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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몫
장성욱 지음 / 득수 / 2024년 10월
평점 :
함무라비가 포박당한 지점으로부터 질문 네 개의 거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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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조의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는 태양의 신 사마쉬의 뜻을 받아(-ㅆ다고 주장하며) 법전을 하나 만들었는데, ‘눈눈이이’로 유명한 바로 그 함무라비 법전이다. 칼춤이 국민체조고 유혈 낭자가 세계적 트렌드였던 당시 기준으로 보면 내 눈 뽑은 놈이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고 눈 뽑기까지는 가능하다-는 식의 아주 온건하고 자애로운 법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와, 눈 뽑혔다고 눈을 뽑냐 잔인하다 그야말로 야만의 법 명불허전 18세ㄱ기- 하는 대접을 받게 된 것을 보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다소 못 미더운 구석은 있지만 그래도 발전이라는 것을 하긴 한다 싶다. 그럼에도 가끔 그 18세기 양식의 구법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인간이 발전하면서 죄의 형상과 질량도 같이 발전했기 때문이겠다.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자주 하셨던 그 말, “아오 저 새끼 저거 저거 지도 똑같이 당해 봐야 되는데 아오”는 그야말로 그윽한 울림이 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불법이 국민체조고 인면수심이 세계적 트렌드가 아닐까 싶은 다종다양한 죄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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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종다양한 죄 가운데 특수하기로 치면 맨 앞에 세우기에 모자람 없는 죄가 학폭이다. 피해자가 미성년이라는 점에서, 가해자 역시 미성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게 원초적이면서도 실상 대부분 고도화된 경제사회적 계급 구도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가해자와 피해자 이외에 방관자라는 포지션을 반드시 수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기다 학폭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함무라비식 단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학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범죄인 동시에, 학교라는 배경이 가지는 시공간적 제한을 함께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어도 “아오 저 새끼 똑같이”를 시전하면서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폭은 대체 어떻게 단죄해야 눈눈이이에 필적하는 감정의 정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소설 『기억의 몫』이 syo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학폭 피해자이자 은퇴한 세계적 프로게이머 박선용은 가해자 임영빈을 단죄하기로 결정했다. 사법체계가 아니라 피해자가 실행하며, 이미 눈눈이이가 불가능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단죄라면, 그 형태는 어떠할 것이며 또 피해자의 마음을 얼마만큼 눅일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읍읍읍…. –스포일러-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네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묻는다. 질린다는 표정을 보자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불꽃이 다가온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한다. 불꽃이 팔에 닿는다. 그와 동시에 기억들이 뜨거운 송곳처럼 머릿속을 마구 찔러낸다.
너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너와 함께였는지.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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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흥미를 잡아끄는 부분은, 가해자 임영빈의 신상이 공개된 후 세상의 반응이다. 임영빈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은 임영빈을 비난하거나 멸시하거나 멀리하거나 괴롭힘을 가하는데,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저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스스로의 행동을 정의구현의 일환으로 여긴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각 인물들의 관점에서 내면을 서술하여 독자에게 보여주는데, 사실 그들을 정의구현으로 이끄는 진짜 이유는 각자가 임영빈에게 가지는 질투나 열등감, 자신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예측 등의 개인적/계산적/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을 독자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의는 일종의 악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단죄가 정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악의는 ‘정의로운 악의’가 되고, 그로 인해 임영빈에게 벌어지는 사회적 단죄는 ‘악의로운 정의’로 귀결된다. 여기에 두 번째 질문의 좌표가 찍힌다. ‘정의로운 악의’와 ‘악의로운 정의’는 결국 정의인가, 악의인가?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가피한가, 불가피한가? 이 세상이 ‘정의로운 정의’와 ‘악의로운 악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내가 정의라고 믿어온 것들 뒤에 숨어 있는 악의와, 내가 악의라고 여겨온 것들이 수반하는 정의를 인식하는 일로 오롯이 이어지는가?
이딴 사이코패스 새끼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다니 믿을 수 있음? 게시물의 마지막에 적힌 글이었다. 작성자의 말이 맞다,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어쩌면 이것이 신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이 아닐까? 당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비겁한 방식. 전면에 나서는 건 무서웠다. 그보다는 가벼운 경고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때마침 책상 구석에 있는 형광색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태준은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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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이름을 빌려준 어떤 독자는, (평소에 활자라고는 웹툰 속에 들어있는 것들 말고는 읽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사용된 이 소설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은 후 감상평의 운을 이렇게 뗐다. “와 근데, 가해자 그 새끼는 지가 그랬던 걸 진짜 어떻게 잊지?” 이것은 매우 중대한 질문이다. 저 독자는 평소 syo에게 “그랬던” 크고 작은 수많은 것들을 완전히 잊었으며, 따라서 똑같은 짓거리를 무수히 반복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재작년 수능에 수필 지문으로 출제되어 수많은 수험생들을 대환장 순환버스에 태우고 재수 삼수 n수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유한준의 『망해忘解』라는 작품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너는 네가 잊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무릇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네가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무릇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되고,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왜일까? 그것은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무릇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해 두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 말이 옳을까?”
……네?
잊고 잊지 않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라 수없이 많은 청춘의 1년을 앗아가기도 한다. 요는, 잊어야 할 것을 잊는 것은 병이 아니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것은 병이라는 이야기.
다시 어떤 독자의 말로 돌아가서, 우리는 잊은 것들을 잊었기 때문에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곤 한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내가 지금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그 사실을 나만 빼고 다 알 수도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실 굉장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세 번째 질문은 이렇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맞는가?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나라는 아집에 묶여, 도리어 내가 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모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을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우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연기를 길게 뱉어낸 임영빈이 불타고 있는 담배 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는 걸까?
“정말 제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임영빈이 중얼거렸다. 담배를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민우의 말에 임영빈이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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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와서는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이 질문은 필수적 부사어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네 번째 질문이 되지 못한다. 형용사 ‘중요하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누구에게’ 중요한가이다. 가해자 영빈이나 피해자 박선용의 조력자인 민우에게 중요한 것과 박선용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데에서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소설의 제목이 『“학폭”의 대가』가 아니라 『“기억”의 몫』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은 것이 잊은 개인의 문제라면, 누군가에게는 되고/안 되고의 영역에서 구분되는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있고/없고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 비극인 것이다. 피해자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가해자에게는 한낱 ‘잊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사건이 윤리적 시각에서 ‘잊어도 되는’ 사건인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고 만다. 그 순간, 가해자가 잊지 않았다면 가졌을 수도 있었을 일말의 죄책감이나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같은, 그러니까 가해자 몫이었을 모든 고통의 가능성들이 일거에 모습과 방향을 바꾸어 피해자를 충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망각”의 대가』나 『“망각”의 몫』이 아니라 『“기억”의 몫』인 이유다.
학폭과 망각 중 어느 것이 더욱 끔찍한 죄인가? 이 질문은 질문 자체보다 누구의 시각으로 대답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 해답의 심연을 들여다 보다 기어이 심연이 되어 버린 피해자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의 위치인 동시에 존재감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도 소거되지 않을 것이다.
“부탁이 있어. 거짓말로라도 다시 기억이 났다고 말해줄래?”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