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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처럼, 그의 글은 그의 삶이었으며 인생이었다. 말하는대로 쓰는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야말로, 자신이 쓴 글대로, 자신이 뱉은 말대로 살다 떠난 이다. 그의 죽음이 더 애통한 것은, 이 포악한 시대에 용기내어 총대를 맬 지식인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 안타까움과 통한은 길이 남아 있다.

진실은 신비롭고 달아나기 쉬운 것이어서
늘 새로이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위험하고 우리를 열광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체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 알베르 까뮈

나는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의 글과 그의 행동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그 상황, 그가 겪은 일들과 지난 시대의 일들은 이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평전이라 하면, 질겁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생애를 알아가는 일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시대에 일어난 일과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내기란 녹록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어렵지도 힘겹지도 않다. 평전이기는 하나, 지루한 연혁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읽기 쉬운 시론이나 칼럼을 읽어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역사적 흐름이나 시대적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이해되기 쉽게 풀이되어 있다. 어쩌면, 하나의 전래동화나 구전동화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피끓는 그의 글 토막 토막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 맞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고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 몸부림친 언론인이자 행동가. 지금의 시대를 한탄하고 걱정하며 스러져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의 삶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들어간다. 일제시대를 경험했고, 일찍 홀로 타향살이를 하며 어린 나이에 고된 노동도 경험했던 그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성장은 유복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며, 공부를 했고 그 와중에 민족해방을 경험했고 해양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여 교사가 되었지만 전쟁이 터지며 군에 입대하게 된다. 통역 장교로 입대, 그는 군대의 비리와 모순에 치를 떨고 7년 후 군 생활을 끝내고도 군에 대한 불신은 버리지 못한다. 제대를 한 후, 합동통신의 입사 그는 이때부터 세상을 뒤흔드는 언론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의 은사'로 남게 되었다.

이승만의 폭정과 박정희의 독재, 이어진 전두환 정권까지. 지난한 역사를 통과해 고초를 겪으면서도 펜은 꺾지 않았던 그. 세상에 대한민국의 상황을 알리고, 대한민국에 세상의 이야기를 전했다. '진리에 복무'한다는 굳은 신념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많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깨웠다. 4.19혁명에 나섰고, 5.16쿠테타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박정희와 미국과의 거래를 폭로, 베트남 전쟁의 진실과 참상을 알리기 위해한 노력, 억울한 누명과 강제해직의 수난. 인간이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음해.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노력. 그의 인생은 역사 드라마이다.

참지식인은 비판을 생명으로 한다. '비판批判'은 "시是와 비非를 반半으로 쪼개어 보여준다"는 뜻이다. 지식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진리를 밝히고, 진리를 억압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식인이 가진 힘이란 이성적인 사고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용기뿐이라고 생각했다. 비판할 줄 모르는 지식인은 영혼 없는 고깃덩어리와 같다. - 389p

진실을 파헤치고 양심을 속이는 일을 끊임없이 비판하며 살던 그. 지칠 줄 모르고, 멈출 줄 몰랐던 그의 열정과 신념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세상이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길목마다 새로운 상황이 펼쳐졌고,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펜을 휘둘렀다. 온전한 자유와 온전한 진실만을 위해 행동했던 그는 60에 가까워서야 자유를 얻는다. 억압과 감시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던 그에게 자유의 날개가 생긴 것이다.

결혼 40년 만에 온수 나오는 집에 살게 되고, 아내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그. 살아온 삶이 고단함의 연속이었기에 소소한 행복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용기를 내야할 때 용기를 내고, 쓴소리를 해야할 때 거침없이 입을 여는 그가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씩 바뀐 것이 아닌가한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성찰을 하고 사유를 하며 문제의식을 깨닫고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 덕분이었다. 역사가 변하는 길목마다 그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짊어진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인지, 죽음으로 가는 문턱에 육신의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정부에 행태를 비판하는 말은 서슴지 않았고, 거꾸로 가는 시대에 한탄을 쏟아놓던 그.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행동하게 하는 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남아있다.

큰 별이 졌다. 또 다른 해가 떠오르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몫일 터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지켜내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게 많다. 포악스러운 짐승들은 언제라도 자유와 신념을 빼앗기 위해 덤벼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파른 시대를 통과했다. 그가 싸운 순간, 순간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있었기에 우린 자유다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우상은 그 자유를 빼앗겠다고 덤비고 있다. 나약한 두려움으로 눈감아 버린다면, 그의 죽음이 더 슬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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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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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1년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토론을 벌인 촘스키와 푸코. 솔직히 말하자면, 알아들을 말보다 못 알아들을 말이 더 많아, 야금야금 새겨 읽어야 했는데, 그것도 시간을 갖고 천천히 다시 되새기는 게 필요하다. 두 거장의 토론은, 역시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의 의견에 존중했고 모자란 부분은 세밀한 이야기로 채웠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해 보이지만, 권력, 정의, 정치 등을 아우른다.

