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몸 살이의 경제학

 

 

 

1

 

목놓아 불러보았으나 개놈이는 돌아오지 않으려나 보다. 추운 겨울이 온다.

 

 

 

2

 

많이 놀았다. 연초, 한두 달 쯤 일을 하고 나니 올해는 아무래도 100권을 읽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의 절반을 더 넘기고 일을 관두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읽은 책이 200권이니, 과연 많이 놀았다. 때마침 읽기도 지쳤고 쓰기도 지루하니, 숨어볼까.

 

 

 

3

 

먹고 살 방편을 만들긴 만들어야 하니까.

 

 

 

4

 

이불 밖은 춥다. 돌돌 말고 있으면 꼭 내 한몸만 따뜻하다.

 

 

 

--- 읽은 ---

 


195. 그 후

나쓰메 소세키 지음 /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

 

인류 최초의 금기는 사랑과 관계있지 않을까. 사람이나 가축을 죽인다거나 곡식을 훔치는 것에 대한 처벌을 정하기 훨씬 전에 이미,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정하고 그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사람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내는 대적불가의 금기가 있었을 것이다. 수만 년의 세월을 들여 인간들은 그 금기가 품은 독기를 조금씩 빼 왔으나, 금지된 사랑은 아직도 무겁고 무섭다.

 

약하고 홀로 설 줄도 모르는 남자가 하필 가장 어려운 전장에서 세상과 맞선다.

 


 


196.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이미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

 

영화는 끝나지 않았고, 기록하고 회상할 만하지 않은 시간에도 최선을 다해 살아두는 것이 삶이라서 최선을 다해 버티고 견디는 사람들이 많다. 질투를 걷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카메라고, 삶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순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197.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도 있지만 말은 많아도 탈은 적은 것도 있는데, 아무래도 고대사가 그런 듯하다. 고대라서 그렇겠지. 4대 문명이 모두 한민족의 작품이라든가 신라가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든가 하는 참신하고 미친 소리도 있다는데, 설령 그렇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라고 그 난리인지.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날들을 투여해야 비로소 역사의 소중함을 몸으로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될까. 이 왕국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었고 저 왕의 업적은 또 어디까지 뻗쳤는가를 외우는 일에서 재미와 뿌듯함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유형의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삶이 더 희망찼을까.

 

고문서를 뒤적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장을 뛰어다니는, 범인의 눈에는 일견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는 역사가들의 그 지난한 노력들과 그 결과물을 담담히 서술하는 역사책이 이제는 쿨하고 좋은 것 같다. , 표지부터 쿨한 색깔.

 

 

 

 

198. 우리를 속이는 말들

박홍순 지음 / 웨일북 / 2020

 

듣자니 주식의 세계에는 작전세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판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이를 취한 후 다시 다음 판으로 움직인다.

 

인간이 언어의 도구임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확신한다. 엄마 아빠를 처음 발음하는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벌써 사람은 언어에 염색된 존재임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무색투명한 객관성과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조차 이미 하나의 언어적 족쇄라는 것을 모르고. 그건 정교하지 못해서 불공평한, 아니, 정교하게 불공평한 사회 구조로부터 필연적으로 유발되는 개인의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의 21세기형 변종이다. 언어는 반드시 인간을 휘두르고, 인간은 여지없이 언어에 조종된다. 오늘날, 생각이 언어를 만든다고 믿는 것은 뭐랄까, 최저시급을 받고 법정 근무시간을 아득히 초과하는 노동을 하느라 하루하루 연소 되고 깎여나가면서도,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헌법에 적혀 있으니까 내가 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믿고 내일도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기를 선택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 결과가 내게 바람직할 수는 있지만, 언어를 조작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더욱 바람직할 수 있다.

 


 

 

199.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인티 차베즈 페레즈 지음 / 이세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

 

확실한 동의와 안전을 확보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보라는 조언이다. 이를테면, 항문 자위를 통해 전립선을 건드려보면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그러니까 한 번 해 보라고 권하는 것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위치한 서술 같은 것. 방법과 준비요건(청결이 알파요 오메가! 손톱도 깎아라!)에 대한 설명도 늘 빼놓지 않는다. 섹스는 경쟁이나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말에 감동. 감동할 데가 아닌 지점에서 감동하는 나 자신에게 또 감동……. 앞으로의 섹스라이프는 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것인가.

