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 '파랑새'란 시가 실렸더랬다.
한하운은 '한센씨 병' 환자였단다. 나환자라고도 하지.
경상도 사투리로 '문둥이'라고 하던 병이었다.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해서 '천형'이라던 문둥병은
이제 거의 발병이 많지 않은 질병이 되었지만,
못먹고 헐벗던 시절엔 가끔씩 이 병에 걸리곤 했단다. 

그러면 마을에서도 격리되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마을에서도 박대받을 일만 남은 인생들에게 삶이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을 게다.
일제는 이 나환자들을 전라남도 고흥의 '소록도'란 섬에 격리할 생각을 하고 모든 나환자를 거기로 모았다.
질병 치료보다는 격리를 위한 목적이 크겠지.
그곳의 참상을 그린 소설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란 작품도 있다. 

나병은 느닷없이 살이 썩고, 신경이 삭으면서 손가락 발가락이 짓물러 덜어지고
눈썹이 빠지면서 얼굴에 버짐같은 것이 피는 병이다.
그러자니 먼 길을 걷노라면 발가락 몇 개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힘든 삶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하운의 노래는 목이 메인 울음을 대신한 시였을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아주 간단한 시다.
그렇지만, '파랑새'란 한 단어로 '나병환자로서의 비통, 병고, 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를 형상화 했다.
나환자에게는 성한 인간들의 세상이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파랑새가 되면 푸른 하늘, 푸른 들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담겼다.

거기서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자유로이 울겠다는 것은,
현실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를 절절히 읊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시 중에서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바로 <보리피리>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매 연이 <보리피리 불며~~ 그리워>로 되어 있다. 피 - ㄹ 닐니리는 후렴이지.  

오로지 '그리움'만이 노래되어 있다.
고향의 봄언덕, 어린 시절...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 얼마나 그리울까.
'인환의 거리'는 '임금이 살던 경기 지역'에서 온 말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쉬기를 좋아하지만,
또 깡촌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도시가 그리울 것이다. 

마지막 연에
방랑한 산하가 <얼마나(기幾)> 많았는지...
그 눈물 지으며 넘던 언덕은 얼마나 많았던지...
형상화 되어 있다. 
이 시로 한하운은 <보리피리 시인>이란 별칭을 갖게 된다.

기산하의 '기'는 중국어 또는 한문에서 '몇'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의문사로 보면 된다. 중국어로 '지'로 읽는다.
몇 명~ 이러면 '지 웨이 幾位' 이렇게...
그런데, 이 한자의 쓰임이 특이한 것이 있다.
수학에서 쓰이는 '기하 幾何'란 말.
'몇 기'에 '어찌 하'가 쓰인다. 붙이면 '몇어찌'가 된다.
이 말은 뜻으로 풀이하면 안 된다.
기하라는 말은 기하학의 영어 어원 'geometry'를 음차한 것으로 봐야 된다.
소리만 빌린 것이지.
'지오메트리'에서 '지오'만 따온 것이다. 그걸 한자로 '기하'로 쓴 것을 일본에서 다시 '기하'로 쓴 거지. 

한하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청운의 뜻이 어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겨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국땅 흙 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다음은 <전라도 길>이란 시를 읽어 보자.
소록도가 전라남도 고흥에 있어서 생긴 시일 것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포장도로가 아닌 <붉은 황톳길>은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이 걸어야 하는 유형(流刑)의 길이다.
숨막히는 더위도 문둥병을 얻은 화자의 운명적인 고통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들 문둥이끼리'란 표현에서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루를 걷는 '쑤세미 같은 해'는 '거칠고 힘든 하루 '가 저물어감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의 '쩔름거리며' 걷는 길은 문둥병을 가진 화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적 고통이 담긴 표현이다.

지까다비는 일본식 '작업화'다.
걷다보니 '발가락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담담하다.
그래서 슬픔이 더 짙은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벗어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이렇게 표현하니 더 슬프구나.
가도가도 천 리... 아~ 이 먼 길은 그저 고단한 길이 아니라,
천형의 병을 앓고있는 이의 바스락 바스라질 듯한 가슴이 그대로 묻어난다. 

절망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지만, 그 슬픔이 금세라도 묻어날 것 같다.
비극적 운명은 떠돌이(유랑)의 여정에 비유되어 형상화되고 있다. 

