定礎

 

 

 

이제 와 멀리 갈 순 없을 것이다. 언감생심 그런 걸 바라기에 나는 너무 태만했고, 멍청했고, 심지어 속도 없었다. 차라리 그냥 어디도 가지 않았으면 싶다. 가만히 있고 싶다. 그렇게 산다.

 

그렇지만 인간은 숨만 쉬어도 녹슬고 바스라지는 연약한 구조물이다.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도대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샅샅이 뒤지고 바닥까지 훑어서 가진 것들의 짧은 목록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남루하겠으나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초석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에서 딱 한 뼘씩만 천천히 천천히 세상으로부터 훔쳐내는 것. 한 아름 바깥의 것들은 다 임자가 있으니 그대로 두고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듯이 나로부터 세상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걸까내 수준에 맞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나는 몰라서 불행해지는 걸까알고 싶었다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지웅살고 싶다는 농담


"자네는 젊으니까 자네 마음에 드는 삶일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긴 하지만근본적으로 내겐 마찬가지라고 했다그러자 사장은 삶의 변화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난 결코 삶을 바꾸지는 못하며어쨌거나 모든 삶이 똑같고지금의 내 삶이 조금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사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가 늘 빗나간 대답을 하고 야망이 없다면서그건 사업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했다사장의 불만을 사지 않는 게 더 좋았곗지만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 삶을 바꿀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알베르 카뮈이인


 

 

--- 읽은 ---

 


190. 궁극의 리스트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0

 

리스트의 리스트.

 

두려움, 욕망, 호승심, 숭배, 허영심,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사람을 책상 앞에 앉혀 목록을 적게 한다. 그런 감정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동안, 사람은 목록을 만든다. 사람은 목록을 만드는 동물이다.

 

저자의 나열은 대체로 독자에겐 의미 없는 정보의 과장된 홍수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독자는 열거된 목록을 건너뛴다. 어차피 그 목록을 모두 외울 수가 없어서, 독자에겐 나열은 그냥 거기 목록이 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나열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목록 뒤에 숨겨놓은 마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열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라가는 일에서 지겨움이 걷힌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이번에야말로 아우스터리츠를 똑바로 읽을 수 있게 되려나 보다.

 

 


 

191. 영어독서가 취미입니다

권대익 지음 / 반니라이프 / 2020

 

syo가 초등학교 다닐 때, 수학 시험은 답을 쓸 때 맞춤법이 틀려도 숫자만 맞으면 정답으로 인정하던 풍조가 있었다. 국어 시험도 아니고- 가 그 근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글러 먹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마인드로 이과생을 키우면 자신의 지식과 연구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어른이나 만들 뿐이다. 책도 그렇다. 영어독서를 권하는 책이니 그 내용만 알차게 채워 넣으면 그걸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맹자의 논어를 읽는 것보다 중학교 선생님이 자료를 정리해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더 좋아합니다.” 라고 써 놓으면, 저자가 논어는커녕 논어를 정리해 놓은 자료조차 똑바로 읽지 않았으면서 읽은 것처럼 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읽어나갈 동력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저자가 저런 실수를 했더라도,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런 거 잡아내는 일로 벌이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고 있었을까?

 

 

 

 

--- 읽는 ---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 마이 티 응우옌 킴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인티 차베즈 페레즈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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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4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5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24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금희 작가님이 제발트! 해서 읽고 싶었는데 아직 본 게 없어요. 토성의 고리 하나 갖춰놨어요. 저는 행복하지 않을 때 일기를 많이많이 썼는데(요즘엔 잘 안 씀...쓸 기력조차 없음...) 날이 추워져 그런가 syo님 요즘 많이 쓰시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yo 2020-10-25 15:51   좋아요 1 | URL
밖이 많이 춥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발트는 어렵고, 소설이 대한 내공이 좀 있는 독자나 ‘의식의 흐름‘류 소설을 쉽게 읽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한테 알맞는 책 같습니다. 제 독서가 망하고 있거든요 지금....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10   좋아요 0 | URL
그럼 제 독서도 망할 확률이 아주 높네요...일단은 꽂아만 두는 걸로....

syo 2020-10-25 16:17   좋아요 1 | URL
<아우스터리츠>가 유독 심하다는 평입니다. <토성의 고리>는 제가 안 읽어봤지만, 반님의 내공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니 한번 시도해보시죠. 시간 나실 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김연수도 겨우 읽은 쪼렙이라 이번 생 안에는 제발...제발트... ㅋㅋㅋㅋㅋ

syo 2020-10-26 18:19   좋아요 1 | URL
제발제발트 애매하다. 애매하게 웃었어요 ㅎㅎㅎ

추풍오장원 2020-10-2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 읽기 시작 책은 어떤지요? 제 마르크스 책은 입문서만 늘어가는 것 같군요...^^

syo 2020-10-25 15:50   좋아요 1 | URL
음, 말이 시작책이지 실제로는 아르네스트 만델이 자본 번역서에 서문 단 걸 모아놓은 책입니다. 서문이 보통 제일 마지막에 쓰인다고 하잖아요. 실제로 <자본>을 다 읽은 사람을 가정하고 쓴 글들이라 유익하고 깊이있지만 접근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 댓글에다가 이런 걸 써버리면 나중에 페이퍼에다 쓸말이 없어지는데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