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의 시는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시 감각에 경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갔던 감각을 가졌던 시인이니, 그 당시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기 성씨를 바꾸고 연예인들이 예명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1930년대에 김해경이란 사람이 자기 이름을 '이상'으로 불렀던 것은,
요즘 어떤 사람이 자기 예명을 '싸이(미친 놈)'라고 부르는 것과는 천지차이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감각적인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저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가을이,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길)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소년 시절을 되돌아 보는 일은 새로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이처럼 감각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기도 어려운 일이다.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언덕길'은 정말 상상화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런데 거기 '어머니의 상여'가 놓여 있으니,
슬프고 좌절스런 어두운 그늘의 소년 시절을 금세 떠올릴 수 있겠다. 



첫사랑도 금세 떠올랐다 사라지는데, 그것도 시각적으로 감각화하는구나.
'조약돌처럼 집어들었다가 잃어버린 첫사랑.'

그래서 화자는 혼자서(호저) 시도때도 없이 그 길을 넘어간다.
강가로 내려갔다 돌아오는데, 또 감각적으로 노을에 함빡 자줏빛으로 젖어서 왔단다. 
'노을'과 '놀'은 함께 쓰일 수 있는 복수 표준어란다.
그리고 여기서 '노을'에 '젖은' 것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많이많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이 남았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자랐다.
마치 몸이 '감기'를 앓았던 것처럼, 마음도 '감기'를 앓았다.

고향의 버드나무, 오래오래된 그 버드나무,
밑에서
화자는 '어두움'의 근원인
어머니와
계집애를
멍하니 기다린다. 

화자에게 '어둠'은 소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어둠이 화자의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제 세월이 지난 뒤,
그 어둠이 뺨의 얼룩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건... 화자의 생에 낙인처럼 각인된 그 어두움이
어린시절의 가장 깊은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마음 속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나면서 삶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이기도 하단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시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뭘까?
화자의 '길' 위에는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와 '소녀'에 대한 추억이 깔려있다는 것이고,
그 '어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슬프고 가슴이 싸한 애상이란 것이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지나 살아온 시인의 삶에는
왠지 서러운 삶이 가득했을 것 같구나.
그래서 화자는 그 서러운 길을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길'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바다와 나비'는 그 험한 세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세상은 '의지'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자는 멋도 모르고 세상으로 뛰어든 '공주'와 같은 존재였지. 

아무도 바닷속의 수심을 일러주지 않아서,
흰나비인 화자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던 거다.
푸른 무(옛날엔 '무우'로 표기)밭인 줄 알고 뛰어든 곳에선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곤 했던 것이고,
공주같은 나비는 지쳐서 돌아온다.  

꽃이 필 듯이 봄이 오는 3월달인데,
바다엔 꽃이 피긴 커녕 찬 파도만 일렁인다.
그래서 서글퍼진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걸렸는데, 마음은 시리고 시리다. 

여기서도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살아있구나.
'새파란 초생달'은 시각적 표현인데, '시리다'고 했으니 촉각적으로 표현했다.
시각의 촉각화. 역시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이렇게 화자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 1930년대 시인들의 특징 중 하나란다.
김광균처럼 '공감각'을 많이 사용한 시대이기도 했지. 
모더니즘이란 것이 이렇게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한 특징을 가졌단 것을 기억해 두자꾸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우리 집처럼 평온하리라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는
깜짝 놀라는 공주처럼 당황스럽게 만나는 곳이 세상이기도 하다.
민우가 기억하는 '길'이 김기림의 시처럼 '어둠'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민우가 '나비'처럼 깜놀~하는 세상을 놀라움으로 만나지 않기도 역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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