본능적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기본 구성요소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사상의 표현이나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도 이 구성요소가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 지능이 발휘되는 다른 분야, 인간의 인지와 행동 분야 등에서도 역시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도식 체계의 덩어리, 생래적인 조직 원리의 덩어리,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지적, 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 28p, 촘스키 

지식의 역사를 볼 때,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적 지표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 어떤 관계를 맺는지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과학적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31p, 푸코 

인간성이라는 담론에 대한 이 둘의 대립보다,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정치'에 관한 담론이었다. 물론, 정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정의와 권력의 문제로도 귀결되는데, 푸코는 프롤레티아 혹인 진보 집단의 투쟁은 결국 정의가 아니라 권력을 잡으려는 행위라고 말한다. 하지만, 촘스키의 입장은 다르다. 결국, 정의를 이루어내기 위한 싸움인 것이지, 권력 자체를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사회와 연결이 되었다. 결국 정의를 위한 투쟁은 권력의 획득, 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싸움이라는 푸코의 말은 우리 사회에서 대중이 가진 불신과 중첩되는 모습을 보였다.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에는 권력을 잡으려는 싸움이 되어버린 수많은 정치적 사건과 인물들. 촘스키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은 푸코의 말과 많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푸코의 말에 동의하게 되면 결국, 정의의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정의를 위한 정치적인 활동들이 결국, 권력을 갖기 위한 싸움이라면, 정의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정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만 남는 것은 아닌지.  

계급으로 나뉘지도 않고 상하로 위계가 고정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볼 때,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 독재 체제, 계급 권력 체제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 체제는 폭력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폭력의 도구는 제도와 헌법에 따른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 64p, 푸코 

계급적 권력 행사가 존재한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라는 푸코의 말을 생각해 본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싸워야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집단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안에서 계급이 나뉘고 상하의 위계가 생기게 되면 결국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태로 얻은 정의도 민주주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여러가지 요소와 상황들을 촘스키와 푸코의 생각을 섞어 다시 되짚어 보자니 정치, 권력, 민주주의, 정의 이 모든 것들이 명쾌하지 않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푸코의 입장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세계의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것뿐이다. 정의와 '인간 본질의 실현' 같은 개념은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의 계급 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정의라는 개념은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개혁가나 혁명가의 과제는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추상적 정의는 제기할 수도 없고 설령 제기한다 하더라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제기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 177p, 촘스키 

정의를 이루기 위한 정치, 정치 안에서 생기는 권력, 권력은 또 다른 정의를 이루고 싶어 하게 하고, 결국 정의를 이루어내기 위해 다시 정치를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순환. 각자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은폐되는 사건, 조작되어 생긴 억울함, 누군가의 죽음, 세계 평화를 담보로 저지르는 전쟁 등 많은 거짓들 안에서 '진실'은 정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는 필요하다.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촘스키와 푸코의 대화는 여러가지 생각으로 다가왔다. 각자 다른 입장과 다른 생각에서, 현실과 중첩되는 현상과 사실들이 보였고. 이것은 정말 논의되어야 할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나지 않고, 깨지지 않은 이 이야기는 정치, 권력, 정의 등의 논의들인 인간의 본성이라는 큰 담론에 묶인다. 인간의 본성은 여러개의 가지들로 뻗어나가며, 결국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제대로 세워야 하는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고, 덧붙여진 생각들을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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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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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보수를 넘고 변화를 꿈꾸다
보수의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청춘의 독서> - 131p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이렇다면, 얼마나 살만 할까? 이념의 대립은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의 개념을 생각하기도 전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내가 보고 있는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탐욕스럽고, 막무가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며, 누군가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게 보수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그들. 난 어릴 때부터 '보수주의자'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치를 탐하는 보수주의자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지난한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에게 '진보'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진보'는 많은 행동과 생각을 담고 있었기에. 더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더이상 이런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 '진보'는 변화를 말한다. 386세대들은 변화를 이끌어낸 최대의 공로자다. 그들의 치열한 싸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자유롭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을까? 그들이 있었기에 변화는 시작될 수 있었다. 

