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참 좋다 - 세계 99%를 위한 기업을 배우다 푸른지식 협동조합 시리즈
김현대.하종란.차형석 지음 / 푸른지식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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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잘 살고 있나요?

 

삶은 점점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질은 높아졌습니다. 이제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살 수 있지요. 기업들은 점점 거대해져가고,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린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별 비판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그들이 조종하는대로 믿기도 합니다. 연봉 수준은 높아졌고, 과거에 비한다면 대부분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돈 없어서 '고기국'을 못 먹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합니다. 삶이 질도 높아진 것 같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교육의 질도 좋아져서, 조금만 노력하면 유학도 다녀올 수 있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도 할 수 있는데 왜 많은 청년들은 힘들다고 하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져 가는 걸까요?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요?

 

글로벌 금융 위기로 국가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숨가쁘게 발전만 외치던 기업들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재를 뽑을 수 없고, 회사를 위해 몸바쳐 일한 직원들 마저 정리해고를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희생해서 기업은 굴러갑니다. 상품의 가격도 높아져 갑니다. 게다가 그 상품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의심과 의심이 쌓여가고, 대기업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관계된 협력업체나 그 기업에 줄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원가 절감이란 이유로 원자재 가격을 깎아도, 기술을 보다 싼 값에 요구해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기업은 횡포를 부리고, 그 안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 기업은 주주를 위해 일하고, 직원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서 남긴 이익은 주주들이 가져갑니다. 이렇게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하게 살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상황은 나아질 줄 모르고, 악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요?

 

 

자본, 그것은 늪이 아니었나?

 

잘 사는 사람은 더욱 잘 살고, 대기업은 점점 거대화 되고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과연 있는 걸까요? 정말 보이지 않기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손'은 소수 권력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소수 권력들은 배를 불리고,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피라미드에 가장 꼭대기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 모두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업이 잘 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업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그래서, 기업에게 많은 특혜를 주었고, 수출이 성장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과거에 제조업이 활성화 되면서 우직한 국민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것이 기업과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열심히 산다면, 어쨌든 좋은 일이 생길거라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분명히 세상은 더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경제 수준은 높아졌고 글로벌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쯤해서 우린 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업을 일해 인생을 다 바쳐 일한 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 시간을 보상받고 있으신가요? 그 주역들을 우린 기억하고 있나요? 그들은 잊혀졌고, 기업의 이름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국가 권력도 섣불리 대항하지 못하는 그런 기업들. 우리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협박하며 유리하게 고지를 점령한 기업들. 

 

 

이제, 대안 경제가 필요하다

 

나 혼자만 잘 살고 싶어했습니다. 공부할 때도 내가 필기한 노트는 친구들에게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한 교실에 있어도, 우린 서로 경쟁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습니다. 취직을 하는 것도 경쟁입니다. 내가 합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경계해야 합니다. 취직을 하고 기업에 들어가서도 모두 경쟁자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사람은 많습니다. 어떻게든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업과 함께 일하는 협력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따내기 위해서는, 원가도 낮추고 밤을 새우더라도 질을 높여야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갑니다. 이런 무한경쟁 시대에서,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빼앗아갔습니다. 회의가 듭니다. 후회가 듭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친구보단 적이 많아진 삶. 이게 최선일까? 자본과 기업에 휘둘리며 사는 삶, 좀 바꿀 수는 없을까? 다행입니다. 자포자기하지는 않아서. 어쨌든, 그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 노력해서. 그리고, 우린 희망을 발견합니다.

 

'협동조합'. 우리나라 협동조합들 '농협', '신협', '축협' 등을 생각해보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것들은 이름만 협동조합일뿐, 기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민의 편에 서야할 농협은 자본의 편에 서 있으니, 우리의 일상에 있는 협동조합은 기업처럼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협동조합은 경제의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곳. 그곳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세계 속의 협동조합

 

우리는 경쟁에 익숙할까, 협동에 익숙할까. 경쟁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학습된 것은 아닐까.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경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타인을 이겨야 자신이 승리하는 경쟁 Positional competition이 있고, 또 다른 경쟁이 있습니다. 바로 협력적 경쟁Cooperative competition입니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경쟁, 함께 일하면서 둘 다 이기는 경쟁.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은 바로 이런 '협력적 경쟁' 방식으로 일한다고 했는데 그라나롤로의 직원은 그 협력적 경쟁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듯했다. 