 

, 독자로 남자 청소년만을 상정하고 있다. 청소년 책에도 꼼꼼하게 감동하는 귀요미 독서가 syo.

 



 

200. 연년세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

 

놀랍게도 그저 그랬다. 그가 그저 그렇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기본값이 있어서, syo에게 황정은은 아무리 그저 그래도 별 네 개 미만을 받을 수는 없는 사람이지만, 마찬가지로 기댓값도 있다 보니 별 반 개를 깎으면서 내 마음도 깎여나가는 기분. 차분하게 마음을 타고 넘는 문장들이 여전해서 안심하는 중.

 

 

 

--- 읽는 ---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 장석남

고전잡담 / 장희창

성가신 사랑 / 엘레나 페란테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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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0-3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쿠 골고루 많이도 읽으셨어요. 싸우자 세상! 모든 것을 시도해 보겠다! 패기가 넘치면서 이불도 돌돌 마는 글이네요.

syo 2020-11-01 15:24   좋아요 1 | URL
매일매일이 주말 같군요. 아무래도 패기보다는 이불이지만요.

반유행열반인 2020-10-3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나는 좋았는데... 전자책도 다시 샀는데... 거 몇 번 더 읽으면 좋지 않을까요. 파묘 두 번 읽으니 더 좋더라구요 저는.

syo 2020-11-01 15:23   좋아요 1 | URL
그럴까요? 자기 전에 읽은 거라 약간 태도가 불량했을 수도 있어. 목욕재계 후 경건한 마음으로 읽지 못하구....

블랙겟타 2020-10-3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과는 다르게 이불 안에서 뒹굴 거릴 수 있어서 저는 겨울이.. 좋아요 ㅋㅋㅋ

syo 2020-11-01 15: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이불 안에서 혼자 뒹굴거리는 것도 재밌지만, 그렇지만, 어휴, 뭐랄까,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llegoriker

 

 

 

영원히 바람 부는 벼랑에서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걸어 와서 커다란 나무의 드러난 뿌리 사이에 텐트를 쳤다. 벼랑에서 그가 하는 일은 바람에 맞서는 게 전부였다. 지구의 절반을 걷는 동안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그의 튼튼한 구두가 부는 바람에 다 낡아질 만큼 오랫동안 그는 벼랑에 섰고 수만 개의 석양을 세고 요동치는 지평선을 손끝으로 다듬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이 충분하고 넘쳐서 이제 사람들은 영원을 이야기할 때 벼랑과 바람과 벼랑에서 바람맞는 사내를 묶어서 말했다. 저기 저 벼랑 위에 서 있는 영원을 봐. 사람들은 어부가 등대를 마음에 들여놓듯 사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부가 등대에게 말을 걸지 않듯 누구도 사내의 안부를 묻거나 해진 구두를 고쳐주거나 텐트 입구에다 잔치 음식을 두거나 하지 않았다. 영원함에게 그러하듯, 사람들은 사내를 원하고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런 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무참한 말 속에 들어앉은 광막한 외로움을 보라.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저 혼자서 변하지 않고 모든 변하는 것들을 지켜보며 영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다. 나는 영원의 목을 조르기 위해 태어났는데, 어째서 오직 나만이 영원의 증거물일까. 풀리지 않는 역설을 영원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원의 마른 몸 위로 깎아지른 벼랑은 서고 바람이 그것을 끝없이 핥았다. 그리고 다시 영원의 절반그 역시 작은 영원일만큼 시간이 흘렀고 지구의 절반을 걸어 사내가 벼랑에 도착했던 것이다. 영원의 풍경에 등장하기 위해서, 영원함에 관한 알레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내는 낡지 않는 구두를 신고 와 여기에서 낡아가는 중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오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사내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영원히. 그 침묵 또한 하나의 영원일 것이다. 관심 어린 무관심. 사람들은 기어코 영원에 대한 관념을 완성했다. 영원에 대한 모든 지식이 낱낱이 밝혀져 한 문장으로 세상을 떠돈다. 영원한 건 없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단번에 영원의 모든 실체를 파악한 것처럼 굴며 온갖 형태로 그 소식을 변주하여 퍼뜨렸다. 나는 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떨어뜨린들, 그 권세가 영원할 것 같으냐. 쯧쯔, 영원한 사랑 같은 허황된 말이나 믿고 있으니 결국 그 꼴이 났지. 아이야, 너의 그 빛나는 아름다움 또한 한때일 뿐이고 너 역시 언젠가 나처럼 늙고 낡아 세상의 뒷면으로 조용히 숨어들어야 할 운명이란다. 영원을 둘러싼 값싸고 구하기 쉬운 명제들로 가득 찬 세상이 그렇게 혼잡하고 시끄러운 동안, 벼랑 위에서 사내는 낡아가는 구두처럼 조용히 어떤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이고 사내가 노을에 녹은 빛처럼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의 사라짐마저 영원에 대한 자신들의 낡은 관념을 영원히 타오르게 할 장작으로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잊힐 것이다. 영원의 개념에 포획된 모든 개체적 사건들이 지금껏 그러했듯이. 사내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는 밤이 많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조차 영원할 위험이 있었으니, 사내는 좁은 텐트 안에서도 길을 잃고 충분히 헤매었을 것이다.