변화는 급격하게 시작되어,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386세대인 한 선배는 '전두환'을 끌어내렸을 때, 민주적이고, 제대로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큰 상실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변화가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노력했던 만큼 쉽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그렇게 10년. 우리는 뭐든 변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권력과 힘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국민이 만들어낸 그들에게 많은 기대의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역시나 생각만큼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우리의 성급한 마음이 그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마음만큼 그들도 조바심이 났고, 오랫동안 정권을 틀어주고 있었던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꽤 깊숙하게 퍼져있어 만만치 않았다.  

지인은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며, 미쳐 돌아다녔던 날들. 그리고 그의 승리.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오는 마음. '변심한 애인'을 바라보듯 자포자기했던 나날들. 그리고 이명박의 집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상처를 겪고 배신감이 들었고, 될대로 대라지 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하지만, '진보집권플랜'을 함께 읽은 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말했다. 무관심이 배신의 복수라고 생각했는데,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이제는 정말 움직여야 겠다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며 즐거웠던 순간의 마음을 다시 끄집어내야겠다고 말한다.  

시행착오 속에서 찾은 진보의 가치
'진보'의 가치란 무엇인가? 내 생각을 말하자면,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정한 사람들만 계속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빈곤에서 허덕이던 이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말이다. 모든 것은 학벌, 지연, 혈연이면 된다는 그런 사회 말고, 공정하게 능력대로, 그 능력을 키우는데 '돈'보다는 '실력'과 '재능'을 믿어야 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계급적으로 보면 진보는 강자나 부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나 빈자의 편입니다. 특권을 가진 엘리트의 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법학은 정의를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서민과 보통 사람이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봅니다. 진보의 길이 곧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는 어디에 가서든 공개적으로 진보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27p - 프롤로그, 조국  

그의 이런 생각을 지지한다.   

오연호         움직이지 않는 대중을 욕하지 말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들마저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가치와 대안을 진보, 개혁 진영이 제시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조국            그렇습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 말고 모이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가치, 대안, 세력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광장은 우리가 바로 주인임을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주권자 의식이 강한 적극적, 능동적 시민은 광장에 나갑니다. 하지만 광장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진보, 개혁 진영이 내놓아야 합니다. - 33p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실패한 정권이라고 말해야할까? 나는, 말하고 싶다. 시행착오를 겪었던 정권이었다고. 인생에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다. 열심히 해도 원하는대로 뜻대로 안 되는 시간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연처럼 행운처럼 원하던 것을 갖게 된다. 하늘은 원하는 것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마찬가지 아닐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이룰 줄 알았다는 말은 변명이자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들의 정권에게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고, 관용도 배풀려 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줬으면 했고, 원하는 것만 들어줘야 했다. '진일보'하려는 조급증은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진보, 개현 진영의 사람들은 예리한 비판에 능하죠. 그런데 비판을 너무 심하게 하면 비판을 받는 사람에겐 상처가 남습니다. 개인감정이 상하게 되면 상대방 말이 맞아도 같이하기 싫어지죠.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살려주면서 합의점을 찾는 식으로 작업해야 합니다. - 40p, 조국

'진보'를 원하면서도 '진보'로 가는 길이 서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상처받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그렇게 같은 뜻을 가졌던 사람들끼리 등을 돌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분열된 것도 사실이다. 안타깝다. 하지만, 그것도 시행착오라고 생각하며 힘을 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국 교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말이다. 하지 못한 것을, 이루지 못한 걸을 잊으려 하지 말고, 다시 해보자고 서로 응원하며 함께 하는 것. '진보'를 원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다시, 다시, 꿈을 품으며
열정은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있을 때 생겨납니다. 지지자들은 자기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어떤 정치인 속에 있다고 판단하면, 그가 수난을 당할 때 마치 자신이 고통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따라서 열정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보호하려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대중과 같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노무현을,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이런 대중의 심정이 2002년 대선판에서 형성됐던 열정의 기반이죠. - 48p, 조국 

절망 앞에서는 다른 희망이 열린다. 절망 앞에 주저 앉는 이는 희망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 있고, 의지가 있다. 싸울 준비가 되어있고,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 기적이라고 불렸던, 역사의 순간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 기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원했고, 원했고, 또 원했던 순간이었다.  