-  본문 69쪽 

 

이 책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시작합니다. 협동조합이 일상이 된 도시, 볼로냐.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달러라고 합니다. 유럽연합에서 소득이 높은 5개 지역 중 하나. 볼로냐의 인구는 약 37만여 명. 우리나라 경남 진주시와 비슷한 규모라고 합니다. 작은 도시, 하지만 끈끈한 힘을 가진 도시. 가난했던 도시가, 경제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은 협동조합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에는 협동조합이 무려 8,000개나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전체 협동조합의 반이 이 주에 있는 것이죠. 이 지역 사람들의 임금은 이탈리아 평균 임금의 두 배, 실업률은 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야말로 꿈에 도시라고 할 수 있죠. 이 도시는 우리의 마트와 비슷하지만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콥Coop'부터 택시, 감자와 양파 재배 농민 협동조합인 '코메타', 주택 협동조합 '콥안살로니', 낙농 협동조합 '그라나롤로', 유치원 협동조합 '카라박 프로젝트' 등 협동조합의 종류가 너무도 다양합니다.

 

이 협동조합들은 큰 이윤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서로 연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iCoop'이나 '생협(생활협동조합)'처럼 더 좋은 농산물을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콥Coop'. 상품을 믿고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사는 소비자나 파는 농민이나 어느 한 쪽도 손해보지 않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상품을 사면서도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농민은 가격 폭락 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가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소비자는 협동조합을 많이 이용한 만큼 할인도 받을 수 있고, 많은 금액은 아니어도 배당을 받게 되죠. 이용하면 이용할 수록 나에게 이익이 되고, 생산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낙농 협동조합 '그라나롤로'는 이탈리아에서 우유 시장점유율이 1위일 정도로 탄탄한 협동조합입니다. 제품 품질을 높게 유지하고, 출하 가격을 조정하고, 기준을 정해두고 원유를 수집합니다. 소가 위생적인 물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부터 점검하고, 소비자가 우유와 유제품 생산자를 추적할 수 있게 합니다. 기업은 품질관리를 철저히한 농가에게 높은 가격을 책정해주고, 기업은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습니다. 고용 불안 문제를 최소화하고,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보다는 협동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이라면 누구나 일하고 싶을 테죠. 게다가 '사회적 책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주는 것도 적극적입니다. 경쟁에 치이며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자부심을 느끼며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업. 사먹는 소비자도 제품을 생산하는 생산자도, 원제품을 제공하는 농가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대안 경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전 세계 155개국의 나라 중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를 차지한 '덴마크'. 그곳에도 협동조합이 있습니다.

 

덴마크 협동조합연합회의 엘사 브라네르는 협동조합과 덴마크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덴마크에는 서로 돕는 전통이 예로부터 내려오고 있어요. 당신이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거죠. 이것이 덴마크 복지 정신의 기본이기도 하고요. 당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 이런 협동 정신과 덴마크는 뗄 수 없는 관계죠."    

- 본문 95쪽

 

1970년만 해도 에너지의 99퍼센트를 수입했던 덴마크는 현재 에너지 자급률이 145퍼센트입니다. 이 성과의 기반은 풍력발전이었습니다.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성장 전략과 원자력 포기. 그대신 풍력발전을 곳곳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풍력 협동조합 '비도우레'도 있습니다. 마을 주민이 풍력발전기의 주민입니다. 그 때문에 님비 현상도 잠재울 수 있었죠. 단 네명이 각자 50크로나씩 출자해 만든 조합이 지금은 2,268명 자본금 540만 3,000크로나로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조합원들의 수익이 연 이자율 11퍼센트. 환경보호에도 기여하고 돈도 벌 수 있는 협동조합입니다. 그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한 기업에 돌아가지 않고, 협동조합의 소유주들에게 분배되는 것. 그것은 에너지 사업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속 가능한 은행을 지향하는 협동조합 은행 '메르쿠르', 글로벌 축산 협동조합 기업 '대니쉬 크라운', 유가공 협동조합 기업 '알라푸즈', 코펜하겐 도시 꿀벌 협동조합 'BYBI' 등 협동조합의 종류도 형태도 다양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빈곤, 환경 등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환경과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우리 경제 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우리 사회가 가는 방향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열린 경제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외된 사람들을 다시 노동에 복귀시키는 사람도 필요하고, 환경을 가꾸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기보다는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가 바로 그런 일이죠." 