 

그 사내를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기를. 자신만 속아 넘어가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말기를.

 

어쩌면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이 영원한 것이어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가는 선이 저녁으로 붉게 일렁이는 짧은 순간을 영영 바라보는 일 속에서, 그 일을 해내고 실패하며 일구는 시선의 뜨겁고 또 서늘한 교차로에서, 한 차례의 생 전체를 걸고 들리지 않는 우렁찬 소리를 기다리며 맨몸으로 시간의 늑골을 더듬는 길고 지난한 은유법 속에서, 우리는 빛을 타 넘고 우주를 살라먹는 찰나의 순간을 발견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부르고 설명하고 옆에 앉히고 싶은 마음에, 차마 영원이라는 말을 빌려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각자의 벼랑 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동시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세상을 영원에 대한 말들로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진심을 다해 유독하지는 않다. 영원을 믿지 않는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영원한 갈구를 숨겨 놓고, 아니라는 말이 적힌 종이를 뒤집어 아무도 몰래 혹시, 어쩌면, 이번만큼은, 다시 한번 더, 라고 써넣는다. 영원히 세어도 끝나지 않을 물음표를 적어넣는다. 사각사각, 희망이 마음의 표면을 스치는 소리, 섣부르고 위험하게 또 한번 몸을 던지는 소리, 세상을 침묵시킬 날카롭고 부드러운 소리, 지구의 절반을 걸어와 텐트를 치고 우리가 영원히 기다리는 소리가 있다.

 

 

 

 

--- 읽은 ---

 


194.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

 

인간과 사람이 다르듯, 공간과 장소가 다르다. 누군가에게 단지 공간일 뿐인 어떤 곳이 다른 누군가에겐 하나의 장소가 되고, 장소는 인간과 공명한다. 장소가 품은 기억은 인간을 연주하는 숙련된 손이고, 장소에 기록된 기억은 한 번 익힌 자전거 타기처럼 시간이 지나도 끝내 잊히지 않고 돌아온다. 물론 나 혼자 울고 나 혼자 아득해지면 그만이겠으나 그래도 그 마음을 전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언어라면, 아마 이야기는 이렇게 흐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 걸음으로 시내를, 예루살렘 가, 나이팅게일 가, 펠리칸 가, 파라디스 가, 임머젤 가, 그 밖의 많은 다른 거리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는지, 그리고 마침내 두통과 유쾌하지 않은 생각에 시달리며 중앙역 바로 옆, 아스트리트 광장에 면한 동물원으로 들어가 쉬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읽는 ---

연년세세 / 황정은

그 후 / 나쓰메 소세키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우리를 속이는 말들 / 박홍순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 이미화

맑스를 읽다 / 로베르트 쿠르츠

어른들의 거짓된 삶 / 엘레나 페란테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 정주영

 

 

--- 갖춘 ---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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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
사게 된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그런데 정작 그 작가는 그 책의 전부
는 아니고 일부만 읽었더라는.

인연은 그렇게 가 닿는가 봅니다.

syo 2020-10-31 14:15   좋아요 0 | URL
저는 <아우스터리츠>만 읽었습니다.
이걸 읽고 나니까 다른 걸 읽을 엄두가 안 나네요.
사실 이것도 다음에 한 번 더 제대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그 전에 벤야민이랄지, 르페브르랄지, 이런 책들을 좀 더 읽은 다음에....

