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분단에 대한 노래를 하나 불러 보자꾸나.
한국은 참 슬픈 나라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지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히려 미군의 식민지가 되어 아직껏 분단의 한을 품고 있는 한국.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를 뒤집어써 분단되었지만 이미 20년 전에 통일이 되었건만,
조선은 어디가서 전쟁 한 번 제대로 일으킨 힘이 없던 나라인데, 아직도 분단의 슬픔을 안고있다.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사는 모든 곳에 속속들이 피해가 사무쳐 있단다. 

국가가 못사는 것도 다 국방비 때문이고,
학교가 팍팍한 것도 다 분단으로 인한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고 좀더 자유로운 나라가 된다면...
그렇지만, 미국이나 일본이나 강대국들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단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한족과 56개의 소수부족으로 이뤄진 나라인데,
한국이 통일이 되고, 조선족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지. 

그래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나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자,
통일을 대비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통합하려고 난리를 친 거지.
사실, 고구려 땅은 중국과 한국에 걸쳐 있는 것이니,
근대 국가가 세워지기 전의 역사 정도야
그 역사를 어느 쪽에 넣어도 큰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통일로 인한 중국의 흔들림은 파장이 컸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암튼, 통일과 분단의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같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직녀(織女)에게)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서 더 유명해진 노래다.
나중에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들어 봤겠지? 
천상의 견우는 목동, 직녀는 베짜는 처녀였대.
둘이 너무도 일을 잘하는 모범생이어서 옥황상제가 둘을 짝지어 줬단다.
근데... 이것들이 짝을 지어두고 나니 도무지 일을 안 하더란다. ㅋ
둘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짝 달라 붙었던 거야.
그래서 옥황상제가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를 떼어 두고는
1년에 한 번. 7월7석날 만날 수 있게 했단다.
그런데 그날이면 은하수가 너무 멀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 오작교라 부르는 다리를 건너,
곧, 까치와 까마귀 뒤통수를 밟고 만나서 눈물을 흘렸다는구나.
그래서 음력 7월 7일은 그들이 만나서 흘린 눈물로 비가 많이 온대.
그리고 그 무렵 까막 까치들은 뒤꼭지에 털이 숭숭 빠져 있대. ㅋ
그리고 그들이 흘린 눈물로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단다. 

이 전설의 주제는 뭘까?
사랑을 해도 결코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이런 거 아닐까? 

은하수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장애물이지.
곧 남북의 분단을 뜻한단다.
남북은 분단되어 있지만, 만날 가능성이 있어. 뭐를 건너서?
바로 오작교지.
노둣돌은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이야.
(하마석이랑은 달라. 조선이 하도 불교를 멸시하자,
절간의 입구에 '하마비'를 세워두고, 거기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고 만든 게 하마비란다.)  

긴 기다림으로 가슴이 아픈 이별을 한 두 사람. 두 나라는..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가슴 딛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이 노래의 희망이란다. 

시의 어조는 강렬한 호소력이 강한 목소리지.
이렇게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노래를 '참여시'라고도 한다.

주제는 뭐겠니?
남녀의 만남, 남북의 만남, 곧 통일의 희망이 되겠지?
지금은 이별해 있지만,
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 작품이야.

은하수라는 '장애물'을 건너,
'노둣돌', '오작교' 같은 희망을 딛고 통일이여 오라~ 이런 노래겠지.
김원중의 노래로 노래도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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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1-1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한국전쟁 수업할 차례인데 더 아리게 들려요. 어휴.....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글샘 2011-01-20 02:07   좋아요 0 | URL
아우~ 한국전쟁 같이 무서운 걸 수업을 하시다니... ^^
팩트,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아이들은 워낙 무식해서, 제가 뭘 좀 얘기하면 빨갱이처럼 쳐다보곤 한답니다. ㅋㅋ
 

안도현이란 작가가 있다.
그의 시는 짧은 속에 힘이 있다.
가장 짧은 '너에게 묻는다'부터 읽어 보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보다 너는 못하지 않느냐?
이렇게 자문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연탄재는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다마는,
너는 과연 <누구>에게... 즉, 어떤 대상에게 정열을 다한 적 있었느냐?
삶을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서야 쓰겠느냐?
이런 질책을 내리는 시다.   