- 본문 131쪽 (올리베르 막스웰, BYBI)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하는 덴마크 청년의 말. 사람을 부자로 만들기보다는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 시작한 코펜하겐 도시 꿀벌 협동조합 'BYBI'.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노숙자들과 시작한 양봉사업은 2010년 유럽 최고의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벌이 사라지는 도시에 벌을 불러들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노숙자들에게 일을 제공한다. 청년의 작은 생각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뉴질랜드의 세계 1위 유제품 수출 기업 '폰테라', 뉴질랜드 농업의 미래를 책임지는 '영파머스 클럽',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키위 브랜드 '제스프리', 스위스의 소비자 협동조합 '미그로', 네덜란드 협동조합 은행 '라보방크', 캐나다의 산악제품 협동조합 '엠이시', 영국의 돌봄 협동조합 '체비엇 케어', 라이브러리 협동조합, 협동조합 펍(영국의 대중 술집) '폭스앤하운즈', 영국의 최대 소비자 협동조합 '코오퍼러티브 그룹', 미국의 협동조합 '선키스트, 웰치스, 블루다이아몬드'.

 

세계에 포진해있는 협동조합은 규모나 업종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협동조합이 추구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경제, 행복한 삶입니다. 나 혼자 빨리 앞서가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두 함께 오랫동안 즐겁게 살자는 마음입니다. 물론 원가로 경영을 하고, 민주적인 1인 1표 방식이 의사 결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사기업보다 비교적 낮은 급여는 고급 인재 확보에 불리하다는 점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잘 운영되고 있는 협동조합에겐 그런 문제들이 걸림돌이 되어 보이진 않습니다. 사업의 잉여금은 최대한 공동자본금으로 적립해 위험에 대비하고, 그 다음으로 이용 배당을 합니다. 주주를 위한 이익배당이 없으니 순이익률이나 투자 수익률 같은 수치가 좋게 나올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수치일 뿐. 네덜란드 협동조합 은행 '라보방크'는 100년 이상 무배당으로 잉여금 전액을 적립해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자체적으로 극복했습니다.

 

 

협동조합을 꿈꿔 볼까요?

 

2010년 9월 배춧값 파동으로 배추 한 포기가 1만 5000원으로 치솟았을 때, 한살림과 아이쿱생협 매장에서는 2,000원에 못 미치는 평소 가격 그대로 배추를 팔았습니다. 김치를 담을 때 필요한 무, 대파, 마늘 같은 김장 채소류도 값이 올랐지만, 동결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배춧값이 300원 까지 폭락해 농민들은 밭을 갈아 엎었지만, 한살림과 아이쿱생협과 거래한 농가는 계약한 대로 지급해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수익이 날 때마다 일정 금액을 가격 안정기금으로 적립했기 때문이죠. 이것은 신뢰였고, 협동조합의 힘이었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힘을 얻고 있습니다. 법개정으로 올해 12월부터는 5인 이상만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겐 무궁무진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대기업에 굽신거리지 않아도, 못살겠다고 파업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모두가 '협동'한다면 말입니다. 대기업이 만든 빵집, 대기업이 만든 치킨집, 대기업이 잠식한 피자집에서 고통받는 상인들이 힘을 모은다면 동네 빵집, 동네 치킨집, 동네 피자집이 서로 도우며 더 잘 살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이 문어발처럼 뻗어나가는 업종들. 소상인과 자영업자의 등골을 빼먹고, 착취하는 기업들의 횡포에 대항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버스회사 사장, 택시회사 사장만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3대 통신사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012년 유엔은 "협동조합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Cooperative Enterprises Build a Better World"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작은 사람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쓴 돈의 흐름을 알 수 있고, 그 돈이 지역에서 재투자되고, 윤리적으로 사업하고, 노동자와 환경을 존중하는 협동조합 기업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내가 민주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이니까 신뢰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확산된 겁니다.