반유행열반인 2020-10-29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놈아 너 말고...개놈이 어디갔어...

syo 2020-10-31 14:15   좋아요 1 | URL
개놈이가 죽은 건지, 아니면 올해 중2가 된 건지....

반유행열반인 2020-10-31 14:44   좋아요 1 | URL
회춘 ㅋㅋㅋ이십 살 젊어졌으면 이득이네요!!!

공쟝쟝 2020-10-29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개놈을 찾아서...

카알벨루치 2020-10-29 23:05   좋아요 1 | URL
푸하하하 개놈!!! 다덜 쇼군 중독증에 걸리신 듯 합니다 알라딘에 본좌엔 쇼군이...

syo 2020-10-31 14:15   좋아요 1 | URL
인간개놈프로젝트
 


아 진절머리 나는 진지함

 

 

 

1

 

요즘 읽는 것도 그렇지만, 쓰는 게 정말 예전 같지가 않아. , 괜찮은데. 아니야, 내가 우연히 2년 전 이맘때 쓴 글을 보게 됐거든? 근데 걔는 진짜 잘 쓰더라.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너가 참 대단하긴 했지. 그 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지금부터 3년쯤 열심히 쓰면 2년 전의 나만큼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웃기지 않냐? 2년 전의 내가 되기 위해 3년을……. 무슨 소리야. 너 아직 괜찮아. 아니야, 난 이제 틀린 것 같아. 총기를 완전히 잃었어……. , 글이 좀 무디다는 건, 그만큼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건 좋은 거잖아. 거 봐, 너도 결국 지금 내 글이 후지긴 후지다는 거잖아……. 아니, 후지다는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안 후지면 내가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겠니? 너 대체 지금까지 내 말을 듣긴 들은 거야? 아놔, 후지다고 해도 지랄, 아니라고 해도 지랄,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니가 어떡해야 될지까지 내가 가르쳐 줘야 되겠니? 너는 생각이라는 걸 해볼 생각이 없어? ……,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너란 남자. 정답.

 

오늘의 주제는 이족보행 하는 진절머리, syo입니다.

 

 

 

2

 

요즘 읽는 것도 그렇지만, 쓰는 게 정말 예전 같지가 않다. 괜찮다는 말은 넣어두시길. 진절머리 나는 수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2년 전의 syo가 대단하긴 했다. 2017년 돌연 혜성같이 나타나 신인상(없다)을 거머쥐더니, 2018년은 아주 찢어놓았드랬다(마음이 찢어진다). 혹자는 syo()알라딘에서 심어놓은 쁘락치일 거라고 의심했고 심지어 신형 AI일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정체는 사실 알라딘이라는 작은 생태계의 꼬마 요정이었다고 합니다. .


 

내 이놈의 요정질을 관두든가 해야지


 

 

그렇다면 이미지를 위해 정보와 사실을 조합하고 조작하는 조직된 거짓말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아렌트는 거짓말쟁이가 성공하면 할수록 자기 거짓말에 희생될 공산이 크다고 말한다더 많은 사람이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기만해야 한다.

이진우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3

 

2년 전의 syo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 속에 숨겨 놓은 너무도 많은 나였다. 그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두 놈이 번갈아 나타나 글을 쓰곤 했다. 하나는 개그병 걸린 놈(개놈이)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2병 걸린 놈(중놈이)이었다. 특히 서재친구들은 개놈이를 아껴주었는데, 걔는 마음만 먹으면 그냥 도서관에 정자세로 앉아 논어필사하시는 할아버지를 가지고도 남들 배꼽을 훔칠 줄 아는 미친 녀석이었다. 모른 척하지 마세요. 님 배꼽 이야기라니까요(무리수). , , 지금 슬쩍 배꼽 확인해보네(무리수대폭발)?


 

우리는 어쩌면 인지부조화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살다 보면 부끄러워 되돌리고 싶은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부끄러운 과거 한때를 합리화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내 이상한 행동에 합당한 각주를 계속 달아야 한다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랬지그래그게 맞아!' 하다하다 갖다 붙일 이유가 떨어지면 이젠 기억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아니야그때 받은 과일바구니에는 분명 과일밖에 없었어.‘

박주영어떤 양형 이유

 

 

 

4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개놈이와 중놈이를 번갈아 가며 등장시키는 일이 너무도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이제 짬 좀 찼으니 내 안에서 샘솟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도 되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착각이 뇌 속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한 것이다. 그래, 나는 나야. 내가 바로 2018 알라딘 쓰나미 syo! 으르렁…….

