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딸콤플렉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착한 딸 콤플렉스 - 착해서 고달픈 딸들을 위한 위로의 심리학
하인즈 피터 로어 지음, 장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통하여 외래어 표기법상 ‘컴플렉스’가 아니라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더욱 정확히 알게 되었다. naver 사전에는 ‘콤플렉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 융은 언어 연상 시험을 통하여 특정 단어에 대한 피검자의 반응 시간 지연, 연상 불능, 부자연스러운 연상 내용 따위가 이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열등감’, ‘욕구 불만’, ‘강박 관념’으로 순화
사전을 통해 알아본 ‘콤플렉스’는 그 개념을 더욱 피상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동안 매체를 통하여 알게 된 콤플렉스가 한 둘이 아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슈퍼우먼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 등등. 이름 지워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무수한 콤플렉스들이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조금씩은 존재할 열등감들이 이름을 얻자마자 마구마구 부풀려지게 되었다.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할 때만 하더라도 ‘아 콤플렉스 때문에 그때 내가 그랬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심드렁해졌다.

그렇다면 초창기에 내가 심리학서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나도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사주풀이에 집착하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토정비결을 보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라든지, 이달의 운세를 꼭꼭 챙겨보곤 했으니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느 누가 궁금해 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사주풀이는 나에게 무서우면서도 신기한 세계였고 사주풀이를 해 주던 점쟁이들을 향하는 내 시선은 존경 그 자체였다. 나도 모르는 나를 어쩜 그리 단정적이고도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풀어준 것인지(물론 신기함과 존경 이면에는 두려움도 있다. 그렇기에 난 오늘의 운세를 오늘이 다 지난 다음에, 이달의 운세를 이달이 다 지난 다음에, 올해의 운세를 올해를 다 보낸 즈음에 읽곤 한다.)... 그러던 차에 ‘프로이드’나 ‘융’이라는 이름과 함께 심리학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과학적 근거들을 들고 점쟁이들 앞에,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점쟁이들에게 보내던 존경의 시선이 어느 새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된 것을 끄집어 내 주는 심리학자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증빙서류들이 신뢰감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와 그들이 치료한 환자들의 사례를 보며 ‘맞아, 맞아. 그렇구나! 나의 열등감은 그런 데 원인이 있었구나.’라며 수긍하고 또 그 사실에 침울해 하기도 하면서 나의 증상 하나하나를 심리학 용어에 끼워맞춰 보며 감탄하곤 했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나에게 존재했던 그런 열등감들이 심리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을 이끌어내 준 심리학자들의 힘인지 아니면 그 증상에 붙여진 이름(언어)의 힘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여튼 이번에 이 책에서 접한 열등감은 ‘착한 딸 콤플렉스’이다. 늘 그렇듯이 딸이기만 했던 때에는 나의 입장만 생각할 수 있었는데 누구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엄마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묘하기만 하다. 이 책에 적힌 사례를 보며 엄마만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또한 엄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위 치는 소녀’라는 동화의 내용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동화(童話)’는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주곤 하는데 이 책 역시 동화에 바탕을 두고 ‘거위 치는 소녀’에 감추어진 착한 딸 콤플렉스를 세세히 분석하고 있다. 모성애라는 이름의 폭력에 힘입어 독립심 없이 자라난 딸들이 가진 ‘의존성 인격 장애’가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학 서적을 읽지 않고서도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무한한 사랑이 필요하며 그러한 무한한 사랑에는 절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하고도 이상적인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모두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그 기준이 더욱 모호해진다. 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해 주는 부모는 의존성 인격 장애를 방치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또 다른 콤플렉스를 얻게 된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일까? 이쯤 되면 나의 심사는 조금 꼬여 버리고 이 책의 저자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자신은 어떻게 자랐는지 삐딱한 측면에서 궁금해진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도 아빠의 사랑이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모두가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형제 자매 간의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같은 조건의 부모 밑에 자라난 형제들도 첫째와 둘째가 다르고 셋째가 다르지 않은가. 명확한 지침조차 마련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불행한 콤플렉스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 그 해답은 도대체 보이질 않는다. 저자가 알려준 ‘알파 릴랙싱’ 정도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경우를 두고 ‘아는 게 병이다’라고 한 것일까? 물론 상황을 모르고 우울해 하기보다는 정확한 병명을 알고 대처하는 것이 나름 좋은 점도 있긴 하다(알고 대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내가 이렇게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 역시 나의 유년기에 감추어진 인격 장애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나의 모든 것을 뜯어고쳐 완벽한 조건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살아간다는 것은 고민의 연속이고, 실수의 연속이며, 다양한 콤플렉스의 만찬을 즐기는 일이다. 이러한 고민이 모두 해결되는 순간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던가! 콤플렉스가 없다면 좋겠지만 우린 저마다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아간다. 외모 콤플렉스는 성형의 힘을 빌리기라도 하지만 성격적 콤플렉스는 어디를 도려낸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콤플렉스를 나의 동반자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다른 부분을 보완하기도 하고, 나의 열등감을 위로도 해 주면서 살아가야 할 때인 듯 싶다. 싫다고 버리고 꺼리다 보면 언젠가 나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콤플렉스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길 수 있는 방안(없앨 수 있는 방안이 아님)도 생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콤플렉스는 나의 힘이다. 부디 나의 딸은 콤플렉스가 없길 바라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왜냐 하면 콤플렉스를 힘으로 알고 살아가는 내가 그 아이의 어뭉이기 때문이다. 서점가에서는 요즘 부쩍 심리학이 서른에게 말을 걸고, 유년기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지금의 고민도 벅찬데 무엇하러 예전까지 들추어 내고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네 인생살이가 힘든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제 심리학이 걸어오는 말에는 그만 대답하자. 오히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주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게 더 필요하다. 콤플렉스라고 굳이 이름붙이기 전에 자신을 보듬어주고, 보듬어준 자신의 마음을 잘 토닥여서 자신의 가족들을 한 번 더 꼬옥 안아줄 필요가 있다. 추운 겨울날 적어도 마음만은 포근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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