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아니 에르노 시점.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대학 강의실에서의 아니 에르노.
경멸과 욕망의 이중감정을 담은 언어 자각.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자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 소설, 잡지 <유행의 메아리>에서 읽은 충고들, 뮈세의 시 몇 편, 내가 큰언니라 생각하는 ‘마담 보바리‘의 지나친 몽상들 같은 작은 지식을 가지고,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홀로 찾아낸 쾌락의 욕구가 적절하지않다는 생각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에게 세상의 반쪽은 정말 미스터리였지만, 그 반쪽은 축제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남자아이들과 나 사이의 불평등, 신체적인 것 외의 다른 차이에 관한 생각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재앙이었다. - P115

나는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에서 제대로 행동할 줄 몰랐다. 쌀쌀맞은 동시에 바람기 있는 여자, 바보 같은 미소, 숨 막히는 경탄, 그리고 맡은 역할에 대한 피로, 더는 스쿠터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탓했다. 남자아이들은 언제나 남자아이들일 거니까. 영어 문법에서는 보편적 진리의 예로 "Boys will be boys" 라는 문장을 든다. - P128

내가 계시처럼 기다려온 그 학년, 그 반에서 종교가 나를 망가뜨리게 둘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대도시와 높다란 고택들 사이를 누비는 익명의 도로, 어린 시절에 내게 보상이 돼주었던 도시 루앙을 갈망한다. 축제의 도시였던 루앙은 결국 내가 매일매일을 보내는 도시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상점, 벽에 온통 스며든 커피 냄새, 날씨에 마법을 거는 노랫소리, 익숙한 생활과 죽음을 떠날 것이다. 나는 충분히 강한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고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더니 외친다.
"네가 원하면 떠나라. 여자아이라고 엄마 치마폭에 영원히 남아 있으란 법 없다!" - P136

그를 이해하고, 그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상냥해지려는 노력, 나는 그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와, 그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내가 섭렵한 모든 것, 재즈, 현대미술, 심지어 어느 조류학자의 새소리, 어느 가톨릭 신자를 위한 샤르트르 대성당 순례와 기도, 그리고 물집 잡힌 발까지. 기쁘게 해주기. 어쨌든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가 아니라, <마지막 일몰>을 보러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도 서부영화를 좋아할 권리가 있으니, 나는 혼자 알랭 레네의 영화를 보러 가면 된다. 상호교감이라곤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바꾼다. - P145

폴 엘뤼아르의 시에서 "나는 간다 생을 향하여, 나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다"라는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바로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남자들이 경멸적으로 우리를 계집애, 멀대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어휘 측면에서 명백하게 구분하지 못했고, 흔히 남자애들을 멍청이, 새끼, 고추들로 구분해 불렀지만 일다와 나는 이 단어들의 혐오스러운 의미를 잘 몰랐다. 연애할 만한 가치가 없는 하찮은 녀석들이란 뜻으로 나는 고추들이란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가 멀대라는 단어의 대응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계단식 강의실의 남자동료들, 식당 친구들, 허공을 쳐다보는 기차 여행객들 중 누구에게도 나는 3주 이상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누리는 자유의 풍경 속에 있었을 뿐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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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마라, 공부만 해." 어머니의 말이 모든 것을 정리해준다. 강압적이지만 안심이 되는 말. 하지만 내가 12년 동안 선생님에게서 듣고 또 들었던, 헌신과 희생을 자극하는 그 말들은 분명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몸은 불결한 것이고 재능은 죄악이다. 기도는 근엄하지 않지만, 성녀들의 이야기, 고초를 당하고 사자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지고, 채찍질당한, 흰 어린 양이라는 뜻의 아녜스, 비슷한 시나리오의 블랑딘*, 심장 한가운데 칼이 박힌 마리아 고레티**, 그리고 잔 다르크, 잔 다르크 이야기에 나는 교실에서 울기까지 했다. - P76

노력을 하고 희생을 해도 예견된 행복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파렴치한 행동, 예를 들면 좋은 점수를 받으며 느끼는 기쁨,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는 즐거움, 어머니에게서 사탕을 훔치는 즐거움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하지만 내 타고난 장난기, 나의 조심성 부족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다. 공책에 얼룩을 묻혀놓고, 식탁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바느질 천에 묻은 얼룩진 손가락 자국들 "청결은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여러분!" 내 본모습이 드러난다. 흠집, 골치 아픈 단어. 흠잡을 데 없는 무결점 마리아. 어떻게 난폭함과 욕망 같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은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 P78