연탄재라는 아무 쓸모없어보이는 사물에서 그런 뜨거운 열정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매섭다.
열정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라고 보면 되겠다.
삶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뜨겁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가치있어 보인다. 

다음엔 같은 주제를 나타낸 조금 긴 시, '연탄 한 장'을 보자.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삶은 곧 연탄 한 장이라는 은유를 들이 댄다.
아까는 연탄 한 장보다 못하다더니, 이제 조금 나아졌다. ㅋ
2연에서 연탄은 뜨거워져서 희생으로 사랑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나는 연탄 한 장보다 못하다. 역시 ㅎㅎㅎ 
강한 자기 반성.

근데, 3연에서 갑자기 '삶은 나를 으깨는 일'로 건너뛴다.
연탄이 타고 나면 재가 되지.
그 재는 비탈길 대문 앞에 십여 장씩 쌓여 있단다.
그러다가 다들 잠든 사이 소복이 눈이 내린 새벽이면,
연탄재를 으깨서 미끄럽지 않게 만들었던 '연탄길'을 추억하며 이런 시를 쓴 것이다. 
연탄처럼, 또 연탄재처럼 가치를 잃어가는 사물들에게서 가치를 길어올린 소중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연탄보다 못한 인간으로 살지 말자고,
만약에 만약에 우리가 '눈발'이라면, 좀 더 따스한 눈발이 되자고 이렇게 교훈적인 시도 쓴다.
근데, 시가 교훈적이면, ㅋㅋ
좀 수준이 높아보이진 않는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진눈깨비는 눈과 비가 섞여 질척거리고 내리는 것을 의미한단다.
진눈깨비를 맞으면 기분 참 더럽겠지?
춥고 축축하고 눅눅한 찝찝함. ^^
그래서 어떤 눈이 되자고 그러니?
함박눈.
그것도 따뜻한 함박눈.
진눈깨비처럼 차갑고 축축하고 눅눅하고 찝찝한 그런 촉감 말고,
뽀송뽀송한 환하고 기분 좋게 내리는 함박눈 말이야.  

그래서 잠 못 든 이에게는 다가가 위로의 편지라도 되고, 
그 상처에 돋아나는 새살이 되자고 하고 있구나.
위로가 되는, 위안이 되는 존재가 되자꾸나~ 이런 좀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시란다. 

그런 마음을 마치 그림을 그려 보이듯 잘 형상화 한 시가 다음 시란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시 중에 이 시가 가장 뛰어난 시라고 아빠는 평가한다.
왜냐면,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도 교훈을 담지 않았으니까.
담담하게 경치를 이야기했는데,
그 시를 읽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을 수 있으니깐.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 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제 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 강가에서)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것이다.로 끝나는 세 부분. 

첫부분에서는 '강'이 주체야.
강은 제 속으로 뛰어내리는 눈이 녹는 것이 안타까워 죽겠대.
참 창의적인 생각이지 않니? 

다음 부분에선 그래서 '강'을 더 의인화하여 표현했어.
강에 눈발이 닿으면 녹으니까,
눈발이 닿기 전에 몸을 획~~하고 틀었다는구나.
방향을 바꿔 흐르면 눈이 강에 바지지 않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강물 소리가 세차게 들렸던 거래.
좀 의뭉스럽지않니?
강물이 눈발 스러지는 게안쓰러워서 뒤채이느라고 세찬 소리를 낸다고 표현하는 이 시인의 마음이  


이 시에 대한 김용택 시인의 짤막한 해설도 있어.

어제 밤에 눈이 살포시 내렸다.
강의 가장 자리가 하얗게 얼어 있다.
얼음 위로 새들이 걸어 간 모양이다.
토끼 발자국이 얼음장 끝 찰랑이는 물가까지 찍힐 때도 있다.
내 몸으로 세상의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시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있어.
시인은 겉으로 드러나게 시적 화자나 서정적 자아인 '나'를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숭고한 영혼의 이야기를
마치 강물이 눈발을 생각해서 제 몸을 얼려가는 이야기에 빗대서 능청스럽게 하고 있는 것. 

