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희령이 담임선생님에게서 아침에 전화가 왔다. 무슨 대외 일기대회가 있는데 희령이가 그동안 써둔 일기장을 모두 갖고 오십사 하는 말이었다. 일기대회라는 게 우습게 들리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의 일기쓰기 장려를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랴부랴 이곳저곳 흩어져있던 일기장을 찾느라 책꽂이를 뒤졌다. 아, 그러다 발견했다. '나쁜 기분의 일기장'이라고 또박또박 써놓은 공책 한 권을. 갑자기 악몽(^^)이 밀려왔다. 뭐냐면, 큰딸이 3학년이었나 4학년초반이었던가였을 때 우연히 보게 된 비밀일기장에 대한 기억이다. 조그만 자물쇠를 채워두는 일기장인데 아이는 그때 열쇠를 자물쇠에 그냥 꽂아두고 등교를 하였고 난 책상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보았던 것이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 엄마를 비방하며 저주를 퍼붓는 글귀들이었다. 평소 얼마나 억압 받는다고 생각했으면 이랬을까싶어, 그 이후로는 되도록이면(거의)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사실 그때도 별로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무튼 그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 얼굴을 보았다면 백짓장 같았을 것이다. 순간, 큰딸이 다섯살 때 내게 써준 쪽지도 떠올랐다. "엄마, 내가 예쁘다면 저를 사랑해 주세요." 그랬던 애가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다.

그 이후로 아이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욕심 부릴 수 있는 선 밖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뭐든 수용해주는 편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요즘도 한번씩 아이를 떠보면 우리엄마는 잔소리 하지 않고 아이에게 거의 다 일임하는 엄마로 인정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자기 스스로 모든 걸 알아서 하고 내가 특별히 따로 신경쓰는 게 없을 정도다.

작은 딸, 희령인 지금 2학년인데 벌써 이런 일기장을 쓰다니... 제출용 일기장과는 달리 불만 가득한 속마음이 적혀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많지는 않고 딱 두 편인데, 하나는 엄마가 저만 싫어하고 언니한테는 야단 치지 않는다고, 아마도 저는 입양한 아이일 거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게 되게 웃긴다. 엄마는 화를 내야되는 때에만 내는데 아빠는 별 이유도 없이 괜히 자기 방에 들어와 언니한테는 뭐라 않고 자기한테만 버럭 소리지르며 화낸다고, 자기 마음은 몰라준다고, 역시나 자기는 입양된 아이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희령이가 많이 자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큰아이 때의 충격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놀라는 건 잠깐이었고, 오히려 흐뭇해지기까지 하는 거다. 큰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그 일기장을 봤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모른다. 이렇게 배출구가 있다는 것, 그런 걸 스스로 찾아 이용한다는 게 다행이다. 눌려있다보면 어느날 폭발하고 그 때는 감당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체험학습을 간 희령아,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라~~ 아침에, 선크림 발라주고 뽀뽀하고 안아주고 보냈다.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안 보일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통통거리며 걸어가는 아이의 가방이 오늘은 아주 가벼워보였다. 김밥도시락에 과자 2봉지, 음료수와 물병 그리고 쓰레기 담아올 비닐봉지 2개와 필통. 또 한 가지... 작은 여우 희령이의 변덕쟁이 마음과 여물어가는 마음!




                                                                             <올 추석연휴 범어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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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2006-10-1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니 우리 딸 생각나요. 희령인 입양으로 결론을 냈군요. 우린 계모인거 같다로 했었는데.ㅎㅎㅎ

물만두 2006-10-1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지금도 그래요^^ 누구나 생각하는 것 같네요. 희령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뜻이겠죠^^

건우와 연우 2006-10-1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령이의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파랗게 여물어가는것 맞지요.^^

프레이야 2006-10-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절초님, 저도 어릴 때 계모라고 생각했어요^^
물만두님, 지금도요? ㅎㅎㅎ
건우와연우님, 가을하늘처럼 마음도 선하고 푸르면 좋겠어요.^^