사람이 '잘사는' 일과 '잘 사는' 일이 있다.
앞의 것은 그저 풍요롭게 사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
잘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쓰지는 않아야 하겠다.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가 아닐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한번 되돌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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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24 2014-08-1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은 잊혀진 나병, 소록도 등 그 시대의 아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써 표현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가슴이 찡하게 젖어오는 듯
 

장석남 시인의 시들은 조용하다.
그렇지만, 시를 읽고 나며 왠지 마음 속에 아련한 여운이 남는단다.
그래서 나는 장석남의 시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그의 '번짐'부터 읽어 보자꾸나.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수묵정원 9 - 번짐> 

처음에 '목련꽃이 번져 사라지고'라는 구절이 있다.
목련꽃이 물감 번지듯 번지는 것이 아니지.
목련은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인데, 그 바뀜을 화자는 <번짐>이란 멋진 말로 치환했구나.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좀 우스운 말이지.
어제까지는 <봄>이고 오늘부터는 <여름>이다.
이런 사고를 바뀜이라고 한다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계절이 바뀌었구나... 이런 생각을 <번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구나. 

계절보다도 더 <번짐>이 적절한 표현이 바로 인간관계라 볼 수 있지.
내가 너에게 영향을 미치고, 네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명확한 관계라면 세상 참 편하겠지만,
사실 인간 관계는 그렇지않지.
옷깃이 스치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그 사람들과 감정이 얽혀 있는데, 그걸 '번짐'이라고 표현하니 참 아름답구나.

화자는 <번져야 살지>라고 말한다.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어야 생명이 진행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 또 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음악과 그림 역시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야.
음악을 들으면 마음 속에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하나 떠오를 수 있고,
그림을 봐도 멋진 음률이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단다.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도,
여기까지는 삶이고, 이제부터는 죽음이다. 이렇게 경계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삶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 뒤에도, 그 사람의 삶은 환하게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이름은 출세한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아름답게 사람들에게 추억되는 이름일 수도 있고, 또 욕을 퍼먹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

시간이 흐르는 것도 번짐과 같다.
어떨 때는 또렷하게 시간의 구분이 지어지지만,
어떨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뒤바뀌어 있기도 하지. 

화자는 세상의 이치를 '번짐'이란 단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란다.
주제는 <번짐을 통하여 살핀 세상의 이치>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사랑이란 언제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번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를 한 편 보자.
복효근의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이라는 시다.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복효근,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 
 

 하트 모양으로 생긴 토란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아름다운 언어들과
사랑을 거기 밀어 넣었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어렵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아닐까 한다.
문학을 가르칠 필요 있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떨 때는 철학적인 생각과, 역사를 한 편에 담고 있는 것이 문학일 수도 있단다. 

그의 <시론>을 읽어 보자.
장석남의 '시론'은 잔잔한 물과 같다.
낮고, 고요하면서, 샘물이면서 갈증 그자체인... 시인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물
맛있는 물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한번 더 낮게
조용히

시에도…… <시법(詩法) - 샘물이며 갈증인>

 

시를 쓰는 일은 그만큼 절실한 표현의 '갈증'이 있을 때이다.
그리고, 맛있는 물처럼 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시>의 효용이기도 하다.
철학자의 웅변처럼, 역사가의 사변처럼 명확한 교훈을 드러내주지 않지만...
문학은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그리고 낮게
조용히
사람의 갈증을 채워주는 힘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은
사람을 읽는 일이고, 세상을 읽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을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세상 살이를 <문화>라고 부르니 말이다. 

사람과 세상살이를 읽는 문학을 읽는 일도 그래서 때론 의미가 깊숙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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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날이 유난히 차구나.
겨울이 추우면 그해 풍년이 든다니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법인 모양이다. 

오늘은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같이 읽어 보자.
시인은 신경림의 '농무'가 노래하던 1970년대, 노동자의 삶을 이 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단다.
독재시대의 산업화는 농촌의 몰락을 예고하였던 것이었고,
도시로 도시로 몰려나온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하층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삶의 팍팍함 뿐이었을 것이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고된 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한번 느껴보기 바란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처음 시작이 좀 슬프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물뿐이 아니란 이야기지.
그럼 물뿐 아니라 무엇이 더 흐를까?
시간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저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지.
늙어버린 노동자, 노가다 인생의 삶이 휘리릭 흘러갔는데,
남은 것이라곤 한숨 뿐인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일이 끝났는데, 강물은 어둠 속에서 깊이를 알 수 없게 놓여 흐르는데,
무기력한 노동자는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라고 했다.
참 무능력해 보이는 모습이잖니? 