'꿈'을 꾸는 데만 그치다면 무능한 것이겠죠. 그러니 그 '꿈'을 다른 사람과 같이 꾸면서 현실화해내야죠. 진보, 개혁 진영이 다시 집권한다면 집권 초기에 무엇을 해치울 것이지, 어떠한 '제도적 말뚝'을 박을 것인지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해야 합니다. - 110p, 조국 

대학생들은 꿈을 잃고, 자본에 쫓기며 돈을 따라 다니고 있다. 나라 곳곳은 삽질의 연속이며, 건설 회사의 배를 불리고 있다. 부자들의 세금은 깎아주고, 서민들의 세금은 오르고 있다. 물가는 치솟고, 집 값은 물론,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느라 바쁜데 사람 값은 똥값이 되어가는 사회가 되고 있다. 많은 서민들이 울며불며 소리쳐도 정부는, 국가는, 자칭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여당은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생존권도 지켜지지 않고, 생존을 위해 많은 사람이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있다. 국민은 봉이며, 노예이며, 시다바리로 생각하는 정부에게 힘을 모아 저항해야 하는 건 우리다. 넋놓고, 어떻게든 되겠지. 누가 그 자리에 앉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라고 자포자기 한다면, 결국 나아지는 것은 없이 악화될 것이다. 자살율만 치솟고, 출산율은 낮아지고, 아버지들의 외로움은 깊어지는 사회를 가만두어야 할까?  

아주 소중한 시기죠. 정권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에 분개하면서 "저 나쁜 놈들!"이라고 울분을 토하는 데 그쳐서는 의미가 없어요. 사회,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비전과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는 다시 권력을 잡다러도 5년 뒤에 다시 망할 수 있어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쟤들은 도저히 권력 못 맡길 놈"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어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루키우스 세네카가 한 말이 있죠. "행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 312p, 조국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보집권플랜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이미 그는 '진보'가 나아가야 할 '플랜'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이제, 계획을 세웠으니, 실행을 옮겨보자! 그의 생각에 동참하고 싶은 이는,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먼저 정립하자. 책장을 접는 순간, 무엇인가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 오를 것이니! 가치를 여는 진보,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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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바다'라고 중얼거려 본다. 겨울이 되면, 미치도록 바다가 그립다. 바다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편안하다. 영혼의 안식처인 것처럼 바다의 색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속삭임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여름 바다보다 겨울 바다가 더 좋은 것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모래사장, 혹은 바위 위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 심연에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짐짓 모른척 고개를 돌리는 바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본다.  

바다와 이웃한 땅이 주는 그릇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다의 거대하고 단순한 현상에서 비롯되는, 종종 자비에 불과한, 분명한 열의에서 비롯되는 무서운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다의 참다운 지성을 보아야 한다. - 34p 

쥘 미슐레는 바다와 함께했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다. 바다 곳곳에 삶을 말이다. 그가 본 바다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다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처럼 세세하고, 정밀하고,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바다와 살며 말이다. 그가 예찬하는 바다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었던 바다의 모습을 부끄럽게 한다. 그만큼 그는, 사랑하는 이를 탐구하고, 바라보고, 갈구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다라는 큰 세계의 일은 현실적이다. 바로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다. 사랑은 그 밤을 풍요롭게 채운다. 사랑은 깊은 곳으로 잠수하고, 가장 작은 생물에게서 더욱 넘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정말 원소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붙잡아 보면, 여전히 사랑하면서 또 다른 개체로 분리된다. 생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어떤 유기적 기관도 없는 그런 것에서, 이미 모든 생식 형태가 완전하다.  
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 103p
 

바다의 생명력을 본다. 고요한 파도, 혹은 거친 파도 아래에 숨겨진 생명력. 그것은 무궁무진하다. 하찮은 인간이 알 수도, 다 알지도 못할 그 생명력.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라는 그의 말. 또 다른 바다를 본다. 마음의 평화를 주었던 바다와는 달리, 풍요롭고, 엄마의 품 같은 바다 말이다. 온갖 물고기들이 죽고, 태어나며, 먹고 살아가는 그 바다는 생명력이 가득하고 활기가 넘칠 것 같다. 끝이 없는 바다. 죽지 않을 바다. 아, 바다의 다른 모습이다.

삶에서 벗어나 죽어가거나 죽은 것들이 갑자기 한 세상을 만든다. 길 잃은 동물 세 마리로, 나는 수백만 마리를 얻었다. 그토록 어리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들이었다. 참으로 격렬하고 흡인력 있는 몸짓으로, 진정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 118p 

그는 바다 안의 생명들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해파리, 섬게, 조개, 물고기, 고래 등. 그가 보는 바닷속 생물의 모습은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묘사하듯 아름답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바다가 품은 생명들에게도 한없는 애정을 보낸다.  