 

마리아 엘레나 차베스(국제노동기구 국장)        - 본문 285쪽

 

 

자본을 쫓다가 위기를 맛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이 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너무 지쳐있었지도 모릅니다. 잘 살자고 열심히 살았는데, 누군가만 잘 살고 있었고, 돌아온 답은 불안과 소외감. 그렇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답을 주진 않지만, 힌트를 줍니다. 협동조합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어떻게 기업을 운영해 나가고 있는지. 경쟁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하지만 함께 가면 다같이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 나만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모두를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작은 힘이 모여 큰 힘이 되는 세상. 우리도 이제 협동조합을 꿈꿔 볼까요?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

 

iCOOP 생협연합회  www.icoop.or.kr 

 
두레생협연합 www.dure.coop/

 

한살림 www.hansalim.or.kr

 

원주 생협 www.wcoop.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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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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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변하지 않았다

2년 전, <4천원 인생>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우울이 <노동의 배신>에서 재현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쓰여졌던 이 책은 2012년이 되어서도 유효하다. 노동은 더욱 궁핍해졌고, 나아진 것이 없다. 그게 더 우울하고 충격적이면 충격적이랄까? 세상은 발전하고 있고 좀 더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빈곤의 늪은 더 넓어졌다.

 

2년 전, <4천원 인생>에서 4가지 노동을 만났다. 식당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는 아줌마의 노동, 마트라는 거대 자본에 그림자가 되어가는 젊은이의 노동,  온갖 궂은 일을 도맡하 하면서도 불법이라는 그늘에 갇혀 살아야 하는 불법 체류자들의 노동, 사람이 기계가 되는 기계적인 노동. 이 4가지의 노동을 4명의 기자들이 경험했다. 비인격적이고 부당한 대우에도 입을 열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들을 밟아 누르고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업과 사회. 그 누구도 그들의 권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관심도 없다. 기자 4명이 관심을 갖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고, 그들의 노동에 대해 폭로했지만 지금 변한 게 무엇인가? 마트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의 삶과 노동은 더 나아졌을까? 식당에서 일하며 떳떳하게 휴일도 요구하지 못하고 사장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아줌마, 아니 엄마들의 삶과 노동은 나아졌을까?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도맡아 해주는 불법 체류자에 대해 더 따뜻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기계보다도 천대받는 삶을 사는 기계적인 노동을 했던 이들의 삶은 어떻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숨소리뿐. 4명의 기자들이 '몸으로 때우며' 보여줬던 노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도 말한다. 이 책을 쓰고 난 후, 10년이 지났어도 나아진 것이 없다고. 경제불황으로 일자리는 더욱 없어졌고, 중산층이었던 사람들도 어느날 갑자기 저소득층이 되면서 노동의 공급은 많아졌고, 수요는 부족하다. 2000년도는 경제가 호황이었음에도 그 지경이었는데, 경제 불황에 맞닥드린 현재는 더해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변하지 않는 노동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다. 노동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국가도 사회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동은 변하지 않았다.

 

노동을 경험하다

그녀는 그동안 누렷던 삶을 포기하고 저임금 노동에 뛰어든다. 아주 엉뚱한 계기였지만,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자 철저하게 규칙을 세운다.

1. 자신이 받은 교육이나 원래의 직업으로 배운 기술에 의존해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다.

2.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임금을 제일 많이 주는 일자리를 택하고, 그 일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3. 어느 정도 안전과 사생활이 보장되는 선에서 제일 임대로가 싼 방을 구한다.

규칙을 정하긴 했지만, 후에 이 규칙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경험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사실 그녀가 해온 저임금의 노동들을 따라가고 있자면, 내 감정도 그녀와 함께 폭발하곤 했다. 아마 나 또한, 그것이 삶이 아니라 바라보는 입장이었기에 그러한 감정들을 분출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 노동들을 진짜 생활,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가 경험한 노동은 다양하다. 식당 웨이트리스,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판매 직원. 그녀는 그러한 노동을 경험하면서 의식주 때문에 고민하고, 1~2달러 사이에서 고뇌한다.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그에 맞춰 값 싼 음식을 찾아야 하며 시도 때도 없이 굶어야 하고, 주거 문제로 고민해야한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투잡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다. 모든 게 몸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기에, 건강은 극도로 나빠져간다. 사실 몸만 힘든 거라면 뭐가 대수겠냐마는, 비상식적으로 인격과 권리를 무시해대는 통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해 그녀만 분노한다.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것은 언제나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 심한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주는 것보다 더 부려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아픈 것도 참아야 한다. 하루를 쉬면, 하루를 살아내지 못한다. 임신도 반갑지 않다. 입이 하나 더 늘 뿐이다. 노동은 '생존' 싸움이고, 사투였다. 그녀의 감정들은 오르락내리락. 읽고 있는 내 감정 또한 오르락내리락.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정신 싸움이었다.

