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청목 스테디북스 58
에리히 프롬 지음, 설상태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4월
절판


오늘날의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동일성'을 의미한다. 즉 평등은 추상적인 동일서, 곧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시대의 진보의 징표하고 찬양되어지는 몇 가지 업적들, 예를 들면 남녀 평등 같은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28쪽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자신을 세계와 결합한다.

황홀경 속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일시적이며 일치에 의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합일과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31쪽

공서적 합일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 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이 타인과 분리되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신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역설이 성립한다.-34쪽

사랑의 한 측면이 되는 지식은 주변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꿰뚫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43쪽

우리가 우리 존재의 내면이나 타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인식의 목표는 더욱 더 멀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영혼의 비밀, 즉 '인간'이라는 내면의 핵심을 향해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이렇듯 인간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갈망 속에는 깊고도 강렬한 잔인성과 파괴욕이라는 기본적인 동기가 내재해 있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바로 사랑이다. -44-45쪽

성숙한 인간은 외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며, 자기 내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형성한 사람이다.-60쪽

형제애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감, 보호,존경,지식과 더불어 그의 삶을 심화시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무기력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애의 시작이다.-64-65쪽

꿀은 생명의 달콤함,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 수 있지만, 오직 소수만이 꿀도 줄 수 있다. 꿀을 주기 위해서 어머니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한다.-67쪽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인 '의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이며 판단이고 약속이다.-74쪽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하기는커녕 정반대 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자신을 증오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과 보살핌의 부족은 그의 생산성 부족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며 자신을 공허하고 좌절된 상태로 남겨 둔다.-79쪽

"알지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대의 질병이다."

궁극적인 실재, 궁극적인 일자는 말이나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다.-94쪽

사랑의 기술에 있어 사랑의 기술에 익숙해지고자 열망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기 생애의 모든 면을 통한 훈련, 정신, 인내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37쪽

진실로 정신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귀중한 조건이 된다.-138쪽

사랑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조건은 '자아 도취의 극복'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오직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만을 현실적인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며, 외부 세계의 현상은 현실성을 갖지 못하며, 그것들은 자기에게 유익한가 혹은 위험한가 하는 관점에 따라 경험하게 된다. 자아 도취의 정반대되는 것이 객관성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으로 보며 그러한 객관적인 상을 자기의 욕망이나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145쪽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이성'이다. 이성의 뒤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147쪽

활동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을 뜻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활동이다.-155쪽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렇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외적인 개인적 현상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하고 있는 합리적 신앙이다.-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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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2-1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즐거운 한 주 아자아자~ 저도 오래전 이책을 읽고 감명 받아 내용정리를 해 두었었는데 이번에 밑줄그은 것 훑어보며 다시 되새김해보았어요^^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구판절판


내가 적의 존재를 믿는 것은, 밤낮 할 것 없이, 내 삶의 길목마다 그것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적이란 내부로부터 파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파괴해버리지요. 그는 각각의 현실 속에 내재하는 조락의 기운을 드러내 보여줍니다.-33쪽

인간이란 하나의 성채城砦이고 감각들은 그리로 드나드는 문들이라고 했습니다. 청각은 그러니까 가장 방비가 허술한 입구인 셈이지요.-42쪽

나는 극도의 형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엄격한 화장법에 의거해 행동하는 셈이죠.

그래 그 '법'으로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름다워지셨소?

화장법이란 보편적 질서의 학문이자 이 세상을 결정하는 지고의 도덕률이라오. -113쪽

자아라는 종교는 이상도 하구만. '나는 나입니다. 나일 뿐이고, 나 이외에 다른 아무도 아닙니다. 나는 나이기에,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아니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나무도 아닙니다. 나는 세상 다른 모든 것과 뚜렷이 구별되며, 내 육체와 정신의 경계 안에 한정됩니다. 나는 나입니다.-130쪽

3백년 전의 어느 대단한 철학자가 자아란 가증스런 거라고 말할 수 있고, 지난 세기의 위대한 시인 하나가 나는 곧 타자라고 말해도 되는 건, 다 그래서야. 그건 마치 심심풀이 땅콩처럼, 살롱의 안락의자 속에 푹 파묻혀서 나누는 대화에나 써먹기 좋은 거지. 각자 자신의 자아에 죽치고 눌러 앉아,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우리의 든든한 확신에는 눈곱만치의 영향도 주지 않으면서 말이네.
-131-132쪽