 

그랬더니 사는게 칙칙해서 그런가, 언제부턴가 개놈이는 사라지고 중놈이만 남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놈이 걔도 참 걔인 게, 그냥 하던대로 대충 할 것이지 개놈이의 빈자리를 채워보겠다고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아아, 그거 하지 말지. 중놈이가 그렇게 중중놈이로 진화하고, 그 마당에 갑자기 인생이 주정뱅이 스텝처럼 이리저리 꼬이기 시작하면서 중중놈이가 중중중놈이로 메가진화하고…… , 정신을 차려보니 syo의 서재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잿빛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syo의 서재에는 이제 개그라고는 온데간데없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팩트 폭풍과 반박이 불가능한 논리, 치열한 사변과 심금을 울리는 감수성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무색무취하고 무미건조하며 농담 따윈 1mg도 함유되어 있지 않은 철저한 과학적 페이퍼만이 올라오게 된 것이다. 바로 지금 이 페이퍼처럼. , 정말 나도 내가 너무 객관적이어서 진절머리가 난다. 농담 하는 법을 까먹었어.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오래된 약점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존 윌리엄스스토너

 

 

 

5

 

개놈아 이제 그만 돌아와 줘. 그때 우리 참 좋았잖아…….

 



가끔 길을 걷다가 저 멀리 보석이나 꽃 같은 물체가 있는 것을 보지만 몇 걸음 더 다가가서 보면 그냥 쓰레기일 때가 있다하지만 그 물체도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아름다워 보인다.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 읽은 ---

 


193. 아무튼, 달리기

김상민 지음 / 위고 / 2020

 

세상에서 제일 진부하고 식상한 것이 바로 잘 쓰고 잘 뛰다보니 마라톤도 자꾸 완주하는 작가 캐릭터다.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 그리고 이제는 김상민……. 지겹다 지겨워. 화가 다 난다. 지겨워서 화를 내는 것이다. 질투하는 게 결코 아니다.

 

……아,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 읽는 ---

연년세세 / 황정은

그 후 / 나쓰메 소세키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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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0-2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놈아 돌아와 222... 어 저기 진절머리 내면서 기어오고 있다...빨리 안 튀어 오냐...
남 웃기는 글이 제일 어렵지요 ㅎㅎㅎ

syo 2020-10-27 12:22   좋아요 1 | URL
남 웃기는 건 부수적인 거고, 나는 나를 웃기고 싶어요.... 나야 너 좀 재밌다? 이러고 싶다.

han22598 2020-10-2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노의 포도 알갱이가 꼬마요정었다니 ㅋ

syo 2020-10-27 12:23   좋아요 0 | URL
빨갛고 동그란 얼굴 속에 감춰놓은 정체성....

희선 2020-10-27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예전 제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읽고 자꾸 쓰다보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쓰지만 나아지기보다 더 안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쓴 글을 보고 정말 내가 쓴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사람은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요 좋아지든 안 좋아지든 앞으로 갔다 조금 뒤로 갔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겠지요


희선

syo 2020-10-27 12:24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 사실은 좋아지든 안 좋아지든 앞으로 갔다 조금 뒤로 갔다 그러면서 뒤로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일이네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로 2020-10-27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노의 포도 알갱이가 꼬마요정었다니 ㅋ2

내 댓글을 빼앗긴 것 같은!!!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그런데 너는 왜 웃고 있는 건데? 개놈이도 중놈이도 아니면서...버럭)

syo 2020-10-27 12: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요밍아웃했다

다락방 2020-10-27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았는데요. 2017년.. 쇼님이 혜성처럼 등장해 각종 신인상을 휩쓸고 알라딘을 평정하기 시작하던 그 때...

syo 2020-10-27 12:26   좋아요 0 | URL
그때 꼭대기 찍고 이제는 내리막이지.....
젊은이들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돌아서는 늙은 요정이에요!

공쟝쟝 2020-10-2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잉 저 요정은 웨딩피치???? 어디서 마니 봣는데 ㅋㅋㅋ

syo 2020-10-31 14:16   좋아요 0 | URL
저거 아마 디지몬일걸요? ㅋㅋㅋㅋㅋ 저도 네이버에 ˝꼬마요정˝ 검색해서 찾은거라 ㅋㅋㅋㅋㅋㅋㅋ
이럴 땐 일본문화 전문가인 ㅂㄹㄱㅌ님이 등판해야 하는 건데, 그 분은 요즘 통 뭐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네요.
 


