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인의 시들은 조용하다.
그렇지만, 시를 읽고 나며 왠지 마음 속에 아련한 여운이 남는단다.
그래서 나는 장석남의 시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그의 '번짐'부터 읽어 보자꾸나.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수묵정원 9 - 번짐> 

처음에 '목련꽃이 번져 사라지고'라는 구절이 있다.
목련꽃이 물감 번지듯 번지는 것이 아니지.
목련은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인데, 그 바뀜을 화자는 <번짐>이란 멋진 말로 치환했구나.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좀 우스운 말이지.
어제까지는 <봄>이고 오늘부터는 <여름>이다.
이런 사고를 바뀜이라고 한다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계절이 바뀌었구나... 이런 생각을 <번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구나. 

계절보다도 더 <번짐>이 적절한 표현이 바로 인간관계라 볼 수 있지.
내가 너에게 영향을 미치고, 네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명확한 관계라면 세상 참 편하겠지만,
사실 인간 관계는 그렇지않지.
옷깃이 스치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그 사람들과 감정이 얽혀 있는데, 그걸 '번짐'이라고 표현하니 참 아름답구나.

화자는 <번져야 살지>라고 말한다.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어야 생명이 진행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 또 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음악과 그림 역시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야.
음악을 들으면 마음 속에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하나 떠오를 수 있고,
그림을 봐도 멋진 음률이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단다.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도,
여기까지는 삶이고, 이제부터는 죽음이다. 이렇게 경계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삶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 뒤에도, 그 사람의 삶은 환하게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이름은 출세한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아름답게 사람들에게 추억되는 이름일 수도 있고, 또 욕을 퍼먹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

시간이 흐르는 것도 번짐과 같다.
어떨 때는 또렷하게 시간의 구분이 지어지지만,
어떨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뒤바뀌어 있기도 하지. 

화자는 세상의 이치를 '번짐'이란 단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란다.
주제는 <번짐을 통하여 살핀 세상의 이치>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사랑이란 언제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번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를 한 편 보자.
복효근의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이라는 시다.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복효근,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 
 

 하트 모양으로 생긴 토란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아름다운 언어들과
사랑을 거기 밀어 넣었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어렵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아닐까 한다.
문학을 가르칠 필요 있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떨 때는 철학적인 생각과, 역사를 한 편에 담고 있는 것이 문학일 수도 있단다. 

그의 <시론>을 읽어 보자.
장석남의 '시론'은 잔잔한 물과 같다.
낮고, 고요하면서, 샘물이면서 갈증 그자체인... 시인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물
맛있는 물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한번 더 낮게
조용히

시에도…… <시법(詩法) - 샘물이며 갈증인>

 

시를 쓰는 일은 그만큼 절실한 표현의 '갈증'이 있을 때이다.
그리고, 맛있는 물처럼 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시>의 효용이기도 하다.
철학자의 웅변처럼, 역사가의 사변처럼 명확한 교훈을 드러내주지 않지만...
문학은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그리고 낮게
조용히
사람의 갈증을 채워주는 힘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은
사람을 읽는 일이고, 세상을 읽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을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세상 살이를 <문화>라고 부르니 말이다. 

사람과 세상살이를 읽는 문학을 읽는 일도 그래서 때론 의미가 깊숙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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