나는, 나를 숨기는 편이 나를 위해서 더 낫다고 느낀다. 이런 태도가 나를 구해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나는 욕망과 짓궂음, 견고한 어두운 측면을 내 안 깊숙이 숨기며 나를 보호했다. 마찬가지 방어 반응이었겠지만, 나는 성모마리아가 나에게 출현할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성모가 출현하면 내가 성녀가 돼야만 할 텐데,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파파야를 먹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내 ‘그것’을 사용해보고 싶었고, 의사나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들의 설교에서, 나는 몇몇 부분은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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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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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외부인, 우리 안의 외부인


10년 전에 나온 “지상의 노래”와 약간은 겹쳐오는 이미지가 있다. 반복된 소재와 어느 정도의 클리쉐가 있지만 여운이 깊은,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났다. 교과서적이랄지 서사와 문장이 한구석도 치밀하지 않은 데가 없다. 당연한 것이지만, 첨자와 오탈자 없이 깔끔한 편집/교열도 마음에 든다.
2018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잡지 연재 후 코로나 점령기 동안 고치는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라며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의식의 표출이 절제되고 이야기가 조금 튀어 나온 것 같은 변화가 감지된다. 그 공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으니 내용과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쓴다.
이야기에 일부 영감을 주었을, 지금도 세계 어딘가를 자전거로 떠돌고 있을 임송학 님도 어떤 분인지 궁금해 찾아보았다.

https://m.blog.naver.com/cafeoki/220799684093

어떤 진실은 말이 아니라 말을 안에 끌어안은채, 안에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하는 행동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그럴 때 드러나는 것은 드러내지 않은 말이다. - P279

사람이 이렇게 외롭게 내버려진 채 잊힐 수 있는가? 황선호는 무거운 질문 앞에 자기를 세웠다. 그가 살던 도시와 이 도시 상의 물리적인 거리를 변명으로 앞세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그는 죽은 자의 외로움은 순전히 산 자에 의해 비롯되는 것, 그러므로 산 자의 죄라는 생각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낯선 곳에 있으면 낯설고 이상한 곳에 있으면 이상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낯설고 이상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낯설고 이상한 곳에 있는 것은 이상하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섦과 이상함이 아니라, 그것은 외로움이다. 말할 수 없이 무거운, 견딜 수 없는, 더할 수 없이 철저하고 처절한, 절대적인 외로움. 이 외로움을 이길 외로움은 없다. - P300

‘외부인‘은 그런 외지인들에게 이들이 새롭게 붙인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외지인이나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 소속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입니다.
‘외부인’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기들과 구별하기 원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된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외부인, 소속이 없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에서 배제해도 되는 사람,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신과 성향과 목적과 관습, 즉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이 당연한 무언가를 빼앗아갈 것이고, 내부를 더럽힐 것이고 마침내 혼란에 빠뜨릴 거라는 식으로 근거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 P311

《외부인들》은 류의 첫 소설이다. 그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의 대부분은 실제 있었던 일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름이나 지명까지 그대로 사용했다. "나는 거의 가공하지 않았습니다. 내 어쭙잖은 상상력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의 그 생생한 경험을 훼손하지 않을까 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개들의 활약에 대한 삽화 역시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꾸밈없이 쓰려고 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 - P325

"나는 그 도시에 없는 사람이에요. 벌써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래요. 여기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앞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이기를 원해요. 친구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해요." 황선호는 보보체리나무 밑에서 그 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 나무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렸다. 황선호가 끝내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한 그의 옛 동료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기운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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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네요?
전 사두기만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우 작가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 작가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하거든요.
하루키 작가도 늘 문학상 후보에 오르시던데 그렇다면 이승우 작가님도 만만치 않은 후보가 되실 수 있으실텐데?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프레이야 2022-10-27 21:25   좋아요 1 | URL
흡입될거예요. 결말은 예상되는 이야기이고 어찌 보면 많이 해온 이야기이지만 빨려들어갑니다. 노벨상 수상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요.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 같아요. 이국에서,도 정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볼 점도 많고 사유를 전개하는 문장도 좋고요. 오랜만에 읽었네요. 그동안 작품들 많던데 찾아읽을 것 같아요. ^^

희선 2022-10-28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음에 드셨군요 저는 책 볼 때 그런 거 별로 마음 안 쓰는군요 아니 오탈자는 없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어떤 때 그런 거 많은 책을 다른 사람한테 줄 때면, 제가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10-28 08: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 그냥 읽다보면 눈이 들어오니까요. 이게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띄어쓰기도 정확하면 금상첨화다 싶어요. 대부분이 당연히 그렇지만요.
 