있어준다면

 

 

 

1

 

잠실까지는 10km, 한 길이었다. 나는 걷고 걸었다. 거대한 모델하우스와 신도시의 공공 분양 세대수가 적혀 있는 판넬을 지나쳐 또 걷고 걸었다. 책을 읽으며 걸어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저 걸었다. 뭔가를 한번에 하려다 뭐 하나 똑바로 해낸 적이 없다.

 

노란 잎을 뿌리는 가로수 아래로 청바지 입은 아가씨가 달려가는 길이기도 했고 졸린 눈을 한 아저씨가 구겨진 종이봉투를 들고 터덕터덕 걷는 길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을 몇 개쯤 세다가 잊어버렸다. 호수에는 손 맞잡은 사람들이 넘쳤다.

 

발에 자그맣게 물집이 잡혔다.

 

 

 

2

 

밤의 길이로 행복을 재볼 수 있다. 사랑이 있으면 밤이 짧고 이야기가 넘치면 밤이 모자란다.

 

 

 

3

 

잔을 넘친 이야기의 거품은 마술처럼 한 방향으로만 흘렀고,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자의 방향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작은 테이블 위에 수십 조각의 과거가 쌓이고 쌓인다.

 

밤새 만졌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은 내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 놓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때문에 늘 밤이 짧았다. 한번도 충분한 밤이 없었다. 봄에나 가을에나 부족했다. 하지에나 동지에나 아쉬웠다. 밤은 물처럼 녹고 땀은 꿀처럼 달고 모든 직유는 은유가 되고 몸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에게 이런 밤이 아직 잔뜩 남았다고? 놀라면서 잠이 들었고 눈 뜨면 있어서 마저 놀랐다. 오른손에는 사랑, 왼손에는 행복이라고 쓴 이름표를 들고 지금 이 순간에다 어느 쪽 이름표를 달아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 오른쪽에 누운 사람은 사랑스러웠고 왼쪽에 누운 사람은 행복했다.

 

 

 

4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공간은 연속체고, 그래서 젊음이 한 줌이라도 남은 이들은 영원히 아인슈타인을 숭배한다. 그 사람은 우리의 필요에 공식을 선사했다. 사랑에 올라탄 마음은 빛처럼 내달리고 그들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천천히 간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도 그 사람이다. 가끔은 그 모든 걸 덮는 이불 같은 게 있어서 그 안에 딱 두 사람만의 작고 어둡고 젖은 우주를 만들어 숨고 싶다. 돌아가지 못하도록 숨겨놓고 싶다. 진공 속의 진자처럼 손실 없는 진동을, 외력이 없는 공간의 등속직선운동처럼 영원히, 엔트로피 아래 우주처럼 어지럽고 무질서하게 흐트러지고 또 무한하게 흐트러진다면,

 


 

 

빨갛게 타오르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행은 어둠 속에서 벨라의 담배가 불꽃을 일으키던 것을 기억했다그리고 기행은 지난가을옥심과 함께 바라보던 불을 떠올렸다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집으로 번지던 불문짝을 태우고 기둥을 태우고 지붕을 태우던 불그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게 불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처음에는 바이러스와 병원균이 불타겠지만곧 그 불은 종파주의와 낡은 사상으로 옮겨붙을 것이고종내에는 서너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이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고 짠물 냄새 나는 바닷가를 홀로 걸어가도 좋을 밤이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타오를 것이다그렇게 한번 불타고 나면불타기 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이제우리 모두는.

김연수일곱 해의 마지막

 

― 당신네 남자들은 젊은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지요에로틱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줄 알고진짜 여자를 못 만나 그래요그건 정말 다르지요.

― 다르다.

그녀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 진짜 여자는 여기 있어요그녀가 말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곘는데요.

― 몰라요알 텐데.

잠시 후에 그녀가 말했다.

― 그래서오늘 와이프는 어디 있어요?

― 밴쿠버에 갔어요동생을 보러.

― 밴쿠버까지 갔군요.

― .

― 멀리 갔네요내가 그동안 배운 게 뭔지 알아요그녀가 말했다.

―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지요.