광산에서 일하는 아동들이 찬아오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먹을거리나 돈이 아니다. "빛을 보는 것"이다. 전복도 이런 어린이나 마찬가지다. 매일 눈이 멀기는 했어도 빛이 다시 드는 것을 느끼고, 그 빛을 향해 악착같이 몸을 열고, 받아들이고, 알몸으로 그것을 응시한다. 빛이 사라지면, 자기 몸속에서 그것을 간직해두고서 애틋한 생각에 쓰다듬는다. 빛을 기다리고 갈망한다. 조개들은 이런 희망과 욕망으로 자기네 작은 영혼을 다독인다. 햇살이 다시 돌아와 비출 때, 조개들도 우리처럼 흐뭇하게 깨어나지 않을까? 우리보다 더욱 다채롭고 복잡한 삶을 즐기면서. - 175p 

그들의 삶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다가, 문득 자신이 사는 것처럼. 빨려들어가는 흡입력. 읽는 사람에게도 느껴진다. 내가 전복이 된 것처럼, 먹는 것이 아닌, 사는 '전복'을 느낀다. 바다가 품은 생명력의 '삶'을 존중하는 듯.  

그리고 돌연, 어느새 바다를 통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다의 모습을 벗어나, 바다가 준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다를 일터로 삶는 것을 떠나, 바다를 따라 신대륙을 찾은 이야기, 바다 탐사를 떠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가 펼쳐내는 바다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인간의 모습까지도 말이다. 

바다 안에서, 바다 밖에서,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 역사와 문화, 생태와 삶까지. 그가 말하는 바다를 따라가다 보면 바다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 바다 위를 걷는 듯, 바다 속을 사는 듯. 쥘 미슐레 덕분에, 편안한 바다를 넘어 새로운 바다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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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애매할 때가 있다. 과연 도덕적인가? 도덕적이지 않은가?라는 논란을 두고 말이다. 도덕을 중시하라는 정부는, 가장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고.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보수주의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앞장서서 부도덕한 일을 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끝나지 않을 도덕 이야기는 네버 엔딩 스토리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공공의 도덕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과연 개개인은 도덕적으로 살고 있을까? '신정환'이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때, 과연 대중이 바라는 도덕이란 무엇일까 의문을 가졌다. 공인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를 비난한 것인지, 아니면 도박 자체가 도덕적이지 않아서 비난한 것인지.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그리고, 도덕이라는 관념은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사적인 결정권에도 많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곤 한다. 낙태를 허용하느냐, 마느냐는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도덕적 논란부터, 개인의 사적인 결정권이라는 문제까지. 도덕은 '정의'보다도 더 혼란스럽다. 또한, '도덕적'이라는 개념도 나날이 바뀌어가고 있다. '동성애'는 도덕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럼 개인이 생각하는 '도덕'이라는 정의와 사회의 통념의 '도덕'이라는 정의는 달리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이클 샌델의 이 책에서는 정치, 자유, 종교, 사생활 등 많은 도덕적 관념들을 다룬다. 도덕이 왜 중요한 것이며, 관행과 제도에 입혀진 도덕적 철학까지 말이다. 그는 말한다.   

어쩄든 도덕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는 법이다.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갖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과 상황 그리고 단순한 경험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우리는 특정한 인간, 즉 당신과 나, 우리들 개개인이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순수실천이성에 참여하는 존재로서의 우리, 선험적 주체에 참여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라는 점이다. - 181p  

아! 그것다면 도덕이라는 것은 의지를 갖고 실천해야하는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 정부는 자신들은 도덕적이라고 하며, 도덕적으로 일을 실행하는 게 당연하다고 굳건히 말하는 데 행동은 그 반대로 하고 있다. 적어도 국민들이 느끼기에는 말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나, 의견의 차이가 있지만. 내가 한 국민을 대표하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 정부는, 자신들이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것들은 누군가의 도덕적인 잣대에서 행해진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그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도덕적으로 행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일까?  

자원주의의 자유 개념에서 국가통치술은 일부 영역을 제외하면 더 이상 영혼통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아의 권리를 연결하면 시민들에게 자치라는 습관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또한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케케묵은 논쟁도 피해갈 수 있다. 일단 형성적 계획에서 자유를 배제하면 칸트의 말처럼 "국가 설립은 악마들의 국가라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294p 

경제적 성장만 이루어낸다면(그것도 부자들의 경제적 성장이지만) 그 목적 앞에서는 모든 부도덕한 행동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문제점을 설득시키려 하는 정부가 놀랍단 말이다. 비인간적 권력구조 때문에 고통받는 국민들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 정부의 부도덕한 신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부도덕함에 대해 말이다. 종교, 복지, 교육, 제도 등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부도덕하게 굴고, 눈가림과 억지를 부리고 있는 정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 자유는, 도덕적이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부도덕하기 대문에 도덕적으로 자유롭다고 어이없이 말하는 것이다. 도덕에 대해 묻는 시민의식이야 말로, 작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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