광야. 만나. 자연주의자들의 개더링.
완전한 자유와 평화. 친구들의 집.

거주지가 아니고 통과해 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보보는 광야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환경이 열악하다고 불평하지 않는 까닭이 그 때문일 것이다. 더 좋은환경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차피 거주지가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어떻게든 연명하면서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 열악한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상한 평안함도 그런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현실의 비참함을 이기기 위해 그런 인식을 만들고 부추기고 키웠는지 모른다.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00

촛불이 일렁이며 기묘한 그림을 벽에 그렸다. 노래가 합창이 되고 좁은 실내가 공연장이 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인가 그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황선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도 엉겁결에 일어나 사람들 속에 섞여 춤을 추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이건 무얼까, 가슴속을 뜨겁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걸까.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음악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밤이 깊었는데도 노래와 춤은 멈추지 않았다. - P205

형제라는 호칭은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도 형과 아우에게 주어진 태생적인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시기와 다툼과 분쟁이 발생할 소지를 품고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교수는 말했다. 그는 온 인류가 친구가 되는 완전한 세상에 대한 포부를 자주 피력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 아래 있지 않다. 친구는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에게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다. 인간이 가진 어떤 조건도, 예컨대 피부색이든 생김새든 몸무게든 성이든 종교든 재산이든 지능이든 나이든 취향이든 차별의 구실이 되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친구가 되는 세상을 지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친구로 불렀고 자기도 친구로 불리기를 원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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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흡입력과 사유의 깊이에 다시 놀란다.
이승우! “신성과 순수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나는 그런 존재와 같다. 저 세계를 빠져나왔고, 그러니까 저 세계의 존재자가 아니고 그렇지만 이 세계에는 등기되지 않고 떠돈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존재자 역시 아니다. 나는 헤카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지키는 신에게 임시로 소속된 자이다. 헤카테는 교차로, 문턱, 건널목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에서 서성이는 자이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거주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거주자가 아니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없는 사람으로 있고, 살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 - P55

그것은 그 도시에서의 정착의 여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불안정할 때 삶의 뿔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길고 글쓰기는 잦다. 삶이 안정할 때 삶의 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짧고 글쓰기는 드문드문하다. 첫날 쓴 그의 글에는 비장한 기운이 흐르는데, 보보라는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이곳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이곳에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이었다.
어떤 글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운명에 대해 하는 예언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아마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 P56

진동하는 악취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인 이 배설물들은 자동차나 자전거의 바퀴, 그리고 사람의 신발에 붙어서 형체를 바꿔가며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개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과 함께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람보다 많고 사람보다 의젓하다. 개들은 사람을 힐끗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을 힐끗거리지 않고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배설을 가려서 하지 않고(가려서한다면 개가 아니지!), 사람은 개들의 배설물을 괘념치 않는다. 도시는 악취로 정복된다. 쏘고 베고 찌르는 것만 무기가 아니다. - P72

발밑의 현실이 하늘의 추상을 이긴다. 중요한 것보다 시급한 것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 속의 음식이 타고 있을 때는 가스불부터 꺼야 하고 화장실이 급할 때는 화장실부터 가야 한다. 시급한 일이 있으면 중요한 일은 미뤄진다. 시급한 일이 끊이지 않으면 중요한 일은 영원히 미뤄지고 끝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 P90

순수는 보임으로써 더러워진다. 눈에 보임으로써 순수는 더러워지지만, 순수를 봄으로써, 즉 순수를 오염시킴으로써 눈은 화를 입는다. 그런데 순수를 보는 순간 눈은 화를 입어 보는 기능을 상실하므로 순수는 결코 더러워지는 법이 없다. 순수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은 시선이지만, 시선이 가닿기 전에 눈이 먼저 상하기 때문에 순수는 오염되지 않는다. 순수는 오염되지 않지만 눈은 순수를 본(보려고 한) 대가로 오염된다. 순수를 보는 시선은 덫과 같다. 이 덫에 걸리는 자는 덫을 놓은 자이다. 말하자면 눈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탐욕의 시선을 구사한 데 대한 화, 일종의 형벌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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