제임스 설터스타의 눈


  

 

 

--- 읽은 ---


 

192.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

 

마을에 피었던 능소화가 다 졌다. 절에 많이 심는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 큰 절은 담이 아니라 주차장으로 대로와 면해 있어서 꽃이 빈하다. 대신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꽃들이 알아서 웃자란다. 능소화도 있었다. 있어도 있는 줄 몰랐고 피어도 능소화인 줄을 몰랐다. 모르는 사이에 꽃이 다 졌다.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기회도 놓친 셈이다. 사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능소화도 모르고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는 삶도 삶이라고 오래 살았구나. 시구 앞에서 삶이 부끄러워질 일일까. 시인이 시집 말미에 넣어놓은 말이 이렇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 알면 아는 대로 / 모르면 모르는 대로꽃도 더 많이 보고 악기도 들여놓아야겠다. 다시 능소화가 피어오르면, 창가에서 연주할 것이다.

 

 

 

--- 읽는 ---

아무튼, 달리기 / 김상민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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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0-25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작가 소설 읽고 있는데요. 쇼님은 일곱해의 마지막 잘 읽히시나요? 저는 되게 더디게 읽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네요.

syo 2020-10-25 16:03   좋아요 2 | URL
네. 잘 읽히던데요?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07   좋아요 1 | URL
나도나도 백만년 만에 김연수 볼까 했어요ㅋㅋㅋ 집에 있는거 볼까 했더니 일곱해의 마지막 도서관 신간 들어와서 빌릴까 말까 하다가 졸려서 낮잠을
자야겠다...

syo 2020-10-25 16:09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책은 어디가지 않고 있으니 잠이 달아나기 전에 걔부터 붙드시길^-^

나비종 2020-10-2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와닿았던 표현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자의 방향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시간이 필요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필요에 공식을 선사했다, 진공 속의 진자처럼 손실 없는 진동을, 외력이 없는 공간의 등속직선운동처럼‘

(공감한 인용 문구)
정말 함께 있고 싶은 사람하고는 함께 있지 않게 된다는 거.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지요.

(4번 단락) 너무 좋아 몇 번을 읽어봅니다.
다만, 저는 ‘젖은‘ 우주 말고 ‘포근한‘ 우주를~

아까 가로수가 가린 햇살을 바라보고 걸으며 ‘세상에 나의 영혼과 공명하는 영혼을 가진 이가 한 명만 있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죠.

제목이 다했네요. 촌철살인의 포스가..^^

syo 2020-10-26 18:16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까지 정리정돈된 칭찬을 해주신다구요? ㅎㅎㅎㅎ
나비종님의 꼼꼼함에는 정말 못당하겠네요^_^

포근한 우주도 정말 좋겠네요. 포근한 우주를 만드시길. 후에 거긴 어떤지 이야기해주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10-2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기 좋은 하루였습다.
전 구리 동구릉 8킬로 걸었습니다.
가을 가기 전 강추 드립니다.
가시면 깜짝 놀라실거예요. ^^

syo 2020-10-26 18:17   좋아요 0 | URL
요즘처럼 기온이며 햇살이며가 걷기에 좋은 시간이 일 년 중에 그리 길지 않겠지요.
조금만 더 지나도 걷기에 너무 춥다싶겠죠?
북다님께서도 많이 걸어두시기를^-^

2020-10-25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6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定礎

 

 

 

이제 와 멀리 갈 순 없을 것이다. 언감생심 그런 걸 바라기에 나는 너무 태만했고, 멍청했고, 심지어 속도 없었다. 차라리 그냥 어디도 가지 않았으면 싶다. 가만히 있고 싶다. 그렇게 산다.

 

그렇지만 인간은 숨만 쉬어도 녹슬고 바스라지는 연약한 구조물이다.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도대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진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샅샅이 뒤지고 바닥까지 훑어서 가진 것들의 짧은 목록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남루하겠으나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초석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에서 딱 한 뼘씩만 천천히 천천히 세상으로부터 훔쳐내는 것. 한 아름 바깥의 것들은 다 임자가 있으니 그대로 두고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듯이 나로부터 세상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걸까내 수준에 맞는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나는 몰라서 불행해지는 걸까알고 싶었다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지웅살고 싶다는 농담


"자네는 젊으니까 자네 마음에 드는 삶일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긴 하지만근본적으로 내겐 마찬가지라고 했다그러자 사장은 삶의 변화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난 결코 삶을 바꾸지는 못하며어쨌거나 모든 삶이 똑같고지금의 내 삶이 조금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사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가 늘 빗나간 대답을 하고 야망이 없다면서그건 사업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했다사장의 불만을 사지 않는 게 더 좋았곗지만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 삶을 바꿀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알베르 카뮈이인


 

 

--- 읽은 ---

 


190. 궁극의 리스트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0

 

리스트의 리스트.