그래서 시를 읽노라면 조금은 착해지기도 할지 모르겠다. ^^
또 그래서 어른들이 되면 시를 읽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아빠가 읽어주는 시들은 어쩌면 아빠의 눈으로 본 것이라서,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계몽적인 것 위주로,
또 시험에 날 법한 것 중심으로 설명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시선이니깐,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각자의 관점이 놓여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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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전국을 몰아치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모두들 방안에 콕 처박혀 아랫목에 살 것 같지만,
누구는 언 수도관을 고치러 찬 바람을 맞아야 하고, 누구는 보일러를 고쳐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요즘 아빠가 세상 사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더구나.
사람에 따라 큰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작은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자기 기운을 잘 보전하는 것이래.

기운이 큰데 길이 작으면 잘 참아야 하고,
기운이 작은데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것처럼...
늘 자신을 긍정하고,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
그랬다가 자신에게 좋은 시절이라 싶을 바로 그 때, 도약하고,
운이 안 좋으면 다시 지키고... 좋은 시절 오면 다시 도약하고.
이게 정말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방법이래. 

자기에게 운의 기운이 올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지키는 법.
그냥 멍청하게 기다리면, 그 놈의 '운'이란 놈은,
머리카락이 앞에만 있고 뒤통수엔 없어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 확 낚아채지 않으면,
조금만 지나가고 있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란다. 

오늘은 이성부 시인의 '누룩'이란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 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이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 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누룩)

누룩은 메주와 함께 대표적인 발효 식품이야.
고슬고슬한 고두밥에 누룩을 넣고 물을 부어 발효시키면, 그게 바로 막걸리가 된다고 한다.
누룩은 그 자체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다른 물질의 변화를 도와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봐야겠지.  

우리 인생에 '운'이라는 기운이 바로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란다.
'운'이 있는 시기에는 힘들지 않게 일이 진행되지만, 또 반대의 경우에는 될 일도 자꾸 엎어지곤 하지.
그 운을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누룩'처럼 효소 역할을 하는 것들을 삶에 끼워넣을 필요도 있단 생각이 든다. 

어제 엄마랑 찜질방엘 가서 이런저런 이야길 했는데,
어릴 적 꿈이 뭔지를 이야기했어.
아빠도 어릴 적엔, 평범하게 먹고 살 만큼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엄마도 한 사람으로서 독립적으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본다면, 엄마 아빠는 지금 꿈을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단다.
더 큰 집도 필요없고, 지금처럼 가족이 평안하게 살 수 있으면 되는 거야. 

민우는 꿈이 무엇인지... 앞으로 잘 생각해 보려무나.
그 꿈을 이루려면 어떤 숙성의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인지 말이야.
누룩같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상상 밖의 결과를 낳게 될 그런 숙성의 요소를 네 삶에 넣어 보기 바래.
아빠 생각엔, 아직 네 꿈을 확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직업을 확정하지 않고 더 공부하러 대학을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예를 들면 대학의 철학과 같은 곳에 가서 인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야.
이제 고3이 되니 우선 공부도 해야겠지만 진로도 조금 생각해 보자꾸나. 

이 시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어.
누룩이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앞으로는 그 까닭을 시로 형상화하겠다. 이런 시도지.
무력함, 나자빠져 있음...
이런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이라고 말했지? 

그렇지만, 누구나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만나는 법이야.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단다.
이마빡에만 머리카락을 단 그 기회가 말이야. 

2연에서는 <고통스레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울음'과 '엄동 설한'에 <무르팍 으깨지도록> <찾는> 그 <<길>>. 
누구나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쫙 뻗은 8차선 고속도로이기를 바라지만,
한국인에게 그 길은 꼬불꼬불 산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누구도 간 적 없는 빙벽 가파른 등반길일 수도 있단다.
쉽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앞길.
그러나... 칼날같이 날카로운 저 <별>은 알고 있다. 네 앞에 길이 있음을. 
그 별을 보고 앞으로 '조금씩' 발을 옮기는 일이 곧 사는 일이다. 

좋은 시절이 오기까지 <기다림>
아까 '자기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지?
자기를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말이야.
민우가 어떤 어른이 될 지 모르지만, 되는대로 살다가 어른이 되는 일은 참 무모한 일이 아닐까? 