노동자의 생애가 저물고 저물어, 흐르고 흘러 늙어버렸다.
하루가 저물고 저물어, 이제 샛강 바닥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 
샛강은 강이 섬을 지날 때 좁아진 '사이'에 흐르는 물을 뜻한다.
얕은 물이겠지.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는 것은,
한편 희망적인 빛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물이 썩어버렸는데 달이 비친들 무엇하냐는 자조의 씁쓸함도 묻어난다. 

슬픈 노동자는 저와 같아서,
바로 썩은 강물과 같고,
거기 비친 슬픈 달빛과 같이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어두운 길이다. 부정적 현실이 어두움으로 표현되었구나. 

소외받은 도시 빈민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풀고 있는 시다.
강물에 고뇌를 퍼다 버리려고 했으니 무언가 고뇌를 해소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썩은 강에 비치는 달빛처럼 무기력한 현실은
노동자의 비애를 해소하지 못함을 반영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돌아갈 뿐'인 소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힘겨운 인생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다.

이 시가 담고 있는 주된 정서는 무력감(우울감, 실의) 같은 것이다.
주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비애>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지.

다음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시를 한번 보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골목길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이 시는 '만남'을 간절히 희망하는 시다.
그 간절한 바람의 주체는 '한 그리움'이라고 했고, 바람의 대상은 '다른 그리움'이라고 했다.
간절한 바람의 내용은 <만남>이니
분단되어있는 <남북의 만남>으로 읽어도 좋겠고,
서로 단절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좋겠다.
아니면 <세대간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문제가 없다.
암튼, 지금은 헤어진 대상들의 '만남'을 희구하는 시라보면 되겠다. 

날과 씨는 베틀에서 나온 용어란다.
베틀에는 '날실'이라는 줄을 세로로 죽 묶어 두고는
그 날실에 엇갈리게 '씨실'을 건 것을 기본으로 하여 시작한다.
베틀을 움직이면 '씨실'이 압축되고 그 사이로 실꾸리인 <북>을 통과시켜 다시 '씨실'을 압축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베올에 북 지나듯' 하는 구절은 (규원가)에서 세월이 훌쩍 빨리 흘렀음을 형용한 것이었지. 
씨줄을 한자로 '위'라고 하고, 날줄을 한자고 '경'이라고 한다.
지도의 '위도'와 '경도', '위선'과 '경선'이 거기서 나온 용어지.

날과 씨가 만나 옷감이 되듯,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노래다.
우리의 만남이 '비단'처럼 가치있는 것이 된다면 나는 기다릴 것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면 추위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는 화자.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이렇게 가정법으로 마친다.
그것은 곧,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희망의 간절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 시는 별로 어렵지 않지?
<아름다운 사랑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 <인고>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도 드러나 있어.
<추운 겨울>이니깐, 고통의 계절을 지나고 있음도 알 수 있고 말이다.

이 시의 주제는 '고통의 인내와 재회를 위한 기다림' 정도로 보면 되겠다.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사람'이든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정희성은 이렇게 험한 세상을 조금 다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시선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부정적 현실에 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참여시인'으로 보기도 한단다. 

날이 요즘 제법 차다. 감기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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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외우고 읽고 하던 시들을 오늘 다시 보니,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샘 2011-01-26 16:4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 소년, 소녀 아니던 시절이 있었나요. ㅎㅎ
옛날 것을 우연히 만나면 좋죠.
저야 뭐, 밥줄이라 맨날 만나는 것들이지만 말이죠.
방학 잘 보내고 계시죠?

순오기 2011-0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시인이 반갑네요~~
추운 날에도 열강중이신 글샘님도 평안하신가요?^^

글샘 2011-02-01 23:10   좋아요 0 | URL
저야 맨날 시를 가르치니깐 만나지만 일반인들이야 시인들 만나기 쉽지 않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설 잘 쇠시길...
 

