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 '파랑새'란 시가 실렸더랬다.
한하운은 '한센씨 병' 환자였단다. 나환자라고도 하지.
경상도 사투리로 '문둥이'라고 하던 병이었다.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해서 '천형'이라던 문둥병은
이제 거의 발병이 많지 않은 질병이 되었지만,
못먹고 헐벗던 시절엔 가끔씩 이 병에 걸리곤 했단다.
그러면 마을에서도 격리되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마을에서도 박대받을 일만 남은 인생들에게 삶이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을 게다.
일제는 이 나환자들을 전라남도 고흥의 '소록도'란 섬에 격리할 생각을 하고 모든 나환자를 거기로 모았다.
질병 치료보다는 격리를 위한 목적이 크겠지.
그곳의 참상을 그린 소설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란 작품도 있다.
나병은 느닷없이 살이 썩고, 신경이 삭으면서 손가락 발가락이 짓물러 덜어지고
눈썹이 빠지면서 얼굴에 버짐같은 것이 피는 병이다.
그러자니 먼 길을 걷노라면 발가락 몇 개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힘든 삶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하운의 노래는 목이 메인 울음을 대신한 시였을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아주 간단한 시다.
그렇지만, '파랑새'란 한 단어로 '나병환자로서의 비통, 병고, 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를 형상화 했다.
나환자에게는 성한 인간들의 세상이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파랑새가 되면 푸른 하늘, 푸른 들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담겼다.
거기서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자유로이 울겠다는 것은,
현실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를 절절히 읊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시 중에서 노래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바로 <보리피리>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매 연이 <보리피리 불며~~ 그리워>로 되어 있다. 피 - ㄹ 닐니리는 후렴이지.

오로지 '그리움'만이 노래되어 있다.
고향의 봄언덕, 어린 시절...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 얼마나 그리울까.
'인환의 거리'는 '임금이 살던 경기 지역'에서 온 말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쉬기를 좋아하지만,
또 깡촌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도시가 그리울 것이다.
마지막 연에
방랑한 산하가 <얼마나(기幾)> 많았는지...
그 눈물 지으며 넘던 언덕은 얼마나 많았던지...
형상화 되어 있다.
이 시로 한하운은 <보리피리 시인>이란 별칭을 갖게 된다.
기산하의 '기'는 중국어 또는 한문에서 '몇'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의문사로 보면 된다. 중국어로 '지'로 읽는다.
몇 명~ 이러면 '지 웨이 幾位' 이렇게...
그런데, 이 한자의 쓰임이 특이한 것이 있다.
수학에서 쓰이는 '기하 幾何'란 말.
'몇 기'에 '어찌 하'가 쓰인다. 붙이면 '몇어찌'가 된다.
이 말은 뜻으로 풀이하면 안 된다.
기하라는 말은 기하학의 영어 어원 'geometry'를 음차한 것으로 봐야 된다.
소리만 빌린 것이지.
'지오메트리'에서 '지오'만 따온 것이다. 그걸 한자로 '기하'로 쓴 것을 일본에서 다시 '기하'로 쓴 거지.
한하운은 이런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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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뜻이 어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겨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국땅 흙 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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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전라도 길>이란 시를 읽어 보자.
소록도가 전라남도 고흥에 있어서 생긴 시일 것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포장도로가 아닌 <붉은 황톳길>은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이 걸어야 하는 유형(流刑)의 길이다.
숨막히는 더위도 문둥병을 얻은 화자의 운명적인 고통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들 문둥이끼리'란 표현에서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루를 걷는 '쑤세미 같은 해'는 '거칠고 힘든 하루 '가 저물어감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의 '쩔름거리며' 걷는 길은 문둥병을 가진 화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적 고통이 담긴 표현이다.
지까다비는 일본식 '작업화'다.
걷다보니 '발가락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담담하다.
그래서 슬픔이 더 짙은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벗어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이렇게 표현하니 더 슬프구나.
가도가도 천 리... 아~ 이 먼 길은 그저 고단한 길이 아니라,
천형의 병을 앓고있는 이의 바스락 바스라질 듯한 가슴이 그대로 묻어난다.
절망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지만, 그 슬픔이 금세라도 묻어날 것 같다.
비극적 운명은 떠돌이(유랑)의 여정에 비유되어 형상화되고 있다.
사람이 '잘사는' 일과 '잘 사는' 일이 있다.
앞의 것은 그저 풍요롭게 사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
잘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쓰지는 않아야 하겠다.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가 아닐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한번 되돌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