누구나 자기 내부의 적을 너무 오랫동안 입막아두고 있으면 이렇게 되는 법이라네. 그러다가 일단 마이크를 붙잡게 되면 절대로 놓지 않으려 드는 거지.-132쪽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는 자네의 일부일 뿐이거든. 모르는 것과 잊는 것은 아주 다르지. 만약 사람들이 모든 기억을 잃지만 않는다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해온 주제에 관해서도 얼마든지 서로 의견을 나눌 수가 있는 거라네.-133쪽

난 자네 자신을 파괴하는 자네의 일부분이야. 거대해지는 모든 것은 자기파괴능력을 배가시키는 법이지. 내가 바로 그런 능력이고.-136쪽

가장 심각한 사랑에 빠진 남자조차도 - 아니, 특히 그런 남자일수록 - 언젠가는, 비록 일순간이나마, 자기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법이라네. 바로 그러한 순간, 그게 바로 나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 감춰진 모습을,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무마시키고야 마네. -141쪽

물질적인 증거라는 것은 너무도 투박하고 멍청해서 확신을 굳혀주기보단 오히려 그걸 약화시키기 마련이라네.-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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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1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통 작품을 이걸 읽고 반했다가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실망했답니다 ㅠ.ㅠ

프레이야 2006-02-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둘다 '살인'이 등장하네요.. 전에 읽었던 것들에 밑줄 친 것 올려봅니다.^^

하늘바람 2006-02-1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멜리 노통좋아요

프레이야 2006-02-11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그러고보니 앙테크리스타, 와도 비슷한 거 같네요.
 
하나도 안 심심해 알맹이 그림책 4
마갈리 보니올 지음,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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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바람의아이들>에서 신간을 받았다. 뜻밖의 선물에 기쁘고 새 책을 볼 수 있게 보내주시니 고맙기도 하다. 오늘 받은 책은 그림책이다. 프랑스 그림책과 잘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그림책들을 간결한 언어로 바꾸어 소개해주는 최윤정님의 번역이다.

표지를 보는 순간 난 마냥 단순해지고 눈이 맑아지며 가쁜 숨이 한 박자 느려진다. 심심한 듯, 안 심심한 듯, 눈을 감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팔베개를 하고 혼자 누워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아이의 배 위에는 곰돌이인형 하나가 느긋하게 누워있다. 아이가 누워있는 곳은 어딘지 모르겠다.

책장을 넘기면 이야기는 아이의 마음처럼 펼쳐진다. 어른의 마음보다 빈 공간이 많고 말은 짧지만 핵심을 찌른다. 빈 공간은 흰색이고 한번에 죽죽 그은 듯한 검은 연필선이 아이가 그린 그림 같다. 짤막한 대화체의 문장은 콕콕 박아 말하듯 볼드체로 진하게 씌어있다. 단순하고 밝은 색채로 무덤덤하게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 끝까지 이어진다. 물을 많이 섞어 칠한 수채화의 느낌이 깨끗하다. 

표지에서는 돌계단 같이 보이던 곳의 주위로 녹색 풀들이 나 있다. 아이는 곰돌이에게 뭐하냐고 묻고 곰돌이처럼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옆에 앉는다. 아이가 보기에는 곰돌이가 심심해 보이나보다. 아이는 곰돌이에게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가리키며 보여주고, 양말을 벗고 발가락에 햇빛을 쏘인다. 그리곤 발가락으로 풀도 뽑는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풀을 꽂고 뿌듯해하는 아이 옆에서 발가락이 없는 곰돌이는 시무룩한 표정이다. 여기까지 얘들이 하는 짓을 구경하고 있던 달팽이 한 마리는 돌계단의 귀퉁이를 타고 기어올라 이제 어디론가 가고 보이지 않는다. 곰돌이보다 더, 할 수 없는 게 많은 달팽이는 속상했을까. 이건 그림책을 다 보고나서 말해보자.^^