오늘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최승호의 시들을 살펴 보자.
최승호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가 '대설 주의보'일 것이다.
한번 읽어 보렴.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설주의보)

1979년에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80년에 민주화 기운이 무르익던 시절,
광주에서 총칼로 민중을 제압하고 다시 군인 독재 시대가 열렸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내세운 '민주 정의당'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퇴보한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대설' 곧, 큰눈은 그런 무시무시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큰눈이 올 것을 예보하는 대설주의보.
결국 시련의 계절이 앞으로 닥칠 것을 예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는 것이 시임을 드러내고 있다. 

백색의 산들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친다.
제설차가 와서 눈을 치워준다면 좀 나아질 텐데...
눈보라 속에 '쪼끄마한 굴뚝새'가 하나 날아간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을 비유한 것 같다. 

산 속엔 길 잃은 등산객들도 있을 것 같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 등산객들은 고립되고, 외딴 마을도 고립된다.
힘찬 눈보라를 '군단'이란 군사 용어로 표현했다. 군사 독재의 냉혹함이 드러난다.
'백색의 계엄령'에서 눈의 본질이 그려졌다.
계엄령은 당시에 툭하면 내려지던 것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워지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다.
대신에 국민의 모든 권리는 제지당할 수 있지.
아무나 감옥에 처넣고 고문하는 시대가 계엄령이 내려진 시대다.

쪼그마한 굴뚝새가 솔개라도 있는지, 몸을 감춘다.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도 민중과 같다.
소나무도 눈더미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진다.(이렇게 눈의 무게로 부러진 나무를 설해목이라 한다.)
시련은 계속 되는 것이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집은 '때'라는 발음이 반복된 언어 유희에 해당한다.
한 때 먹으려고 밥이라도 안쳤는지 굴뚝에 연기나는데,
그 배경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보라는 계엄령처럼 냉혹하다. 

이 시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군사 독재, 계엄의 시대)를 대설주의보와 눈보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해설가 조남현은 이 시를 통하여 그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겨울에 눈 내리는 현상은 당연한 자연적인 현상이자 우주의 섭리이다.
따라서 눈이 내리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눈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으로서의 눈이 아니다.
여기서의 눈은 해일처럼 굵은 눈발을 휘두르며 천지를 삼킬 듯이 내리는 눈이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온 산을 백색으로 물들일 듯 거칠게 내린다.
이러한 흉폭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그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동식물들의 삶들을 제압하고 위협하기 시작한다.
굴뚝새를 '쬐그마한 숯덩이'같이 초라하게 만들고 서둘러 뒷간에 몸을 숨게 만드는가 하면,
삶과 삶을 연결시키는 '길'을 끊어 놓기도 한다.
또한 온갖 산짐승을 굶주리게 하고 소나무 가지를 부러뜨릴 정도의 위험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비록 이 시는 시대적 상황을 눈 내리는 일상적 현상에서 읽어 내며 그 비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에서 보듯
이 시대를 이겨내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다음엔 시험에 잘 나오는 같은 작가의 '북어'를 읽어 보자.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에서 '밤'은 곧 부정적인 시대를 상징하곤 한다.
김수영의 <폭포>에서도 '밤'은 어두운 시대였다. 

북어는 말린 명태를 일컫는다.
위의 사진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마치 그렇게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북어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그 북어들이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 있다.(1쾌는 20마리란다.)
분대는 군대에서 쓰는 용어다. 분대가 모여 소대가 되고, 중대, 대대, 연대, 사단 이렇게 커진단다.
군대에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란다.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은 억압당하고,
모두들 굳어버린 북어처럼 획일적으로(나란히) 살 수밖에 없던 현실을 비판한 것이지.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는 주체적 삶을 상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보인다.
그 대가리들의 '혀'는 자갈처럼 딱딱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던 시절...
그래서 '말의 변비', '무덤 속 벙어리' 처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이며,
'빳빳한 지느러미'로는 주체적으로 헤엄칠 수 없는 몸이다.
'막대기 같은 생각' 역시 비판적인 사고력을 무시당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게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 상념에 빠진 화자는 갑자기 주체가 자신에게 돌아선다.
그 전까지는 '독재 시대에 사람들이 다들 획일적으로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반성해 보니 '나도 역시 그들과 같은 북어'일 따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느닷없이>에서 시상이 전환되고 있다.
시적 관심이 북어와 사람들에게서 <자신, 화자>에게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당혹스럽게도 환청이 들린다.
북어들이 '너도 마찬가지지?'하는 고함을 치는 것처럼 말이다. 