그녀는 '노동을 하며' 분노를 참아내야 했다. 끝까지 가보겠다는 생각, 이러한 경험과 기록들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간힘에도 종종 한계에 도달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100만 달러짜리 콘도에 갔는데, 주인은 나를 부부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샤워실 때문에 아주 속상하다고 했다. 샤워 부스의 대리석 벽에서 '피가 나듯' 물이 새 놋쇠로 만든 수도꼭지 손잡이에 떨어져 녹이 슬고 있다면서 대리석 사이의 이음새를 특별히 박박 밀어서 하얗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 본문 129쪽

 

그녀가 청소부로 일했을 때 경험한 일이다. 삶은 비현실적이다. 한 사람은 비현실적인 육체적, 감정적 노동을 강요받아야 하고, 한쪽은 강요한다. 청소는 적나라하다. 사람의 똥부터 체모까지 감당해야하고 참아내야 한다. 때로는, 감시라는 덫에 걸려야하고 청소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야 한다. 사회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일을 강요하고 있으며, 노동하는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참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동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모두 적이라는 것이다. 고되고 힘든 일 속에서 서로가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 그 안에서도 권력이 존재한다. 권력을 가진 자의 삶이 그다지 더 나아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이 작은 권력에도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자존감의 상실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고용주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동료를 고자질하고, 내가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도 있다. 노동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피트의 말대로 일은 우리가 사회에서 '왕따'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왕따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했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그리하여 테드 같은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카리스마가 부여된 것이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뚝뚝하고 잔인했지만 더 메이즈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은 세상,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복을 입고 직장을 나가고, 주말에는 재미로 쇼핑을 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청소하는 집이 모자라면 그는 직원들을 ('정말 좋다'는) 자기 집으로 보내 일을 시켰다. - 본문 164쪽

 

실상, 사회는 그들을 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내며 '왕따'를 시키고 있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내일을 걱정해야 하고, 절약을 생활화하느라 술은 물론 옷도 제대로 사입지 않았다. 통조림이나 질나쁜 음식으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버는 돈의 대부분은 집세로 지출되고 있었고, 남은 돈으로 그야말로 '생존'을 해야했다. 뭔가 다른 삶은 꿈에 꿀 수도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일, 일, 일을 반복하는 삶이었다. 그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노동은 아프다

열심히 살아도 변하지 않는 삶과 만나야 한다는 것. 가난과 어깨동무하고 늪으로 빠져야 한다는 것. 노동이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는 좌절을 양산한다. 하지만, 그녀가 본 노동자들은 좌절할 겨를도 없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그들의 삶이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노동과 씨름한다고 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그 참혹함이다.

노동은 아프다. 고통의 연속이다. 노동을 사는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은 필요할 때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 버려진다. 그 상황 속에서 항상 불안을 느껴야 한다. 덤으로, 사회가 둘러 놓은 불안정한 울타리 때문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몰차다.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도 배려받지 못한다. 국가는 불균형적인 시장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마저도 빼앗아 간다. 노동자들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시장의 편에 서 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이 책에 나와있는 모든 상황과 경험들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미국을 모델로 삼고 숨가쁘게 쫓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벌어질 일이다. 아니 벌어지고 있을 일이다. 진실은 그늘에 가려져 있다. 그늘은 타오르는 태양을 잠시 피해갈 수 있게 해준다. 태양이 물러나고 가면, 그늘을 모른척한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간다. 밤은 그늘을 삼킨다.

