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래.전민진 지음 / 남해의봄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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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비슷한 꿈들

꿈에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비슷한 꿈을 꾸고 살아가는 것 같다. 특히, 부모들이 자식에게 품는 꿈은 무엇보다 비슷하다. 상점 진열대에 세워놓고, 어떤 게 더 맛있을까, 저렴할까, 잘 팔리는 걸까 고르는 것도 아닌데, 부모들은 아이의 꿈을 이리저리 골라 주입하고 재단한다. 아니, 그러기 쉽다. 화가나 사진작가가 되고싶다는 우리 딸은, 외할머니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돈 많이 들어가고, 돈은 못버는 직업이야!"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 어른들은 저런 기준으로 꿈을 재단하시는 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런 생각을 주입당하며 살아왔겠지. 이제 초등학교 2학년 밖에 되지 않은 우리 아들. 친가에 가면 매번 듣는 소리, "공학박사가 되야해.", 혹은 "장군이 되어야해.", 혹은 "대통령 어떠니?". 이 대목에서도 나는 기겁한다. 아, 이런 내가 보기엔 뭐하나 좋아보일 것 없는 직업들인데, 그것도 아이의 생각이 여물지 않은 지금 이때부터 이런 말들로 꿈을 주입해야 하다니! 요즘 부모들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다. 자식이 명문대에 가길 원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일하는 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부모들이 꽤 많다. 대대로 내려오는 악습을 이어 받는 것도 아니고, 가끔 말문이 막힌다. 이렇게 아이의 인생을 재단하여, 코스대로 움직이도록 스케쥴을 짜놓고, 그 스케쥴에 맞춰 코스대로 인생을 시작하고 살아가는 삶. 과연, 행복할까? 꿈을 꿀 틈조차 없는 시간들, 타인의 시선대로 끌려가는 인생. 비슷한 꿈 안에 갇혀, 비슷하게 밟아 가는 인생의 코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서른이 다 되어서다. 나도 늦게 철이 든 셈이다.

 

 

내가 가는 길은 내가 만든다!

직선으로 난 길을 좋아하는 사람, 매끈하게 잘 닦인 길을 좋아하는 사람, 구불거려도 즐거운 풍경이 가득한 길을 좋아하는 사람, 높아도 정상을 향해 뻗어 있는 길을 좋아하는 사람, 미끄럽지만 눈쌓인 길을 좋아하는 사람, 자갈이 많아도 흙으로 덮인 길을 좋아하는 사람, 논두렁 사이로 뻗은 좁은 길을 좋아하는 사람, 샛길로 난 길을 좋아하는 사람.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고,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길도 다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길도 있지만, 지날 수록 멋이 느껴지는 길도 있다. 편한 길이 좋은 길은 아니며, 예쁜 길이 기억에 남는 길은 아니다. 인생에 정답도 여러가지이듯, 가는 길도 다 같을 수는 없다.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길 같다.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은 길 중, 자기만의 길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가는 길에 굳은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 사람들이 걷는 다 같은 길보다,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열정보다는 용기가 돋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는 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받아들이는 각자가 가진 가치는 다르겠지만요. 사실 대기업이라는 곳이 높은 연봉을 주는 안정된 직장의 표상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곳에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취업난이 바로 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요. 모두들 자신이 위대하다고 착각하며 사는 게 아닌가. 회사로 따지면 지점은 싫고 본점만 선호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사실 행동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돌아가더라도 배우고 해보면 용기가 생기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겠다는 목표도 생길 텐데 회사의 조건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시작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죠.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아티스트와 관계 맺으며 즐겁게 일하는 저를 보며 부럽다고 얘기하곤 해요. 하지만 선뜻 그 길을 선택할 용기는 없다고 말하죠. 그만큼 일의 즐거움보다는 다른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이겠죠."

 

- 붕가붕가레코드 김설화 팀장(27세, 입사 3년차)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일침! 내가 꾸려가는 삶이고, 내가 만들어가야 할 인생인데, 많은 이들이 비슷한 길로 걸어간다. 왜 그럴까? 타인의 시선? 안정? 사실, 대기업이 안정을 주는 것도 아니다. 20대 중반에 들어가, 기껏 열심히 일해도 40대가 되면 불안불안하다. 이게 안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높은 연봉이 채워주는 안정감도 있겠지만, 높은 연봉은 가진 사람일 수록 빚이 많다니, 이것도 아니러니. 자신의 길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회사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가기 마련이다. 대기업을 가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을 원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꿈이 없는 그 자세가 바람직하지 못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흐뭇한 미소가 퍼진다. 내가 가는 길은 내가 만들겠다는 의지, 일 안에서의 자유로움, 착착 쌓아 나가는 아름다운 꿈.

