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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 동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 유명하여 제제는 이제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책을 다시 번역하여 완역으로 재탄생시킨 박동원님은 에필로그에서, 처음엔 브라질의 문화를 모르고 글만 번역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인디오의 피가 흐르는 엄마와 포루투갈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제제는 지독한 가난과 무관심, 매서운 매 앞에서 세상을 향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가 뽀루뚜까를 만나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뜨게 된다.
이 한편의 성장소설은 작가 바스콘셀로스의 자서전적 소설이며 제제는 작가의 어린시절 자화상과도 같다. 남다른 감수성과 상상력을 감안하더라도 좀 이르다싶은 나이에 너무 가혹하다할 정도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부화하는 제제가 어쩌면 우리 정서에는 이질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아적 기억은 아련하기 마련이고 성인이 된 작가는 그 기억의 줄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 부여하지 않았을까.
어찌보면 우리 정서에도 잘 부합하지 않고 주제도 평범하기까지 한 이 소설이 오래도록 읽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세 가지의 보편적인 정서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정은 세상 모든 것과 세상 어느 사람과도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이다. 나를 그대로 이해해 주고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보고 나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함께 하면 그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우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지배적이던지 설교나 훈계를 늘어놓으려한다던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주장하려한다면 우정은 성립되기 어렵다. 부모자식간이든, 사제지간이든, 나무든, 새든, 우정이 바탕에 깔린 감정만이 온당한 관계를 맺어준다.
제제는 어린 라임오렌지나무와도, 작은새와도, 아리오발도씨와도, 동식물과 연령을 초월하여 우정을 맺을 줄 안다. 아버지의 정에 굶주린 제제는 뽀루뚜까에게 아버지의 정을 애원하고 뽀루뚜까는 가식적이지 않은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제제를 품어준다. 제제는 뽀루뚜까와의 우정으로 세상은 사랑이 있는 살 만한 곳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우정은 우리를 성장케하는 참된 의미의 정서가 아닐까.
또 하나는, 성장에 필요한 통과의례는 비밀스럽다는 점이 매력이다. 기억의 내밀한 저장창고에 숨겨둔 몇가지의 일들을 어른이 된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만 통과하고 나면 눈부신 바깥세상이 나올 거라는 걸 어렴풋이 믿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저마다의 통과의례를 치른다. 제제는 뽀루뚜까와의 꿈같은 시간이 저만의 백일몽이란 걸 깨닫게 되지만,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몸 담아야하는데에 필요한 고통은 어느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비밀스럽기 때문에 책임 또한 자신의 몫이다.
내 영혼의 비밀스런 통과의례에 동참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기장, 엄마도 모르는 어느 친구, 일기장에도 쓰지 않고 가슴에만 새긴 어떤 일들?
마지막으로, 우리네 정서는 슬픔의 그것에 닿아있다는 점이다. 박동원님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운다고 하면서, 제제의 슬픈 정서의 원류를 포루투갈인에게서 찾는다. 포루투갈 어느 해변 가파른 절벽에 제 몸을 부딪는 시퍼런 파도를 배경으로 파두를 소개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때 내가 느꼈던 서늘하리만치 가슴을 때리는 그 사진의 슬픈 정서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무엇을 대하든 슬픔을 먼저 만나는 형이었다. 지금은 기쁨을 먼저 만나는 형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나에게도 슬픔의 근원모를 샘이 숨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제가 극단적인 애증을 보였던 아버지와 뽀루뚜까가 모두 포루투갈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한편의 성장소설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알껍질 속의 세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은 모두 철이 들어야하나요?"라고 던지는 물음 속에 철이 들고 싶지 않았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형도의 분석을 빌리면 이 책의 감동은 '철들기 전의 세계'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에 있다.
흐릿한 기억의 유년시절로 뒷걸음쳐 달아나고픈 욕망을 느낀 적이 있다면 제제의 혹은 바스콘셀로스의 그런 어리석어 보이는 물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말인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