우리의 그늘은 어디쯤 있을까? 우리의 노동자들은 어디쯤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노동자들은 절규하고 죽어간다. 그래도 모른척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함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내가 언제, 그 늪으로 빠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늪지대를 수월하게 탈출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없앨 수는 없어도 바꿀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노동에 배신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가난한 노동도 없고, 노동의 늪도 사라지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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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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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의 풍문을 들어보지 못한 이 누가 있을까? 공포를 불러오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뱀파이어. 그의 목숨처럼 끝없이 재생산 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준다. 소설, 영화,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회자되고 이야기되는 뱀파이어.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뱀파이어의 통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구석구석 뱀파이어를 소재로 쓰여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뱀파이어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사람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채워주는 대상인 것이다. 피를 빨아 생명을 유지하고, 밤에 활동한다는 것만 빼면 불멸의 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도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늙지도 않을 뿐더러, 위험한 상황만 피할 수 있다면 죽지도 않는다. 거기에 냉혈하고 잔인해보여도 멋있는 외모와 가끔은 부드러운 모습까지 덧입혀지면, 인간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뱀파이어에게 피를 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려는 인간이 꼭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잘 드러내는 게 뱀파이어가 아닐지.

 

두렵지만 가까이 가고 싶은 호기심. 그것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유혈이 낭자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렛미인>,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이제는 너무 흔한 이야기라고 치부될 즈음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뱀파이어의 매력을 적극 활용한 예이다. 뱀파이어는 구시대의 이야기를 넘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뱀파이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보다는, 주제별로 분류해 뱀파이어의 연대기를 나열하고 정리해 놓은 수준이다. 수많은 뱀파이어를 너무 많이 소개해 놓았기에, 사실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몰입도가 떨어진다. 신화에서부터 21세기에는 게임 산업까지 침투했다고 하지만, 주로 문학작품, 특히 영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기 때문에, 영화의 장면이나 서술이 많아 맥락 없이 읽히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들을 재생산한 캐릭터이기에 이런 책의 발간도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그로테스크한 조건을 갖은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사랑받을 것 같은 뱀파이어. 이 책의 뒷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채워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뱀파이어.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를 즐겁게 해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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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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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것이고, 모름에서 앎으로 가는 것이며, 멈춰있던 희식이 흐르는 것이다. '읽다'에 내포된 많은 것들이 이 세계를 만들어 냈으며, 많은 것을 창조해왔고, 전달과 전달을 거듭해 많은 것이 공유되어 왔다. 세상에 태어나 읽게 되면서, 알게 되는 모든 것들. 또 읽은 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면서 받아들이고 걸러지는 것들이 있다. 때론 같은 것을 읽어도 생각이, 의식의 형성이 달라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다름을 제쳐두고라도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라고.

 

대학을 졸업 후, 개인적인 일들과 고통. 그 안에서 나를 달래기 위해 열중했던 것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만나게 된 세계는 때론 충격적이었고, 때론 절망적이었으며, 때론 새로웠다. 읽게 되면서 쓰기 시작했다. 읽고 쓰고를 반복했다. 그 과장 속에서 의식이 성장하는 것을 느꼈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성찰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감을 느꼈다. 읽으면서 성장한다고 믿기에, 책을 놓을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됐다. 책을 읽는 것은 나만의 세계에 빠져,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었으므로.

읽기에 빠진 사람은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몸소 경험했다. 행동하지 않고 방관하는 사람이야 말로 아무것도 읽지 않으려 하고,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세상은 '읽고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사투하는 일이기에, 세상을 향한 싸움과 많이 닮아있다.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 -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   - 본문 153쪽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에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읽는다는 것에서 탄생한 모든 것, 그가 예를 들고 있는 루터의 혁명과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의 근원은 모두 '읽기'에 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일어난 혁명. '전태일'이 이루어낸 노동혁명도 분명 '읽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읽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이루어지지 않았을 변화. 읽기가 만든 파급력은 곱씹을 수록 무섭고 대단하다.