 

두려움, 욕망, 호승심, 숭배, 허영심,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사람을 책상 앞에 앉혀 목록을 적게 한다. 그런 감정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동안, 사람은 목록을 만든다. 사람은 목록을 만드는 동물이다.

 

저자의 나열은 대체로 독자에겐 의미 없는 정보의 과장된 홍수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독자는 열거된 목록을 건너뛴다. 어차피 그 목록을 모두 외울 수가 없어서, 독자에겐 나열은 그냥 거기 목록이 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나열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목록 뒤에 숨겨놓은 마음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열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라가는 일에서 지겨움이 걷힌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이번에야말로 아우스터리츠를 똑바로 읽을 수 있게 되려나 보다.

 

 


 

191. 영어독서가 취미입니다

권대익 지음 / 반니라이프 / 2020

 

syo가 초등학교 다닐 때, 수학 시험은 답을 쓸 때 맞춤법이 틀려도 숫자만 맞으면 정답으로 인정하던 풍조가 있었다. 국어 시험도 아니고- 가 그 근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글러 먹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마인드로 이과생을 키우면 자신의 지식과 연구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어른이나 만들 뿐이다. 책도 그렇다. 영어독서를 권하는 책이니 그 내용만 알차게 채워 넣으면 그걸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맹자의 논어를 읽는 것보다 중학교 선생님이 자료를 정리해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더 좋아합니다.” 라고 써 놓으면, 저자가 논어는커녕 논어를 정리해 놓은 자료조차 똑바로 읽지 않았으면서 읽은 것처럼 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읽어나갈 동력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저자가 저런 실수를 했더라도,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런 거 잡아내는 일로 벌이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하고 있었을까?

 

 

 

 

--- 읽는 ---

아우스터리츠 / W. G. 제발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 마이 티 응우옌 킴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인티 차베즈 페레즈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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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4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5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24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금희 작가님이 제발트! 해서 읽고 싶었는데 아직 본 게 없어요. 토성의 고리 하나 갖춰놨어요. 저는 행복하지 않을 때 일기를 많이많이 썼는데(요즘엔 잘 안 씀...쓸 기력조차 없음...) 날이 추워져 그런가 syo님 요즘 많이 쓰시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yo 2020-10-25 15:51   좋아요 1 | URL
밖이 많이 춥네요. 건강하고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발트는 어렵고, 소설이 대한 내공이 좀 있는 독자나 ‘의식의 흐름‘류 소설을 쉽게 읽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한테 알맞는 책 같습니다. 제 독서가 망하고 있거든요 지금....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10   좋아요 0 | URL
그럼 제 독서도 망할 확률이 아주 높네요...일단은 꽂아만 두는 걸로....

syo 2020-10-25 16:17   좋아요 1 | URL
<아우스터리츠>가 유독 심하다는 평입니다. <토성의 고리>는 제가 안 읽어봤지만, 반님의 내공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니 한번 시도해보시죠. 시간 나실 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0-25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김연수도 겨우 읽은 쪼렙이라 이번 생 안에는 제발...제발트... ㅋㅋㅋㅋㅋ

syo 2020-10-26 18:19   좋아요 1 | URL
제발제발트 애매하다. 애매하게 웃었어요 ㅎㅎㅎ

추풍오장원 2020-10-2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 읽기 시작 책은 어떤지요? 제 마르크스 책은 입문서만 늘어가는 것 같군요...^^

syo 2020-10-25 15:50   좋아요 1 | URL
음, 말이 시작책이지 실제로는 아르네스트 만델이 자본 번역서에 서문 단 걸 모아놓은 책입니다. 서문이 보통 제일 마지막에 쓰인다고 하잖아요. 실제로 <자본>을 다 읽은 사람을 가정하고 쓴 글들이라 유익하고 깊이있지만 접근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 댓글에다가 이런 걸 써버리면 나중에 페이퍼에다 쓸말이 없어지는데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