네 안에서 <발효>의 과정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어린애 같은 민우'가 죽고 썩고 문드러지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대학의 물을 만나면
그 <깊은 기다림>의 시간이 쌓이고 나면,
비로소 발효가 이뤄져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그 과정을 기다리는 일이 바로 <누룩>의 할 일이다. 

덩달아서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
전에 이야기한 <역설>이 다시 나오지?
'죽음'은 불길하고 부정적인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때?
밥이 그대로 있어선 막걸리가 되지 못하잖아.
밥은 자기를 죽이고 발효가 되어서 누룩과 하나가 되어야 해.
그러고 나면 '술'이라는 귀한 음식으로 다시 태어는 것이지. 

원래 술이란 것이 제사나 잔치에 쓰이던 귀한 것이었단다.
지금이야 공장에서 만드는 쉬운 제품이지만 말이야.

마지막 연은 <감춰둔 누륵이 뜨는 냄새>가 퍼짐을 '후각적 이미지'로 가득 잡아내고 있단다.
아~~
화자는 지금 감춰둔 누룩이 발효되는 순간임을 감지하고 있어.
그 냄새가 퍼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는지 몰라.

이 시에서 <누룩>을 <희생>의 의인화로 보기도 해.
민중은 그렇게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고 보기도 한 거지.
아래서 설명할 <벼>와 연관지어 본다면,
독재 시대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관으로 봐도 그럴 듯 하단다. 

그렇지만, 오늘은 민우의 '숙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읽어 봤단다.
부디 민우에게 좋은 시절이 올 때 도약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길 바라면서 말이야. 

이성부의 <벼>는 민중의 이야기다.
조선의 민중들은 농민이었어.
그저 농사만 짓던 이들이 아니라, 국가의 근본이라 믿던 사람들이었단다.
농자 천하지대본... 농사란 것은, 세상의 근본이다.
그래서 임금이 잘못하거나 정치가 잘못되면 농민들이 일어섰다.
왜놈이 쳐들어오면 '의병'이 되었고,
탐관오리들에게는 '동학군'이 되었지. 

조선 말기, 세도정치가 행해지던 어지럽던 시절에는 말이야.
아무런 죄도 없던 이들을 감옥에 처넣던 일이 많았다더구나.
탐관오리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온갖 죄목을 다 만들어 냈다고 그래.
죄도 없이 죄지었던 민중들을 '벼'에 비유한 시.
그 힘없는 벼같은 민중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힘을 갖게 된다는 시, '벼'를 읽어 보자.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벼) 

1연에서는 벼는 서로 기대고 산다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지.
2연에서도 '튼튼해진' 벼들의 연대감.
그러나 죄도 없이 죄지어서... 힘겹게 살던 민중의 모습도 보이고,
벼가 익으면 벼는 베어져서 인간을 먹여 살린다. 

3연에서는 벼의 <고상한 정신>을 드러내고 있어.
서러운 일 많아도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지혜와, 노여움을 덮는 지혜.
민중은 화가 난다고 매번 일어서지 않아. 때를 기다리지. 

마지막 연에서 벼는 베어지면서 '쌀'이 되는 '사랑'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단다.
벼가 베어지길 거부한다면 우린 뭘 먹고 살겠니?
벼의 희생으로 인간은 존재하는 거지.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김수영의 풀>과 같은 끈질긴 민중의 힘은
거기서 '넉넉한 힘'이 나오는 거란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벼의 어울림
어우러진 벼의 힘
벼의 인고
벼의 생명
민중이 어울리고, 거기서 힘이 생기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 생명력을 얻는다. 

어때?
앞에서 노래한 <누룩>의 효과와도 뭔가 상통하지 않니?

<벼>라는 식물의 외면적 특징과
<누룩>이라는 소재의 존재적 특징을 시인은 잡아낸 것이란다.
거기서 나아가
'벼'에서는 '민중의 생명력과 의지의 가능성'을,
'누룩'에서는 '때가 되어 무르익는 숙성의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시를 읽는 일은 이렇게 시인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단다.
시들을 허투루 넘기지 말고,
다시 곱씹으며 읽어보기 바란다.
네 안에서 누룩이 발효되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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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1-01-1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인용문 쌍따옴표안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아니면 찍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예를 들어 ; 그녀는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했다./그녀는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했다. 중에서 어느 것이 맞나요? 혹시 맞춤번 규정에 변경이 있었나요?