이번엔 나도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놀이, 그림자놀이가 나온다. 역시 아이들이 곰돌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동물, 토끼가 등장한다. 하지만 불쌍한 곰돌이는 손가락이 없으니 제대로 안 될밖에. 침을 모아 볼이 터지도록 불어 만드는 풍선놀이도 곰돌이를 침울하게 한다. 삐쳐있는 곰돌이의 표정이란~~ 이 때 아이는 이런 친구를 위로하고 힘을 실어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지녔다. 귀로 갖가지 장난질을 하는 곰돌이를 보시라. 아마 아이들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곰인형으로 이런 놀이를 해보았을 테다. 나도 아이가 어릴 적에 곰인형을 가지고 이런 쇼를 해보인 일이 있다. 아이가 울적해하는 날이면 곰인형을 가지고 손짓 발짓 다 하며 꾸벅거리기도 하고 갸우뚱거리기도 하며, 아이앞에서 어설픈 복화술 비슷한 것도 하곤 했다.

결국 곰돌이는 아이의 칭찬에 으쓱해하고 이제 둘은 마지막 놀이를 한다. 독자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얘들이 안 심심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을 테다. 마지막 놀이.. 여기서, 어지럽게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사알짝 날려주듯 신선한 바람이 마음에 불어들어온다. 요즘 아이들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뭔가 불안함을 느끼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를 켜고 오락거리를 찾고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과 왔다갔다 뛰고 굴리며 온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일쑤다. 하지만 밖에 나가 하늘아래 구름을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어 본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이런 아이에게 느림보에 게으름쟁이에 명석하지 못한 아이라는 딱지를 붙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나 인형을 사주는 일은 허다하지만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금세 새로운 걸 찾고 더 비싼 걸 요구한다. 물질로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우기란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 아이들은 차츰 혼자서 놀 줄을 모른다. 무언가 세트로 구비된 도구가 있어야하고 적당히 경쟁심도 필요하다. 자연에 있는 모든게 장난감이 될 수 있고 경쟁심리보다 서로를 재미나게 해주기 위한 착한 마음이 우선되면, 그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놀이가 된다. '아무 것도'는 '아무 거나' 라는 말과 통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데서 무어라도 할 수 있는, 창의적 가능성으로 열린 길이 보인다.

참, 어디론가 사라진 달팽이를 잊지 않고 있는지. 아이와 함께 놀지 않은 달팽이는 전혀 속상하지 않을 것이다. 달팽이는 느리게 한 걸음씩 가는 그 일이 지루하지 않을 테고, 구름처럼 그렇게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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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2-1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윤정님 번역이라니 덮어놓고 궁금합니다.

프레이야 2006-02-1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반딧불님도 최윤정님의 글을 좋아하시는군요. 이 책은 글이 아주 적은 그림책이긴 하지만요. ^^
 
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구판절판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직업이 바로 작가라는 직업이오. 문체니 주제니 줄거리니 수사법 같은 것들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오로지 작가 자신이니까. 그것도 말이라는 걸 갖고 그렇게 한단 말이지. 화가나 음악가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네 작가들처럼 말이라는 잔인한 도구를 갖고 그렇게 하진 않소. 암, 기자 양반. 작가는 음란해야 하오. 음란하지 않다면 회계사나 열차 운저누나 전화 교환수 노릇을 하는 게 더 낫지. 다 존경받아 마땅한 직업들 아니오.-21쪽

나는 음식을 먹듯 책을 읽는다오.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책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책이 나를 구성하는 것들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는 거지. 순대를 먹는 사람과 캐비어를 먹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잖소.-76쪽

'사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한다 해도 잊어버린다.' 이토록 실상을 명쾌하게 요약하는 말이 어디 있겠소.

읽히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특혜지. 어떤 이야기든 다 쓸 수 있으니까. -79쪽

이 시대처럼 가증스러운 시대는 없었다오. 한마디로 허위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요. 허위적인 건 불성실하거나 이중적이거나 사악한 것보다 나쁘지.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로 장식되는 졸렬한 자기만족을 맛보기 위해서 말이오. 또 남들에게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정직하고 사악한 거짓말, 남을 궁지로 빠뜨리기 위한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지. 사이비 거짓말, '라이트'한 거짓말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미소를 띤 채로 욕을 해댄다고, 호의를 베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오.-82쪽

귀는 입술의 울림상자요, 내면을 향한 입이라고.

