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의 모양 3
남자는 고개를 숙인다. 걷지 않으려 합니다. 그늘이 그렇듯이 서늘한 표정으로, 그림자가 그렇듯이 남자는 어두워졌다.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길이 열릴 때까지 다시 한 갑자甲子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 이리도 아둔하게 굴까. 남자가 조아린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모르는 사이에 또 쌓이겠지요. 시간은 눈처럼 녹지 않으니 기다리는 이를 속이지 않겠지요. 아이가 혀를 찬다. 어리고 어리석다. 지금껏 시간에 속아오지 않았니. 시간은 아지랑이처럼 모든 것을 속인다. 시간은 햇살처럼 모든 것을 녹인다. 너는 어둡고 투명하고 손닿지 않으니 네가 정을 준 이는 시간에 속는지도 모르고 속아 너를 잊겠구나. 또 그 마음은 시간에 녹는지도 모르고 녹아 너를 할퀴겠구나. 너는 어찌 또 저 엄혹한 시간에게 이기지도 못할 내기를 걸려 하느냐. 감당할 수 없는 것과 왜 드잡이를 하려 드느냐. 어리고 어리석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남자가 구름에 숨은 달처럼 입을 다문다. 아이는 보챈다. 가자꾸나. 걷자꾸나. 떠나지 않는 것들은 돌아올 수 없느니, 이 밤을 부지런히 나서자꾸나. 남자가 달을 숨긴 구름처럼 대답을 숨긴다.
동짓달이다. 계명성啟明星은 새벽하늘에 뜨는 개밥바라기다. 그 옅은 빛이 스러지기 전에 그들은 걸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돌아옴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궤도를 걸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도 걸어야 한다. 시간의 발걸음 소리를 머리에 이고, 밤을 따라 밤이 물러나는 것과 꼭 같은 속도로 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지구를 휘돌아야만 한다. 하오나 작달비가 붓겠습니다. 해보다 비가 먼저 올 것이고 해보다 그 사람이 먼저 일어나 일터로 나설 것이니 해가 나기도 전에 찬비를 만날 그 몸이 얼마만큼 춥고 또 외롭겠습니까. 어리석다 타박하셔도 저는 그 연하고 약한 몸을 위해 남고자 하니, 염려가 가시는 발걸음을 부여잡지 않도록 이 자리에 두고 나서시지요. 남자는 새벽 비처럼 차고 단호하다. 아이가 탄식한다. 이치가 선뜻 네 물질을 바수고 섭리가 살뜰히 네 개념을 흩을 것이다. 다음 길이 너를 마중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도 끝내 남고야 말겠니. 남자는 말이 없다. 빗소리가 새벽을 때리기 시작한다. 고집스럽구나. 내 너를 꺾지 못했듯 시간 또한 너를 꺾지 못하도록 그곳에 가서 기원하겠다.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 인사를 갚을 날이 없을 것이다. 아이의 울먹임이 빗소리에 녹아 서쪽 하늘로 흘러간다. 계명성의 그림자가 잠깐 남자와 아이를 덮는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꺼진다. 다시 켜졌다 다시 꺼진다.
아, 미친, 새벽부터 비 오냐. 겁나 춥네. 여자가 모자를 눌러쓰고 묶은 머리를 뒤편으로 꺼낸다.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는 문을 열고 나간다. 비 오는 새벽의 차고 젖은 공기 한 덩어리가 문틈으로 침입한다. 신발장 앞을 비추던 현관 센서등이 꺼진다. 우산꽂이가 어둠 속에서 텅 비어있다. 그녀에겐 우산이 딱 하나뿐이다.
--- 읽은 ---
184. 이야기하는 법
양자오 지음 / 박다짐 옮김 / 유유 / 2019
양자오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인가? 도대체 못 하는 이야기가 없고, 하다하다 이제 이야기하는 법까지 이야기해준다. 양자오가 한국사람이거나 syo가 타이완사람이었다면 듣고 읽을 이야기가 얼마나 풍성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할 때가 다 있다. 싸랑해요 양쌤…….
185. 너무 맛있어서 잠 못 드는 세계지리
Gary Fuller, T. M. Reddekopp 지음 / 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7
저자 이름이, 영어로 등록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신기하다.
……에헴.
186.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박은지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났는데, 혹은 계속 있어 왔지만 쭈욱 모르고 있던 것이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 새로움과 선명함이 100%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기를 바라는 건 욕심을 넘어 방해다. 저항을 택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으로(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옳다고 믿으며) 간다. 설득시키고 양보를 받아내는 것도, 아니면 힘으로 쟁취하는 것도, 잘 보면 어차피 모두 쟁취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쟁취가 목적이다. 무대에 올려놓고 싸우면 된다. 비난과 무시와 입막음도 극단적 전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 정말 전략으로 사용하려면 수준이 필요하다. 모든 비판에 ‘응 페미는 정신병’ 이렇게 한 줄 띡 달아놓고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당신은 그냥 모래알이다. 모래알을 몰고 다니는 진짜 파도들은 비판을 위해서 상대방의 체제를 공부한다. 당신이 서 있는 입장이 옳을 수 있다. 당신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정말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당신의 상대방에게 유효타를 먹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당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니라면,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냥 마우스 클릭질 몇 번과 마우스 휠 몇 번 드르륵 내린 게 전부라면, 그건 그리 폼나는 작업은 아니다. 직접, 직접 하자. 그리고 내가 지금 정확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침묵하자. 만사 거기서 시작이다.
--- 읽는 ---
산시로 / 나쓰메 소세키
희다 / 이향
세계 경제가 만만해지는 책 / 랜디 찰스 에핑
궁극의 리스트 / 움베르토 에코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 갖춘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장판’에서 푸코 읽기 / 박정수
가치의 모든 것 / 마리아나 마추카토
연년세세 / 황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