 

 

즐거워, 신나, 자랑스러워!

나를 믿는 다는 것, 그것이 힘

잘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며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했던가? 일 안에서 자유를 즐기고, 일 안에서 성장을 즐기고, 일 안에서 재미를 찾고, 일 안에서 상상력을 찾는 사람들.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겁고, 신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위대한 경영자들의 말보다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작은 회사 안의 작은 회사라는 생각이 저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작은 회사 안에서는 내가 어떤 작업물을 만드느냐에 따라 그 회사의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특히 젠틀몬스터는 독특함을 내세운 곳이라 계속해서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 일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곳이거든요."

 

- (주)스눕바이 젠틀몬스터 우빛나 대리(25세, 입사 2년차)  

 

작은 회사에 가서 또 다른 자기의 재능을 발견하거나 스스로 만족한다면 참 다행이고요,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차츰 스스로 발전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야' 하는 생각만 하고 지내면 무협지의 조연밖에는 될 수 없어요. 은둔형 고수 밑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다는 것에 불만만 품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으로 전락하는 캐릭터처럼 말이죠." 

 

- 땡스북스 김욱 실장(35세, 공동창업 2년차)

 

 큰 영화 홍보사도 있는데, 주로 보도자료 쓰는 사람은 보도자료만, 광고 담당하는 사람은 광고만, 기획서 쓰는 사람은 기획서만 써요. 반대로 저희 같은 경우엔 한 작품을 홍보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함께하죠. 만약 저희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른 회사에 가면 무슨 부서를 가더라도 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영화 한 편에 대한 전체 홍보 작업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학교 같이 다 배우는 거죠. 물론 일이 많아서 힘들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고, 책임감도 보람도 느껴요. '난 보도자료만 썼어'가 아니라 '내가 다 했어'가 되는 거죠." 

 

- 아담'스페이스 민지영 대리(29세 입사 2년차)

 

 모든 일은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잖아요. 제 바로 옆에 저를 이끌어 주는 사부와 동료가 있죠. 의리나 믿음이 없으면 따라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데 저는 그들을 믿고 따르고 있기 때문에 나아가고 있어요. 또 항상 높은 퀄리티로 사진을 찍으려면 개인적인 기복을 줄여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믿으며 협업하지 않으면 좋은 사진이 나오기 힘들어요.  

그냥 나 혼자만 잘난, 대한민국 최고로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되면 뭐해요. 기술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지만 인격도 같이 성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함께 일하려고 하지 않겠죠. 저는 그래서 제가 있는 키메라스튜디오가 참 좋아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만나 소통하는지, 사진 한 컷에 어떻게 그 소통이 이야기를 담아야 할지 배울 수 있는 곳이니까요."

 

- 키메라스튜디오 박진주 포토그래포(30세, 입사 6년차)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 직장인이라면 하루에 대부분은 일을 하며 산다. 그 일이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전락한다면, 일도 사람도 불행하다. 청소부 아저씨가 깨끗하진 거리를 보며 즐거워 하듯, 배관수리공이 막힌 구멍을 뚫었을 때 뿌듯해 하듯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작은 회사에 다니든 큰 회사에 다니든 무슨 상관일까? 지치고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일이라면, 그 마음 간직하고 갈 수 있는 일이라면 일하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꿈과 즐거움, 일이 맞닿아 성장하는 기쁨.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마음 간직하고,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남해의 봄날이 꾸는 꿈이 담긴 책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을 만든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에 주목한다.

'봄바람'이라는 스토리텔링 회사의 공동대표, 봄 정은영 씨가 독립해 통영에 둥지를 틀고 만든 '남해의 봄날'.

비슷한 일을 하고 있기에, 관심있게 보아 왔던 '봄바람'은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회사였다. 그 회사의 공동대표가 독립해 만든 '남해의 봄날' 또한 그러리라 의심치 않는다. 통영에 자리를 잡은 것 또한, 또 다른 행복을 좇고자 내린 결단이었을 거라는 생각 또한 든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느낌, 이 책에 나온 주인공들처럼, 틀을 깬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는 느낌. 남해의 봄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또한, 용기와 행복과 즐거움을 품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이 책이 달리 보였고, 이 책을 쓴 작가들과 편집인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남해의 봄날이 꾸는 꿈을 담았을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즐겁게 걷고 있지만, 가고 있는 길이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어떤 회사에 다니느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니~

 

 

