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goriker
영원히 바람 부는 벼랑에서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걸어 와서 커다란 나무의 드러난 뿌리 사이에 텐트를 쳤다. 벼랑에서 그가 하는 일은 바람에 맞서는 게 전부였다. 지구의 절반을 걷는 동안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그의 튼튼한 구두가 부는 바람에 다 낡아질 만큼 오랫동안 그는 벼랑에 섰고 수만 개의 석양을 세고 요동치는 지평선을 손끝으로 다듬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이 충분하고 넘쳐서 이제 사람들은 영원을 이야기할 때 벼랑과 바람과 벼랑에서 바람맞는 사내를 묶어서 말했다. 저기 저 벼랑 위에 서 있는 영원을 봐. 사람들은 어부가 등대를 마음에 들여놓듯 사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부가 등대에게 말을 걸지 않듯 누구도 사내의 안부를 묻거나 해진 구두를 고쳐주거나 텐트 입구에다 잔치 음식을 두거나 하지 않았다. 영원함에게 그러하듯, 사람들은 사내를 원하고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런 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무참한 말 속에 들어앉은 광막한 외로움을 보라.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저 혼자서 변하지 않고 모든 변하는 것들을 지켜보며 영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다. 나는 영원의 목을 조르기 위해 태어났는데, 어째서 오직 나만이 영원의 증거물일까. 풀리지 않는 역설을 영원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원의 마른 몸 위로 깎아지른 벼랑은 서고 바람이 그것을 끝없이 핥았다. 그리고 다시 영원의 절반―그 역시 작은 영원일―만큼 시간이 흘렀고 지구의 절반을 걸어 사내가 벼랑에 도착했던 것이다. 영원의 풍경에 등장하기 위해서, 영원함에 관한 알레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내는 낡지 않는 구두를 신고 와 여기에서 낡아가는 중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오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사내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영원히. 그 침묵 또한 하나의 영원일 것이다. 관심 어린 무관심. 사람들은 기어코 영원에 대한 관념을 완성했다. 영원에 대한 모든 지식이 낱낱이 밝혀져 한 문장으로 세상을 떠돈다. 영원한 건 없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단번에 영원의 모든 실체를 파악한 것처럼 굴며 온갖 형태로 그 소식을 변주하여 퍼뜨렸다. 나는 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떨어뜨린들, 그 권세가 영원할 것 같으냐. 쯧쯔, 영원한 사랑 같은 허황된 말이나 믿고 있으니 결국 그 꼴이 났지. 아이야, 너의 그 빛나는 아름다움 또한 한때일 뿐이고 너 역시 언젠가 나처럼 늙고 낡아 세상의 뒷면으로 조용히 숨어들어야 할 운명이란다. 영원을 둘러싼 값싸고 구하기 쉬운 명제들로 가득 찬 세상이 그렇게 혼잡하고 시끄러운 동안, 벼랑 위에서 사내는 낡아가는 구두처럼 조용히 어떤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이고 사내가 노을에 녹은 빛처럼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의 사라짐마저 영원에 대한 자신들의 낡은 관념을 영원히 타오르게 할 장작으로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잊힐 것이다. 영원의 개념에 포획된 모든 개체적 사건들이 지금껏 그러했듯이. 사내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는 밤이 많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조차 영원할 위험이 있었으니, 사내는 좁은 텐트 안에서도 길을 잃고 충분히 헤매었을 것이다.
그 사내를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기를. 자신만 속아 넘어가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말기를.
어쩌면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이 영원한 것이어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가는 선이 저녁으로 붉게 일렁이는 짧은 순간을 영영 바라보는 일 속에서, 그 일을 해내고 실패하며 일구는 시선의 뜨겁고 또 서늘한 교차로에서, 한 차례의 생 전체를 걸고 들리지 않는 우렁찬 소리를 기다리며 맨몸으로 시간의 늑골을 더듬는 길고 지난한 은유법 속에서, 우리는 빛을 타 넘고 우주를 살라먹는 찰나의 순간을 발견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부르고 설명하고 옆에 앉히고 싶은 마음에, 차마 영원이라는 말을 빌려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각자의 벼랑 위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동시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세상을 영원에 대한 말들로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진심을 다해 유독하지는 않다. 영원을 믿지 않는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영원한 갈구를 숨겨 놓고, 아니라는 말이 적힌 종이를 뒤집어 아무도 몰래 혹시, 어쩌면, 이번만큼은, 다시 한번 더, 라고 써넣는다. 영원히 세어도 끝나지 않을 물음표를 적어넣는다. 사각사각, 희망이 마음의 표면을 스치는 소리, 섣부르고 위험하게 또 한번 몸을 던지는 소리, 세상을 침묵시킬 날카롭고 부드러운 소리, 지구의 절반을 걸어와 텐트를 치고 우리가 영원히 기다리는 소리가 있다.
--- 읽은 ---
194.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
인간과 사람이 다르듯, 공간과 장소가 다르다. 누군가에게 단지 공간일 뿐인 어떤 곳이 다른 누군가에겐 하나의 장소가 되고, 장소는 인간과 공명한다. 장소가 품은 기억은 인간을 연주하는 숙련된 손이고, 장소에 기록된 기억은 한 번 익힌 자전거 타기처럼 시간이 지나도 끝내 잊히지 않고 돌아온다. 물론 나 혼자 울고 나 혼자 아득해지면 그만이겠으나 그래도 그 마음을 전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언어라면, 아마 이야기는 이렇게 흐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 걸음으로 시내를, 예루살렘 가, 나이팅게일 가, 펠리칸 가, 파라디스 가, 임머젤 가, 그 밖의 많은 다른 거리와 골목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는지, 그리고 마침내 두통과 유쾌하지 않은 생각에 시달리며 중앙역 바로 옆, 아스트리트 광장에 면한 동물원으로 들어가 쉬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읽는 ---
연년세세 / 황정은
그 후 / 나쓰메 소세키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우리를 속이는 말들 / 박홍순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 이미화
맑스를 읽다 / 로베르트 쿠르츠
어른들의 거짓된 삶 / 엘레나 페란테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 정주영
--- 갖춘 ---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