페크pek0501 2011-01-17 11:59   좋아요 0 | URL
저도 끼어들어도 되나요?(두 분께 양해 구함)
저도 그게 궁금해서 정확히 알아보고 싶었어요.글샘님의 대답을 기다릴게요.
저의 경우엔 확신없이 그냥 마침표를 찍어서 씁니다. 왜냐하면 "점심을 먹었습니까?"하는 경우에서처럼
물음표를 찍으면서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불균형한 것 같아서요. 통일성을 위해서 점을 찍는거죠.

글샘 2011-01-17 15:57   좋아요 0 | URL
따옴표 안이라도 문장이 끝났으면 마침표를 찍어야죠. ^^

마립간 2011-01-1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선생님, 감사합니다. 질문을 하게 된 계기는, 저는 주로 인터넷 신문을 보는데, 인용구에 안의 문장에 구두점이 없는 것들이 많아 맞춤법 규정이 바뀌었나 궁금했습니다.

글샘 2011-01-20 02:07   좋아요 0 | URL
신문은 원래 띄어쓰기를 안하기로 유명했던 매체구요. 인터넷 신문에서도 맞춤법 규정 따위는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엔 한글 맞춤법이 어렵단 이유도 있고, 체계적 교육이 없다는 이유도 있겠구요. ^^ 궁금할 때마다 공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공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ㅎㅎ
 

아빠가 날마다 시를 읽어주는 이유를 알까?
글쎄.
나중에 나중에 좋은 아빠라고 스스로 위로하려는 걸 수도 있고,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뭐, 이런 저런 생각의 짬뽕이야.
요즘 추세가 워낙 퓨전이잖아. 

오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시를 한 편 소개할게.
문덕수의 '꽃과 언어'란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전에 한번 이야기한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와 유사하지.
이 시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언어'의 트라이앵글이 있어.
<라캉>이란 프랑스의 언어학자의 이론인데...
사물에는 원래 이름이 붙어있는 것 같이 우리는 착각하며 살지만,
사실 그 '이름'이란 것, '존재'의 본래 모습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름'은 가리키는 진짜 대상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컴'이 하나 있다고 해 보자.
너는 어떤 컵을 상상했니?
보통 머그컵이나 유리컵을 생각했겠지?
손잡이가 달린, 우리 부엌에서 물마시는 컵.
아니라고? 손잡이 없는 컵을 생각했다고?
그럼 재질은?
종이, 플라스틱, 알미늄, 쇠, 질그릇(도기), 그걸 구운 자기, 유리, 크리스탈... 끝도 없지.
그렇게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재질도 다른 것들을 우리는 통틀어서 <컵>이라고 이름붙인단다. 

실제 컵과
우리가 이름붙이는 컵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것을 마치 '거울'에 비추인 듯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이다.
인간의 관념 속에서는 '작은 종이 컵'과 '큰 강철 컵'을 하나의 밭두둑 안에 둔단다.
그 밭두둑을 한자로 '범주'라고 부르고, 영어로 '카테고리'라는 말로 쓴다. 

인간의 관념 속에 갈래지어진 밭두둑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국가나 문명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단다.
그렇지만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물건이 대응되는 것처럼 우리는 착각하며 살고 있지. 

꽃을 제대로 이름불러 보려고 언어를 갖다 붙였대.
그러자, 제대로 들러붙지 못하고,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는 <나비>가 되어 <쓰러진다>고 했어.
뭐, 나비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일이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겠지. 

언어는 원래 본질을 적확하게 콕 찍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거란다.
그래서 3연에서 <꽃의 둘레에서 /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진다고 했지. 

예를 들면, 젊은 남녀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나눴다고 해 보자.
그 말은 무얼 의미할까?
나 너한테 관심있어~ 정도?
아니면, 우리 좀 사귀어 볼래~ 까지?
더 나아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면 좋겠는데~ 만큼?
결정적으로, 평생 당신만을 위해서 내 모든 걸 바치겠다는 지경?
그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는 사랑과도 또 다르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인류에 대한 사랑과도 다르단다.
모든 관념은 다 다르지만 같은 언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지. 