획일적인 군사 독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북어'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비판적 내용이 자기 반성적인 부분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시적 화자의 진지한 모색이 독특한 발상을 통해 드러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우리도 늘 남들을 비평적 시선으로 보기 쉽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그 비평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1980년대 어두웠던 시절의 시들을 두편 보았다.
지금이라도 그 시절보다 무척 밝아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는 말이 있단다.
민주주의는 여러 사람의 주체적인 인식과 실천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이겠다.
민우도 시를 읽으며 시대를 읽는 눈도 키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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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감상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_()_

글샘 2011-01-25 14:23   좋아요 0 | URL
좋은 시야 뭐, 애들 문제집 들쳐보면 가득한걸요. ^^
애들은 그걸 문제라고 읽으니 문제지만 말입니다.
 

김기림의 시는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시 감각에 경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갔던 감각을 가졌던 시인이니, 그 당시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기 성씨를 바꾸고 연예인들이 예명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1930년대에 김해경이란 사람이 자기 이름을 '이상'으로 불렀던 것은,
요즘 어떤 사람이 자기 예명을 '싸이(미친 놈)'라고 부르는 것과는 천지차이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감각적인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저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가을이,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길)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소년 시절을 되돌아 보는 일은 새로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이처럼 감각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기도 어려운 일이다.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언덕길'은 정말 상상화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런데 거기 '어머니의 상여'가 놓여 있으니,
슬프고 좌절스런 어두운 그늘의 소년 시절을 금세 떠올릴 수 있겠다. 



첫사랑도 금세 떠올랐다 사라지는데, 그것도 시각적으로 감각화하는구나.
'조약돌처럼 집어들었다가 잃어버린 첫사랑.'

그래서 화자는 혼자서(호저) 시도때도 없이 그 길을 넘어간다.
강가로 내려갔다 돌아오는데, 또 감각적으로 노을에 함빡 자줏빛으로 젖어서 왔단다. 
'노을'과 '놀'은 함께 쓰일 수 있는 복수 표준어란다.
그리고 여기서 '노을'에 '젖은' 것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많이많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이 남았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자랐다.
마치 몸이 '감기'를 앓았던 것처럼, 마음도 '감기'를 앓았다.

고향의 버드나무, 오래오래된 그 버드나무,
밑에서
화자는 '어두움'의 근원인
어머니와
계집애를
멍하니 기다린다. 

화자에게 '어둠'은 소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어둠이 화자의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제 세월이 지난 뒤,
그 어둠이 뺨의 얼룩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건... 화자의 생에 낙인처럼 각인된 그 어두움이
어린시절의 가장 깊은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마음 속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나면서 삶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이기도 하단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시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뭘까?
화자의 '길' 위에는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와 '소녀'에 대한 추억이 깔려있다는 것이고,
그 '어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슬프고 가슴이 싸한 애상이란 것이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지나 살아온 시인의 삶에는
왠지 서러운 삶이 가득했을 것 같구나.
그래서 화자는 그 서러운 길을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길'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바다와 나비'는 그 험한 세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세상은 '의지'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자는 멋도 모르고 세상으로 뛰어든 '공주'와 같은 존재였지. 

아무도 바닷속의 수심을 일러주지 않아서,
흰나비인 화자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던 거다.
푸른 무(옛날엔 '무우'로 표기)밭인 줄 알고 뛰어든 곳에선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곤 했던 것이고,
공주같은 나비는 지쳐서 돌아온다.  

꽃이 필 듯이 봄이 오는 3월달인데,
바다엔 꽃이 피긴 커녕 찬 파도만 일렁인다.
그래서 서글퍼진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걸렸는데, 마음은 시리고 시리다. 

여기서도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살아있구나.
'새파란 초생달'은 시각적 표현인데, '시리다'고 했으니 촉각적으로 표현했다.
시각의 촉각화. 역시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이렇게 화자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 1930년대 시인들의 특징 중 하나란다.
김광균처럼 '공감각'을 많이 사용한 시대이기도 했지. 
모더니즘이란 것이 이렇게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한 특징을 가졌단 것을 기억해 두자꾸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우리 집처럼 평온하리라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는
깜짝 놀라는 공주처럼 당황스럽게 만나는 곳이 세상이기도 하다.
민우가 기억하는 '길'이 김기림의 시처럼 '어둠'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민우가 '나비'처럼 깜놀~하는 세상을 놀라움으로 만나지 않기도 역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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