남해의 봄날 블로그

http://blog.naver.com/namhaebomnal 

 

남해의 봄날 홈페이지

http://namhaebom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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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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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사람에게 와닿는 진정한 공포는 음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쟁, 기아, 살인, 질병 등 세상에는 수많은 공포가 있지만, 풍요로운 현대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공포는 음식이다.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음식들은 가장 가깝고 현실적이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몸에 큰 해를 끼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해버린다. 위의 공포들은 내게 닥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희박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음식은 오늘 당장 내가 생존을 위해 해결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때떄로 음식 파동이 일어나곤 한다. 쓰레기 만두 파동, 불량 단문지 파동, 심지어 미국 소고기 파동까지. 어느날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식재료들의 불량함이 들통나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경악했던가. 불량하지 않았던 만두, 단무지까지도 불량하게 취급받고 한동안 외면받아야 했다. 조류독감이 유행하며, 닭과 계란을 생산하던 농가가 풀썩 주저 앉기도 했으며, 불량 라면 사건으로 암묵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각없이 섭취한 음식들이 내게 배신을 때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곤 한다. 실제로, 우리는 웰빙을 추구하고 나서 나쁜 성분에 극도로 민감해졌으며, 더 비싸고 까다로워도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원초적인 반응에 기업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나쁜 성분을 빼고, 좋은 성분을 넣었다고 광고해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하는 말 뿐이다. 사실, 누구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 있을 뿐. 용감한 전문가가 폭로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채로 먹고 먹고 먹는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에는 이러한 공포의 뒷면에 대해 말한다. 세균, 쇠고기, 우유, 유산균, 비타민, 지방 등. 어떻게 사람들을 공포에 파뜨리거나, 좋은 것이라고 믿게 했는지. 소비자의 인식은 연구하는 과학자의 말이나 기업의 광고에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정보에 의존한채 음식은 공포의 대상이 되거나 경이로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세균을 옮기는 주범이 파리라고 생각하며, 파리를 잡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건강식품이었던 우유가 아이를 죽이는 살인범으로 지목되다 극적으로 회생하기도 하며, 지금까지 광고 마케팅으로 쓰이는 메치니코프의 요구르트는 불로장생의 명약이었다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부활한다. 우리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던 쇠고기의 유해함은 정치적인 이해와 맞물려 은폐되고 조작되기도 한다. 비타민 열풍이 불고, 때아닌 티아민 논란으로 강화 밀가루가 등장하며, 통밀보다는 하얀 밀가루가 좋다는 선전은 어이없는 이유로 이루어진다. 가공식품이 인간의 몸에 해를 끼친다는 이론은 장수 마을 훈자로 뻗어나가 자연식품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그 마을의 진실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따라 움직인다.

 

음식에 대한 두려움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려움 뒤에 숨겨진 이해관계다. 거대기업들은 환경이 파괴되든,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인체에 유해한 화학약품 등이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해 식품들을 생산해왔다. 지나친 정제와 가공은 음식의 수명은 늘리나, 인간의 건강한 수명은 줄이고 있다. 하지만, 거대 기업과 유착해 있는 정치는 이 위험성에 대해 스스럼없이 방관한다.

 

음식물들의 유해성이 공표될 때마다, 그것을 막으려는 거대 기업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안다면 사실 우리의 소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뒷 이야기는 들을 만큼 들었고,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한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만큼 들었는데, 음식에 대한 두려움의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

배후와 실체는 이제 지겹게 들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 것이냐고 묻고 싶다. 정확한 대안이 아니라도, 읽는 이를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작은 팁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이 잘못된 상식인지, 옳은 상식인지에 대한 구별이 불분명하다. 그냥 '음식에 대한 공포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책일 뿐.

 

자료는 넘쳐 기술되었으나, 결론을 찾을 수 없는 이 씁쓸한 뒷맛.