마치 인간이 그 존재유무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 저 너머에서 검은 어둠 속에 잠겨 있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늘 그렇게 언어가 빗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이렇게, 어떤 언어는, 어떤 시인은, 어떤 학자는 제대로 언어를 구사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언어를 잘 구사한 사람은, 어쩌면 깊은 사색의 본질에 다가간 사람일 수도 있어. 

부처님께서 '부처라 하는 것은 이름이 부처일 따름이지 진짜 부처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노자가 '진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가난하고 아픈 자를 나를 대하듯 하라'고 했던 것이나,
공자가 '자기에 대한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절대적인 시공간은 없다'고 한 것이나,
달마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앎은 불완전하다. 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부터 깨달아라.'고 하는 것들... 

한결같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모두 똑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형식을 띠고 있단다. 

그렇지만, 이런 언어들이 오래 남아 <고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이겠지. 

존재 파악이 어렵긴 하지만, <꿀벌>처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니,
우리가 읽어야 할 책들은 바로 저런 <고전>이 아닐까 싶구나.
오늘은 조금 뻣뻣한 이야기였지만,
살면서 읽어야 할 것이 정말 많아 보이지만,
진리에 가까운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 껍데기일 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맺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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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구나.^^
집에서 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잠잘 때만 들어오니 같이 살아도 낯설다.
이제 고3이 되는 중요한 시점이니, 마음을 잘 가다듬고 정신의 날을 세워보기 바란다. 

오늘은 오세영 시인의 시를 몇 편 읽어 보자. 
우선 그의 <10월>을 읽어 보자.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0월)



인생에서 10월은 어떤 계절일까?
1월에 태어나고 12월에 죽는다면, 인생의 마무리를 지을 시점이 되었단 이야기일거야.
전에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었단다.
심은하와 한석규가 주연이었지.
한석규는 사진관을 하는 남자로 나오는데, 글쎄 죽을 병에 걸려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었어.
아직 30대 한창때였으니깐, 인생에서 8월 정돈데, 그냥 <연말> 분위기인 <크리스마스>가 와버린 거지. 

이 시에선 역설이 많이 등장해.
'잃는 것'은 '성숙하는 것' 같은 말이 그렇지.
역설이 뭐랬지?
동시에 두 가지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했지?
'얻는 것'이 '자라는 것'과 관계있기 쉬운데, 화자는 '잃는 것'이 '성숙'의 길이랬어.
그러니 역설이지.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은 한창 청춘의 시기일거고,
식물은 청춘에 꽃으로 에너지를 다 보내서 짝짓기(화분)에 안간힘을 쓰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은 한창 일할 나이. 30대 정도 되겠구나.
식물도 여름엔 광합성을 하여 씨앗을 영글게 하고 열매를 살지게 만드는 데 온힘을 기울인다.
인생도 그런 것 같아.
봄에는 짝짓기를 위하여 치장도 하고, 이성에게 관심도 가지고,
그러다 여름에는 식물이 광합성 하듯,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떨어질 열매, 낙과에게 너무 슬퍼하지만은 말라네.
과실이 떨어짐은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이라고 했어.
그건 바로 자연의 순환을 노래한 거겠지?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오늘 또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역설이지.
만남이 아름답지, 이별이 아름다운 건 아니잖아. 보통...
그런데, 역설적인 말로 이별을 더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구나. 
늙는 일, 나이드는 일을 보통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화자는 <나이듦과 함께하는 영혼의 성숙>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나이 든 것을 거부하고 '동안'이 큰 재산인 양 뻐기는 풍조가 있다.
좀 아쉽지.
어차피 태어나면 죽기까지 한 평생 사는 건데...
물론 좀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기도 하지만, 단단한 그릇이 되어,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면 뭐, 아쉬울 것도 없을 텐데 말이야.           
'그릇'의 시인으로 유명한 오세영을 이야기하니깐, 그의 '그릇'을 만드는 재료,
'모순의 흙'도 살펴 보자꾸나.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 (모순의 흙)


이 시의 1연부터 역설적 기운이 가득하구나.
순서를 조금 다듬는다면 이렇게 되겠지. 

흙으로 빚어진 그릇, 접시는 언젠가 깨져서 흙이 된다.
이렇게 적으면 그저 하나의 설명문인제, 행을 뒤섞어 놓으니 그럴듯 하지 않니?

