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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함께 있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지만, 진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기쁨을 이야기해도 함께 기뻐하기 힘들다. 슬픔을 이야기해도 누구의 슬픔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 사회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정작 진짜 가진 것이 없는 사회. 그래서 함께 있어도, 포근하고 친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혼자 있기에는 사회에서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라고 말하면, 이상한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별나라나 외계에서 온 사람인듯, 때로는 혼자 책을 읽고 싶고, 때로는 혼자 갤러리에 가서 전시 관람을 하고 싶고, 때로는 혼자 여행을 떠나고,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기도 하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시간을 아끼고 싶을 때가 있다. 이해받지 않아도, 이상하게 바라봐도, 그게 전혀 유쾌하지만 않은 것을 알아도 그런 시간들이 소중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말하지 않을 권리, 눈을 감거나 물을 먹는 순간도 타인에 대한 의식 따위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때로는 필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거창한 말을 빼고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수백수천가지다. 그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고독'의 시간이라 하겠다. 내가 박탈당하고 싶지 않은 시간, 때때로 찾고 싶은 시간, 강요받고 싶지 않은 시간 말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 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본문 31쪽

내가 공개하고 싶은 만큼 공개할 수 있고, 전하고 싶은 만큼 전할 수 있다.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뒤떨어졌다는 마음이 들며,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비판없이 흡수하고 만다. 누군가가 먼저 달려가면, 이기지 못해 안달을 내며, 누군가가 돌아서면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안녕'하고 만다.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되어야 하며, 혼자 있는 것을 극도로 불안해 하는 마음. 사실, 네트워크의 작동이 충분한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것도 아니며, 외로움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비판없이 시대의 조류에 흘러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판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말들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라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쉴 사이 없이 '접속'한다. 스마트폰의 활성화로 어디서든 언제든 누군가에 접속하는 것은 쉬워졌고, 누군가의 소식을, 의견을 듣는 것에 익숙해졌고,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과 의견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내뿜기도 한다. 생각보다는 말이 먼저 나가며, 그 말을 맞받아치는 행위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에서 감정이 파괴된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를 알리기도 위함이지만, 집단에서 이탈해 외로워질까봐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지지 않으려 하며, 소유하길 좋아하고, 그것이 옳지 않아도 나빠도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나도 그렇게 살기를 허락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문화, 관계, 성향마저도 기형적으로 드러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넘치듯 흘러나온 풍요로움과 함께 우리가 얻게된 것은 풍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빈곤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그 현상 자체를 서로 부추기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띄고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며,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되는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10대들은 필요 이상의 선택과 기회의 과잉에 노출되어 있으며, 신용카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정신마저도 파산하고 만다. 아이는 이미 아이의 감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며,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성형 중독에 이르게 되고,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유행 속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던져버렸다. 소비지향적 사회는 쇼핑을 독려하며, 공포와 불안이 질병을 권하며, 이런 질병 속에서도 건강을 찾는 것은 부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 고독하지 않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찾아왔다. 해결하려해도 끝이 없는 되물림과 도돌이표. 한쪽에서는 무너져 감을 알면서도, 한쪽에서는 박수치며 환영한다. 불평등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이익과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공포, 욕망, 획일화, 불평등. 방심하고 있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누군가의 삶을 죄의식없이 파괴한다.

 

그렇다면, 왜 자각하지 않는가? 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풍요가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왜 점점 외로워지고 있는가? 사회는 점점 나를 밀어내고 있는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데도 왜 받아주지 않는가? 사회가 권하는 것들은 왜 나를 불행하게 하는가?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왜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가?

 

언제나 위협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해결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은 이러한 의문마저도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또 다른 강함을 찾게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편지 곳곳에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따뜻한 비판 뒤에 인간에 대한 응원이 담겨 있다. 점점 파괴되어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인간이지만, 그 사이에서 다시 대안을 찾아가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법들을 전달하면서 철저한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많은 작가들은 결국 그처럼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저 신앙고백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도발에 불과하다고 매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카뮈는 조금의 그럴듯한 의심도 없이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와 같은 두 가지 임무들 중에서 언뜻 보기에 다른 한 임무를 더 많이 달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어느 한쪽을 희생하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양쪽 임무 모두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내팽개쳐버리는 일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카뮈는 자신의 표현대로,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참한 고통이 나에게 '태양 아래의 모든 것들은 보기 좋았다'라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그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던" 셈이라고. 결국 카뮈는 자신이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장했던 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작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란 카뮈가 지적했던 것처럼,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본문 386쪽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위기와 불안, 공포, 정신의 피폐, 외로움.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곁에 있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시대.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꿔나가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비되어버린 의식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지 않고, 연대하고 합심하여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결함이며, 그 결함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은 '획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아주 특별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그의 일갈에 눈을 떠야 겠다. 이미 행복의 의미조차 잊고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수많은 네트워크에서 헤엄치며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성찰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껍데기로 사는 시간을 버려야, 진정한 '나'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을. 그것을 깨달아야 좀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임을. 이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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