분명,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거대 기업들은 아무렇지 않게 유해한 화학 성분을 첨가해 식재료들을 만들어내고 가공할 것이며, 지금도 콜레스테롤과 지방에 대한 공포는 산재해있다.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의견도 있었으면 좋았을 아쉬운 책이다. 수많은 정보 뒤에는 분노와 짜증만이 남았다. 나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는 독자의 마음도 조금 헤아려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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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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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지만, 진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기쁨을 이야기해도 함께 기뻐하기 힘들다. 슬픔을 이야기해도 누구의 슬픔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 사회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정작 진짜 가진 것이 없는 사회. 그래서 함께 있어도, 포근하고 친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혼자 있기에는 사회에서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라고 말하면, 이상한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별나라나 외계에서 온 사람인듯, 때로는 혼자 책을 읽고 싶고, 때로는 혼자 갤러리에 가서 전시 관람을 하고 싶고, 때로는 혼자 여행을 떠나고,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기도 하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시간을 아끼고 싶을 때가 있다. 이해받지 않아도, 이상하게 바라봐도, 그게 전혀 유쾌하지만 않은 것을 알아도 그런 시간들이 소중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말하지 않을 권리, 눈을 감거나 물을 먹는 순간도 타인에 대한 의식 따위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때로는 필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거창한 말을 빼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수백수천가지다. 그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고독'의 시간이라 하겠다. 내가 박탈당하고 싶지 않은 시간, 때때로 찾고 싶은 시간, 강요받고 싶지 않은 시간 말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 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본문 31쪽

내가 공개하고 싶은 만큼 공개할 수 있고, 전하고 싶은 만큼 전할 수 있다.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뒤떨어졌다는 마음이 들며,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비판없이 흡수하고 만다. 누군가가 먼저 달려가면, 이기지 못해 안달을 내며, 누군가가 돌아서면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안녕'하고 만다.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되어야 하며,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 하는 마음. 사실, 네트워크의 작동이 충분한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것도 아니며, 외로움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비판없이 시대의 조류에 흘러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판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말들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라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쉴 사이 없이 '접속'한다. 스마트폰의 활성화로 어디서든 언제든 누군가에 접속하는 것은 쉬워졌고, 누군가의 소식을, 의견을 듣는 것에 익숙해졌고,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과 의견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내뿜기도 한다. 생각보다는 말이 먼저 나가며, 그 말을 맞받아치는 행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에서 감정이 파괴된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를 알리기도 위함이지만, 집단에서 이탈해 외로워질까봐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지지 않으려 하며, 소유하길 좋아하고, 그것이 옳지 않아도 나빠도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살기를 허락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문화, 관계, 성향마저도 기형적으로 드러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넘치듯 흘러나온 풍요로움과 함께 우리가 얻게된 것은 풍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빈곤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그 현상 자체를 서로 부추기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띄고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며,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10대들은 필요 이상의 선택과 기회의 과잉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용카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정신마저도 파산하고 만다. 아이는 이미 아이의 감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며,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성형 중독에 이르게 되고,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유행 속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던져버렸다. 소비지향적 사회는 쇼핑을 독려하며, 공포와 불안이 질병을 권하며, 이런 질병 속에서도 건강을 찾는 것은 부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 고독하지 않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찾아왔다. 해결하려해도 끝이 없는 되물림과 도돌이표. 한쪽에서는 무너져 감을 알면서도, 한쪽에서는 박수치며 환영한다. 불평등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이익과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공포, 욕망, 획일화, 불평등. 방심하고 있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누군가의 삶을 죄의식없이 파괴한다.

 

그렇다면, 왜 자각하지 않는가? 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풍요가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왜 점점 외로워지고 있는가? 사회는 점점 나를 밀어내고 있는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데도 왜 받아주지 않는가? 사회가 권하는 것들은 왜 나를 불행하게 하는가?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왜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가?

 

언제나 위협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해결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은 이러한 의문마저도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또 다른 강함을 찾게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편지 곳곳에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따뜻한 비판 뒤에 인간에 대한 응원이 담겨 있다. 점점 파괴되어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인간이지만, 그 사이에서 다시 대안을 찾아가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법들을 전달하면서 철저한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많은 작가들은 결국 그처럼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저 신앙고백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도발에 불과하다고 매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카뮈는 조금의 그럴듯한 의심도 없이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와 같은 두 가지 임무들 중에서 언뜻 보기에 다른 한 임무를 더 많이 달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어느 한쪽을 희생하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양쪽 임무 모두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내팽개쳐버리는 일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카뮈는 자신의 표현대로,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참한 고통이 나에게 '태양 아래의 모든 것들은 보기 좋았다'라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그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던" 셈이라고. 결국 카뮈는 자신이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했던 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작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란 카뮈가 지적했던 것처럼,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본문 386쪽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위기와 불안, 공포, 정신의 피폐, 외로움.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곁에 있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시대.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꿔나가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비되어버린 의식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지 않고, 연대하고 합심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결함이며, 그 결함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은 '획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아주 특별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그의 일갈에 눈을 떠야 겠다. 이미 행복의 의미조차 잊고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수많은 네트워크에서 헤엄치며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성찰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껍데기로 사는 시간을 버려야, 진정한 '나'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을. 그것을 깨달아야 좀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임을. 이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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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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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공산주의'는 막연한 공포였다. 우리의 교육은 '공산주의'를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고, 큰일이 나는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두 개의 사상이 존재하는 독특하면서 슬픈 현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무조건 '적'으로 간주되던 공산주의가 '적'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깨달았다. 맑스에 열광하던 선배들이 꽤 많았고, 무슨 이야기인지 뚜렷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한 때는 '적'으로 간주되었던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 태동부터, 지난한 시대를 거쳐 소멸하기 까지의 정황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루어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노동자가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나, 그 과정 속에서 혁명을 이루어내려 했던 사람들은 종국에 독재자로 전락했다. 모두가 평등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권력이 강요되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게 공산주의의 모토이지만, 결국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피를 흘렸다.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으면 숙청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된다.