그릇은 잔치에 쓰일 수도 있겠지.
잔치처럼 흥성거리던 삶의 어느 날,
잔칫상에 올리듯 여느 날과 다름없이 쓰이던 그릇이 바싹 깨진다.
죽음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란다. 아무런 준비 없는 그 날에...
버나드 쇼라는 유명한 극작가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런 말을 남겼대.
"내 우물쭈물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
바싹 깨지는 그릇하고 뭔가 통하지 않니?

인간은 그릇이 빚어지는 것과 같이,
물에 젖고 불에 탄다고 표현했다.
물은 왠지 좀 슬프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불은 조금 바삭거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흙반죽도  물에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야 쓸모가 있는 물건, 그릇이 되듯
인간도 슬픈 일도 겪고 마음 힘든 일도 넘겨야 쓸모있는 그릇이 된다는 비유 같다.
왜,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기도 하잖아. 그릇이 크다, 작다... 이렇게. 

화자는 접시가 되어 살리라고 외치고 있다.
그 접시는 깨어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도 죽는 날, 비로소 그 인간에 대한 평가가 완성되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처럼,
죽음 뒤의 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흙과 같은 무기질의 원소로 이루어진
모순의 그릇,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릇에 빗대어 하고 있는 시다.

생명의 완성이 '그릇의 깨어짐'에서 비롯되듯,
인간의 생명도 '죽음'의 순간에 완성되는 느낌을 받으면 될 것 같구나.
다음엔 그의 '그릇'을 읽어 보자.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그릇 1)


이 시에서도 앞의 <모순의 흙>의 연장선에 놓인 그릇을 읽으면 되겠다.
원래 '둥글게' 빚은 그릇.
그 그릇이 깨지면 '모가 난' 면이 드러나면서 '칼/칼날'이 된다고 했다.
그 칼날은 나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화자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처에서 <성숙하는 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겠다. 

그만큼 인생에서 '성숙'은 만나기 어려운 존재인 모양이다.
인생을 둥글게 둥글게, 원만하게 살아나가고 싶지만,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가는 순간, 그저 좋게만 살 수는 없는 날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그 중심을 빗나가는 순간이 또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만은 아니다.
설혹, 그 깨진 그릇의 칼날에 발이 베인다손 치더라도,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맨발이 베어진 살은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같은 시인의 <등산>을 읽는 것으로 오늘은 마치자.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生涯)의 중량(重量)
확고(確固)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岩壁)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接近)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등산) 

보통 문학에서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인생은 새옹지마이기도 하고 뭐 그렇게 나오지.
그런데, 이 시에서 등산은 암벽 등반 같구나.
가파른 암벽을 자일 하나에 의지하고 조금씩 조금씩 위로 나아가는 그런 행위 말이야. 

나는 돈을 들여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말이야.
그 사람들이 추구하는 '조금씩'은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단다.
많이 오르려는, 꼭대기에서 만세부르려는 자세가 아닌,
지금 여기서 조금 조금씩만 미래를 향하여 <가까이, 가까이> 가는 것이 그이들의 발자국일테니...

삶은 그 높은 곳까지 도달하는 거시적인 일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임을 들려주는 시야.
이런 시들을 읽고 있으면, 왠지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지 않니?

삶의 온갖 역정을 다 겪어 오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이야기를 문학을 통해 듣는 것.
그게 문학이 살아남은 힘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모든 진리라 외치는 것들도 언젠가는 흔들릴 수 있단다.
그 때,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가 되겠지. 

민우도 고3이란 높은 고지를 앞두고,
<함부로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이런 자세로, 조금씩 나아가는 마음씀씀이를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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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1-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는 무언인가에 몰두하는 삶이 훌륭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시를 쓰든, 그릇을 만들든, 암벽을 타든... 멋집니다.
몰두하는 시간엔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죠. 시만이, 그릇만이, 암벽만이 그 세계의 전부이죠.
저도 몰두한 일이 끝났으니 좀 쉬었다가, 새로이 몰두할 수 있는 무엇을 찾으려고 해요.
저에겐 독서와 글쓰기가 될 듯...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어떤 글을 쓸 것인가, -를 찾으려 해요.
(추천 누르고 감)

글샘 2011-01-14 17:35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
저도 찾아 가서 읽고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