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준다면
1
잠실까지는 10km, 한 길이었다. 나는 걷고 걸었다. 거대한 모델하우스와 신도시의 공공 분양 세대수가 적혀 있는 판넬을 지나쳐 또 걷고 걸었다. 책을 읽으며 걸어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저 걸었다. 뭔가를 한번에 하려다 뭐 하나 똑바로 해낸 적이 없다.
노란 잎을 뿌리는 가로수 아래로 청바지 입은 아가씨가 달려가는 길이기도 했고 졸린 눈을 한 아저씨가 구겨진 종이봉투를 들고 터덕터덕 걷는 길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을 몇 개쯤 세다가 잊어버렸다. 호수에는 손 맞잡은 사람들이 넘쳤다.
발에 자그맣게 물집이 잡혔다.
2
밤의 길이로 행복을 재볼 수 있다. 사랑이 있으면 밤이 짧고 이야기가 넘치면 밤이 모자란다.
3
잔을 넘친 이야기의 거품은 마술처럼 한 방향으로만 흘렀고,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자의 방향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작은 테이블 위에 수십 조각의 과거가 쌓이고 쌓인다.
밤새 만졌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은 내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 놓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때문에 늘 밤이 짧았다. 한번도 충분한 밤이 없었다. 봄에나 가을에나 부족했다. 하지에나 동지에나 아쉬웠다. 밤은 물처럼 녹고 땀은 꿀처럼 달고 모든 직유는 은유가 되고 몸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에게 이런 밤이 아직 잔뜩 남았다고? 놀라면서 잠이 들었고 눈 뜨면 있어서 마저 놀랐다. 오른손에는 사랑, 왼손에는 행복이라고 쓴 이름표를 들고 지금 이 순간에다 어느 쪽 이름표를 달아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 오른쪽에 누운 사람은 사랑스러웠고 왼쪽에 누운 사람은 행복했다.
4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공간은 연속체고, 그래서 젊음이 한 줌이라도 남은 이들은 영원히 아인슈타인을 숭배한다. 그 사람은 우리의 필요에 공식을 선사했다. 사랑에 올라탄 마음은 빛처럼 내달리고 그들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천천히 간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도 그 사람이다. 가끔은 그 모든 걸 덮는 이불 같은 게 있어서 그 안에 딱 두 사람만의 작고 어둡고 젖은 우주를 만들어 숨고 싶다. 돌아가지 못하도록 숨겨놓고 싶다. 진공 속의 진자처럼 손실 없는 진동을, 외력이 없는 공간의 등속직선운동처럼 영원히, 엔트로피 아래 우주처럼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흐트러지고 또 무한하게 흐트러진다면,
빨갛게 타오르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행은 어둠 속에서 벨라의 담배가 불꽃을 일으키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 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 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 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 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 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 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_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 당신네 남자들은 젊은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지요. 에로틱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줄 알고. 진짜 여자를 못 만나 그래요. 그건 정말 다르지요.
― 다르다.
그녀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 진짜 여자는 여기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곘는데요.
― 몰라요? 왜, 알 텐데.
잠시 후에 그녀가 말했다.
― 그래서, 오늘 와이프는 어디 있어요?
― 밴쿠버에 갔어요. 동생을 보러.
― 밴쿠버까지 갔군요.
― 예.
― 멀리 갔네요. 내가 그동안 배운 게 뭔지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지요.
_ 제임스 설터, 「스타의 눈」
--- 읽은 ---
192.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
마을에 피었던 능소화가 다 졌다. 절에 많이 심는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 큰 절은 담이 아니라 주차장으로 대로와 면해 있어서 꽃이 빈하다. 대신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꽃들이 알아서 웃자란다. 능소화도 있었다. 있어도 있는 줄 몰랐고 피어도 능소화인 줄을 몰랐다. 모르는 사이에 꽃이 다 졌다.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기회도 놓친 셈이다. 사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능소화도 모르고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는 삶도 삶이라고 오래 살았구나. 시구 앞에서 삶이 부끄러워질 일일까. 시인이 시집 말미에 넣어놓은 말이 이렇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 알면 아는 대로 / 모르면 모르는 대로” 꽃도 더 많이 보고 악기도 들여놓아야겠다. 다시 능소화가 피어오르면, 창가에서 연주할 것이다.
--- 읽는 ---
아무튼, 달리기 / 김상민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