔쳐간다.
8
모니터 앞에 앉으면, 대본을 잃어버린 채 일주일을 보낸 뒤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가 된 기분이다.
9
말의 거처를 수소문한다.
--- 읽은 ---
179. 작가의 뜰
전상국 지음 / 샘터사 / 2020
딱히 할 말이 없다.
180. 죽기 전에 알아야 할 5가지 물리법칙
야마구치 에이이치 지음 / 정윤아 옮김 / 김찬현 감수 / 반니 / 2015
‘죽기 전에 알아야 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죽고 나면 알 수 없으니 그 전에 미리 좀 알아두라는 의미일까? 그건 동해 바다는 한반도 동쪽에 있다는 이야기잖아. 아니면, 죽고 나면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미리미리 좀 알아놓으라는 말일까? 제목에 쫄 필요는 없다. 오늘 당장 안 읽고, 죽기 전까지만 이 책을 읽으면 될 것 같다. 혹은, 죽고 나서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181. 천년의 바람
박재삼 지음 / 민음사 / 1995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시를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딱 하나만 외우고 말 거라면 이 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이 시가 말하는 마음이 뭔지 좀 알 것도 같다. 33년생이신 박재삼 선생님이 59년에 쓴 시니까, 이 시를 썼던 선생님보다는 더 오래 살았다. 하하하.
182. 책 Chaeg 2020. 10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0
이 잡지가 소개하는 책을 매달 한 권은 꼭 사게 된다.
183. 카운슬러
코맥 매카시 지음 /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
지금 이 맥락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문학은 독자를 유혹에 빠뜨린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덮어놓고 아는 척 뭉갬으로써 있어빌리티를 확보할 수 있겠다는 유혹.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이걸 전부 다 알아듣고 저러는 건 아닐걸?
이야기의 뼈대는 더없이 단순하다. 그런데 거기에 들러붙은 인간들이 내뱉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모든 각도에서 조망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서사를 초과하는 것처럼 어릉어릉 보인다. 근데 또 그런 말들이 하늘이 낸 글 솜씨와 결합하면, 간단명료한 서사를 값싼 미끼로 던져놓고 세상 모든 말을 다 낚아 올리려는 욕심처럼 보였다가, 모든 말을 하는 것처럼 굴면서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계획처럼 느껴졌다가 한다. 이런 모호함은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파도파도 끝없는 금맥과도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죽기 전까지 읽어도 매카시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 할 걸?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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