 

읽게 된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알게 된다는 것은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은 이루어 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루어 낸다는 것은 읽은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읽을 수 있는 것은 기회를 갖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무엇을, 혹은 원하던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다는 것.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 본문 81쪽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싸움은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책이 말하는 것과의 싸움. 이것은 때론 고통스럽고, 때론 유쾌하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해야 한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맞는지, 옳은지, 이대로 나아가야 하는지. 싸움과 싸움을 거듭한 끝에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많은 것들이 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혼란에 빠졌을 때, 고뇌에 빠졌을 때, 분노에 휩싸였을 때. 읽기를 통해 만난 순간 순간들은 결국 내가 되었다. 읽기를 통해 내가 계속 달라지고, 만들어지면서 이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여 끝나지 않을 성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읽기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읽기를 통해 문학, 철학, 예술, 역사 등 많은 것이 발달되어 왔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살아간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모두 혁명이다. 혁명은 읽기와 함께한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통해 말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핵심이다. 세계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읽는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의 기록 조각조각은 치밀했으며, 또다른 사유와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가 쓴 것들을 읽게 함으로써, 나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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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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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 그들은 누구인가?

똑같은 시대를 살아도, 한 발 더 사는 사람들. 가슴 아픈 것을 보면, 가슴 아파할 줄 알고,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 남들보다 몇 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자신의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을 더 빠르게 느낄 줄 아는 사람들. 내가 아는 시인은 그렇다. 진짜 시인이라면 그렇다. 아름다운 말보다, 뼈 아픈 말을 꺼낼 줄 아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이 느끼고 있으나, 차마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은 아름답고도 슬픈 존재 아니던가. 김수영, 그야말로 찬란하고도 슬픈 존재다. 시대를 꿰뚫어 보며 온몸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시와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살았다.

 

 

강신주는 그 열정과 자유, 인문학적 정신을 이 책에 담았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한 개인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책이다. 김수영을 해석하고 해설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우리 시대에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김수영이 비판하고, 아파하고, 안타까워한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반복을 거듭한 시대는 진화하기는커녕 제자리를 걷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어쩌면 더 와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해야하는 시대에서 시대에 분노했던 김수영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시원하고 즐거우면서도 반성해야하고 되돌아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이야기했던가? 인간의 자유는 '대상적 활동(objective activity)'에 있다고 말이다. 앞에(ob) 던져져(ject) 나의 활동을 방해하는 저항에 대해 능동적(active)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급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라. 강풍에 몸을 맡기고 활공하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뿐이고, 강풍에 날려 가는 새는 오직 죽은 새 뿐이다. - 본문 30쪽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자유를 놓아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이들,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 자유라는 것은 그냥 놓여진 것일 뿐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망각한 이들. 누군가의 삶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이들. 자유 의지를 멀리 날려버린 이들. 생각하지 않고, 각성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한다면 결국, 저 위의 권력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임을 부인해도 부인될 수 없는 시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친 김수영의 시와 정신은 시대의 부끄러움을 또렷히 보여주는 글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다시 일깨웠고, 작가의 이야기에 덧붙여 그를 마음과 정신을 상상하게 되면서 그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는 분명 쓰고 싶은 것을 썼지만, 그것이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삶의 즐거움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삶은 시대의 급류와 맞물리며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시절도 있었다. 그는 전쟁에 휩쓸려 거제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나락에 빠져 보았고, 죽을 힘을 다해 돌아왔지만 아내는 친구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를 찾으려 갔지만, 아내는 쉽게 따라나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 아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는 고통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닌척해도 상처난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 불행은 쉽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설움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온몸에 내재되어 있는 참혹한 상처와 설움, 분노의 씨앗들이 김수영을 김수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온몸으로 쓰는 시, 온몸이 살아서 나오는 시, 온몸이 밀어내어 나오는 시, 그것은 시의 진실, 그리고 시의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의 모든 시들은 온몸으로 썼다는, 온몸을 밀어내며 썼다는 말일 것이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는 상처와 고통으로 온몸을 밀어내었고 그렇게 탄생된 시들은 읽는 이 마저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수영의 이상은 분명하다. 모든 사물이나 사태처럼 각 개인은 단독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닌데 단독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단독성을 되찾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교육과 관습, 권력이라는 외적 압력 때문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외부가 강제하는 제스처로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반대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그러나 그 누가 노예로 살고 싶겠는가? 이것은 교복을 입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 특히 여고생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보면 분명해진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자신이 입는 교복에 깨알 같은 변형을 주면서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한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교복 양식이 계속 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이 시의 원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본문 152쪽