손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거요. 글을 쓰면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작가는 당장 절필을 해야하오. 쾌감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글을 쓴다는 건 패륜이오.-95쪽

독서 혹은 非독서와 결부된 대화가 얼마나 거만함으로 가득할지. 그리고 또 기타 등등하며! 그러니 나한테 글쓰기가 강간처럼 해롭지 않다느니 하는 얘기일랑 하지 마시오.-96쪽

글을 쓴다는 건 소통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왜 글을 쓰냐고 물었으니, 매우 엄정하면서도 매우 배타적인 대답을 들려드리리다. 그건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요. 글쓰기는 날 쾌감의 절정으로 이끌곤 하오.-97쪽

문제는 읽는 장소가 아니라, 읽기 그 자체요. 내가 바라는 건 내 책을 읽되, 인간 개구리 복장도 하지 말고 독서의 철창 뒤에 숨지도 말고 예방 접종도 하지 말고 읽으라는 거요.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부사 없이 읽으라는 거지.-177쪽

창작 행위에 있어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오. 정해진 형태도 의미도 없는 우주와 마주하여 작가는 조물주 노릇을 할 수밖에 없소. 작가가 대단한 글재주로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한, 사물들은 제 윤곽을 지니지 못할 테고 인간의 역사 또한 놀란 입만 쩍 벌리고 있게 될 거요.-226쪽

레오폴딘을 목 조르면서 내가 그애를 진정한 죽음으로부터, 즉 망각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거요. ....... 이 세상은 살인자들로 득실대고 있소.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 놓고 그 사람을 쉽사리 잊어버리는 사람들 말이오. 누군가를 잊어버린다는 것, 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소? 망각은 대양이라오. 그 위엔 배가 한 척 떠다니는데, 그게 바로 기억이란 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기억의 배는 초라한 돛단배에 지나지 않는다오.-230-231쪽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언젠가는 진부한 표현들 너머 말이 그 처녀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황무지'에 도달하리라는 일념으로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악취미다 싶은 말을 하면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지고지순한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 말싸움과 하찮은 불평불만을 영원히 넘어서는 것 말이오.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일 거요. '사랑하오'라고 말하면서도 음란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는.-251쪽

문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변별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오. 우리의 숭고한 대화도 불가능했을 것이고.-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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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구판절판


- 소리의 근본은 물(物)을 넘어서지 못한다.
- 하오면, 물이 어찌 사람을 흔드는 것입니까?
- 울림이다. 울림에는 주객이 없다. 그래서 소리가 울릴 때, 물과 사람은 서로 넘나들며 함께 울린다.......
- 하오면, 듣는 자가 여럿이면 한 소리가 여러 소리가 되어 소리는 정처 없는 것입니까?
- 니문아, 네 말이 너무 어렵구나. 이 널판이 악기가 되는 날, 아마도 알 수 있을런가-21쪽

- 소리가 저 무너지는 고을들을 어찌할 수 있으랴.

널판에 육기가 빠져 재료의 뼈대만으로 마르는 날, 널판에 울림통을 파고 그 위에 열두 줄을 매어서 튕기면 마른 널판이 줄의 떨림을 울려주고 또 재워주며, 소리와 소리 사이를 이어줄 것이었다. 새 시간이 그 열두 줄 위에 내려앉고, 그 줄이 울릴 때 시간의 빛들은 끝없이 태어나서 이어지고 또 흩어질 것이며 소리는 그 시간 위헤 실려서 솟고 또 잦으면서 흘러갈 것이었다.-86쪽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 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 소리는 덧없다. 흔들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소리의 본래 그러함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사는 일과 같다. 목숨이란 곧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리는 동안만이 사는 것다. 금수나 초목이 다 그와 같다.-139쪽

소리가 곱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금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 덧없는 떨림을 엮어내는 틀이다. 그래서 금은 사람의 몸과 같고 소리는 마음과 같은데, 소리를 빚어낼 때 몸과 마음은 같다. 몸이 아니면 소리를 끌어낼 수 없고 마음이 아니면 소리와 함께 떨릴 수가 없는데, 몸과 마음은 함께 떨리는 것이다.

떨림은 시간과 목숨이 어우러지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목숨은 늘 새롭고 새로워서 부대끼는 것이며 시간도 그러하다. 소리는 물러설 자리가 없고 머뭇거릴 자리가 없다.-140쪽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아정과 번잡은 너희들의 것이다.-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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