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날이 유난히 차구나.
겨울이 추우면 그해 풍년이 든다니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법인 모양이다. 

오늘은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같이 읽어 보자.
시인은 신경림의 '농무'가 노래하던 1970년대, 노동자의 삶을 이 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단다.
독재시대의 산업화는 농촌의 몰락을 예고하였던 것이었고,
도시로 도시로 몰려나온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하층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삶의 팍팍함 뿐이었을 것이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고된 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한번 느껴보기 바란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처음 시작이 좀 슬프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물뿐이 아니란 이야기지.
그럼 물뿐 아니라 무엇이 더 흐를까?
시간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저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지.
늙어버린 노동자, 노가다 인생의 삶이 휘리릭 흘러갔는데,
남은 것이라곤 한숨 뿐인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일이 끝났는데, 강물은 어둠 속에서 깊이를 알 수 없게 놓여 흐르는데,
무기력한 노동자는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라고 했다.
참 무능력해 보이는 모습이잖니? 

노동자의 생애가 저물고 저물어, 흐르고 흘러 늙어버렸다.
하루가 저물고 저물어, 이제 샛강 바닥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 
샛강은 강이 섬을 지날 때 좁아진 '사이'에 흐르는 물을 뜻한다.
얕은 물이겠지.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는 것은,
한편 희망적인 빛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물이 썩어버렸는데 달이 비친들 무엇하냐는 자조의 씁쓸함도 묻어난다. 

슬픈 노동자는 저와 같아서,
바로 썩은 강물과 같고,
거기 비친 슬픈 달빛과 같이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어두운 길이다. 부정적 현실이 어두움으로 표현되었구나. 

소외받은 도시 빈민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풀고 있는 시다.
강물에 고뇌를 퍼다 버리려고 했으니 무언가 고뇌를 해소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썩은 강에 비치는 달빛처럼 무기력한 현실은
노동자의 비애를 해소하지 못함을 반영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돌아갈 뿐'인 소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힘겨운 인생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다.

이 시가 담고 있는 주된 정서는 무력감(우울감, 실의) 같은 것이다.
주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비애>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지.

다음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시를 한번 보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골목길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이 시는 '만남'을 간절히 희망하는 시다.
그 간절한 바람의 주체는 '한 그리움'이라고 했고, 바람의 대상은 '다른 그리움'이라고 했다.
간절한 바람의 내용은 <만남>이니
분단되어있는 <남북의 만남>으로 읽어도 좋겠고,
서로 단절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좋겠다.
아니면 <세대간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문제가 없다.
암튼, 지금은 헤어진 대상들의 '만남'을 희구하는 시라보면 되겠다. 

날과 씨는 베틀에서 나온 용어란다.
베틀에는 '날실'이라는 줄을 세로로 죽 묶어 두고는
그 날실에 엇갈리게 '씨실'을 건 것을 기본으로 하여 시작한다.
베틀을 움직이면 '씨실'이 압축되고 그 사이로 실꾸리인 <북>을 통과시켜 다시 '씨실'을 압축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베올에 북 지나듯' 하는 구절은 (규원가)에서 세월이 훌쩍 빨리 흘렀음을 형용한 것이었지. 
씨줄을 한자로 '위'라고 하고, 날줄을 한자고 '경'이라고 한다.
지도의 '위도'와 '경도', '위선'과 '경선'이 거기서 나온 용어지.

날과 씨가 만나 옷감이 되듯,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노래다.
우리의 만남이 '비단'처럼 가치있는 것이 된다면 나는 기다릴 것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면 추위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는 화자.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이렇게 가정법으로 마친다.
그것은 곧,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희망의 간절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 시는 별로 어렵지 않지?
<아름다운 사랑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 <인고>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도 드러나 있어.
<추운 겨울>이니깐, 고통의 계절을 지나고 있음도 알 수 있고 말이다.

이 시의 주제는 '고통의 인내와 재회를 위한 기다림' 정도로 보면 되겠다.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사람'이든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정희성은 이렇게 험한 세상을 조금 다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시선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부정적 현실에 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참여시인'으로 보기도 한단다. 

날이 요즘 제법 차다. 감기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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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외우고 읽고 하던 시들을 오늘 다시 보니,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샘 2011-01-26 16:4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 소년, 소녀 아니던 시절이 있었나요. ㅎㅎ
옛날 것을 우연히 만나면 좋죠.
저야 뭐, 밥줄이라 맨날 만나는 것들이지만 말이죠.
방학 잘 보내고 계시죠?

순오기 2011-0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시인이 반갑네요~~
추운 날에도 열강중이신 글샘님도 평안하신가요?^^

글샘 2011-02-01 23:10   좋아요 0 | URL
저야 맨날 시를 가르치니깐 만나지만 일반인들이야 시인들 만나기 쉽지 않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설 잘 쇠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