 

 

개인은 시대에 잡아 먹힌지 오래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슷한 방향으로 비슷하게 수긍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잡음 없고, 피곤하지 않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한 '개인'을 '모두'에 집어 넣는다. 개인은 '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우리' 속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혼자 튀는 것, 그것은 언제나 미움을 받아왔다. 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하지만, 생각해보면 튀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몸부림 치는 이들이었다. 튀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것이 싫어서, 비슷한 삶을 거부하기 위한 반항이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행위였다. 이제야 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가 '단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지만, '단독적인 존재'를 향한 야유는 생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남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덧칠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의 생각대로 살면서도 내 생각대로 산다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 생각해보면, '단독적인 존재'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조금 더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깨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몸부림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김수영의 '시'였고, 김수영의 '글'이었다.

 

 

김수영은 시인만큼은 모든 사람이 시인일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 왔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인들이 현실의 낡음은 자각하지 않고 남의 제스처를 흉내내 시만 새롭게 쓰려는 모습을 보며 절망했다. 억압된 시대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단독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시를 써내려고만 했으니, 그의 고민은 컸을 것이다. 설움도 없고, 자신만의 제스처도 없는 시인들에게 "뒤떨어진 현실에서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 내놓"고 있다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들의 태도에 대한 강한 분노였다. 온몸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살아내며 쓰는 그에게는,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슬펐을지.

시대는 흐르고 있었다. 혁명인 듯 보였지만, 혁명이 아니었고, 권력을 깨부순 듯 보였지만 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있는 대중을 속이고, 결국 다른 권력이 모습만 바꾼 채 지배한다. 4.19혁명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실패를 인정했지만, 또 다른 혁명을 꿈꿨다. 완전한 혁명은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 그는 혁명의 좌절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자유를 꿈꿨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재와 억압에 대한 분노로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할지라도, 그들 내면은 이미 권위주의로 훈육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권력이 없던 사람이 소망하던 권력을 얻으면 권력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로 이 점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선(善)과 정의(正義)의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피해의식 탓에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받는 자로 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예는 주인이 되기를 소망할 뿐,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왕조를 붕괴시킨 혁명이 항상 화장을 새롭게 고친 또 다른 왕조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억압으로부터 인간, 혹은 자유를 회복하고자 한 혁명의 결말치고는 아이러니하다. - 본문 346쪽

 

 

온몸이 더러워지는 진창에 빠져, 나를 알아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하여도,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유 의지와 살아있음을 이야기 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아설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억압과 독재 위에 살고 있다. 아무리 자유로워졌다고 하여도, 정신은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어딘가를 서성이며 헤매이고 있다. 권력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들은 자유의지를 희미하게 했고, 오로지 힘이 나의 존재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살아 왔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온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던가? 그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김수영은 현재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가 혁명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쳇바퀴 돌 듯 계속 회전만 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시는 정신이다. 이루어내야할 정신이다. 삶이다. 세상이다.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세상을 바라는 꿈이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희망이다. 자각이다. 일깨움이다. 서러움이자, 고통이다. 뼈아픈 일침이다. 진실이다.

외면하고 싶은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가 더욱 소중하다. 모두가 외면했던 진실들과 당당히 마주하며, 거대한 시대와 맞선 그. 그리고 그를 다시 한번 읽게 해준 강신주.

거대한 도끼가 되어 시대를 내리찍은 그의 시. 그의 시와 그의 마음, 그의 모든 것이 이 시대를 나아가는 열쇠가 되길 바란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1960. 6. 15)

 

 

 

 

시인을 생각하다

이 세상의 시인들은, 온몸을 밀어내 시를 쓰는 시인들은, 시인이었고, 시인인, 시인일 것인 시인들은 이 세상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속적이나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의 공간에 갇혀, 그 순수한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술을 마시고, 어둠을 벗삼고 세상과 단절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눈을 뜨기만 해도 괴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걸 알기에, 온 몸을 밀어내 혼자 시를 쓰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시를 쓰지 않는 시인도 시를 쓰는 시인도 어딘가에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시인의 시는, 시 속의 시인은, 시 밖의 시인은 항상 진실과 마주하며 고통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아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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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1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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