 

물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한 이념의 실현은 결국, 어떤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변질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갖는 평등주의를 실현하려 했지만, 사실 지도자들 조차도 그 평등주의에 맞도록 실천하고 살아온 것인지는 의문이다. 공산주의는 모두에게 희망적인 이념이었을지는 모르나, 결국엔 '괴물'로 변해 제 몸을 삼켜버렸다.

 

요즘에는 자본주의에 지친 이들이 모여 '코뮌'을 만들고 있다. 경쟁으로 피 터지게 싸우며,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살고자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이 코뮌들의 기원은 '공산주의'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조금 더 건강하며, 작지만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공산주의가 이미 무너져 버린 세계는 분명하나, 그것의 씨앗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생각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여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 둘 태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협력'이다. '협력'하지 못하는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지탱할 힘을 갖지 못하면, 무너져 버리는 게 진실. 유럽의 몇몇 국가들이 다 함께 잘사는 방법을 택하고, 유지하는 것도 뼈아픈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원-실험-도약-확산-변형-종언으로 끝난 이 책은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세세하다.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자세한 이념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황들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기에, 책을 따라가다보면 그 흐름을 놓치기 쉽다. 관심있고, 필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제는 학문이 되어버린 하나의 이념. 그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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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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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어떤 책을 읽고 우리가 읽어왔던 동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신데렐라>나 <빨간모자 소녀>, <헨젤과 그레텔> 등의 동화가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꽤나 잔인하고 기이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교육은 많은 이야기들을 권선징악에 초점을 맞춰 가르친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이해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그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관점과 시각을 살짝만 달리해도 이야기의 해석은 달라진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렇게 믿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다른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 그래?'라기 보단, '아니! 이럴수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읽었던 고전과 전래동화들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만 이해하고 넘어갔다면, 그 뒤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에서 시작한 전래동화와 고전들에는  '나쁜 사람' 뒤에는 또 다른 '나쁜 사람'이나 '나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생각지 못했는데,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불편한 진실들은 이야기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한을 품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떠도는 '장화와 홍련'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나쁜 사람은 계모다. 하지만, 과연 계모만 나쁜 것인가? 왜 과년한 처자들을 시집 보내지 않고, 집에 가두어 두었던 것인가. 친아비라는 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서 이야기의 해석은 달라진다.

아무리 딸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다지만, 밤마다 누이가 여우로 변한다는 진실을 말했다고 아들을 내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딸만 자식이고, 아들은 자식이 아니던가. 뒤틀린 자식 사랑이 가족을 죽게했다는 해석. 하나의 전래동화일 뿐이지만, 어떤 문제 의식은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본처의 본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부정한 짓은 남자가 저질렀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참아야했던 과거. 시샘과 질투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가 현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열녀라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남편이 죽으면, 정조를 지켜야하고, 따라 죽어야 하는가? 한 사람의 존엄한 생명은 무시되어도 마땅한가? 그게 올바른 길이라며 열녀비를 세우고, 그 정신을 지금까지 기리다니 이것은 정신병 수준이 아닌가?

 

그럼에도 비판없이 받아들인 이러한 이야기들.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을 비판없이 받아들인 덕에 우리의 무의식은 계모는 나쁜 사람, 정절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 자식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가고 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야기가 실생활로 이어져, 어떤 가치들을 획일화된 이미지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야기라는 것은 신비로우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어렵고, 난해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지화 시킨다. 하지만, 부작용이 따르는 것도 사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보았다. 백이면 백, 똑같이 이해하고 있던 이야기들이 사실, 다른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 의식하지 못한 채 읽고 받아들였던 것들이 꽤 독으로 작용되었을 거라는 점. 뭐 거창하고, 터무니없는 반작용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똑같이 받아들였던 이야기를 다각도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꽤 의미있는 실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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