BRINY 2006-10-1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부터 반 아이랑 전쟁 치뤄서...가을소풍에 대한 가정통신문 나눠줬더니 선생님 혼자서 멋대로 소풍장소 정한 거 아니냐고 얄밉게 굴길래, 네가 그동안 종례를 멋대로 안들어와서 그렇다고 꼬박꼬박 종례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그 애는 준우수반이라 따로 모여서 보충수업을 듣는데, 그리고 종례하러 교실로 안돌아오고 그냥 저녁 먹으러 나가버려요) 그랬더니 대뜸 표정이 굳어지면서 욕지거리가 돌아오더라구요.허...직원 회의가 있어서 그냥 몇마디만 쏘아붙여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2교시에 수업하러 올라가보니 안경 벗고 눈물 닦고 있더라구요. 그게 자기만 미워한다고 분해서 우는건지, 아니면 잘못을 반성해서 우는건지...그냥 모른 척 평소대로 수업하고 내려왔는데, 참 어떻게 풀어가야할지...어제 편의점에서 손님한테 '뭐? 뭐? 담배?'하고 반말하더니, 제가 찾으러 간 알라딘 택배 상자 틈으로 손을 넣어 확 뜯어내려고 하던 주인집 꼬마애가 크면 저렇게 될까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 엄마란 젊은 여성은 카운터에서 계산만 하면서 손님한테 사과도 안하고 애도 나무라지 않더라구요.

프레이야 2006-10-1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오늘 하루 힘드시겠어요. 아이랑 이런 전쟁 치루느라면 늘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고 괴롭죠. 요즘 아이들 욕지거리를 너무 자연스럽게 써요. 한 때이겠거니 생각하며 한 발 물러나준다고 치더라도 심한 경우가 많지요. 배출구가 없어서일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씩씩하니 2006-10-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 읽으니..왠일인지..눈물이 나려구해요..
저도 결혼 전에 그동안 내내 보관하고 있던 일기장(중학교적부터 쓴거...) 그걸 다 처분했는대...
중학교적 일기에는 정말 상상도 못하게 심한 표현들이 많아서(아이구...)그래서,,화이트로 지웠다가,,,또 다시...............안되겠다 싶어서...죄다 태워버렸어요..
엄마,아빠가 혹 보셨다면 님처럼 백지장처럼 되셨겠죠,,혹 보셨을지도...
큰딸과 막내딸이 똑같지 않은건 저도 같은거 같애요,,희령이에게만 왠지 여유롭고 너그러워지는 맘,,저도 그렇거든요...
다 지나가는 과정,,,그리고 밟아야하는 길인지...싶어요...
근대..전 애들 크는게 왜 이렇게 제가 아쉽죠??? ㅎㅎㅎ

프레이야 2006-10-1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저도 중학교 때부터 엄마랑 무척이나 싸우며 지냈어요. 엄마의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어 바락바락 대들고 그랬던 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하지만 제 딸은 저보다 착하네요. 그러진 않거든요. 그래도 참는 것 보단 어떡하든 풀어버리는 게 나은데 말이에요^^ 애들 크는 거 아쉬워말고 씩씩하게 아이에게서 독립하자구요^^

2006-10-18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0-1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퇴근 할 준비하나요?

2006-10-18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리포터7 2006-10-1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그렇군요..저희아들도 4학년인데...일기를 열심히 쓰니 아마 그런것도 숨겨놓았겠지요? 전 작년부터 일기장에 손도 못댄답니다..접근금지처분받았어요.저도 궁금해요..어떤말들이 써있을지..전 충격받을것 같아요.흑!

마노아 2006-10-1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아리따운 처자군요. 색동 저고리 넘 잘 어울려요. 비밀 일기장... 그런 해소방안... 저 작년에 제가 쓴 메일을 들켜서 사단 났던 기억이 납니다. 님처럼 그렇게 이해해 주고 다른 방법의 소통을 생각해준 인간이 아니어서요. 아, 쓰린 기억이..ㅠ.ㅠ

2006-10-18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0-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님, 3,4학년쯤 되면 일기장 보는 것 싫어하는 것 같아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구요. 그래도 보고 싶죠 가끔은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고 싶은 것이니까요. 충격 받지 않을 자신, 아이에게 아무 말도 안 할 자신 있으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 근데 아예 숨겨놓았다면 ㅋㅋ

마노아님, 쓰라린 기억이 있나봐요. 옆지긴 제가 쓴 초벌원고 읽기를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하루는 고쳐야할 곳이 많으니까 아직 보지 말라고 하니까 그러더군요. 내마음을 그대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대로가 가장 좋다구요.^^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비슷하죠? ㅎㅎ

프레이야 2006-10-18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어여쁜님(21:56), 벌써 그 애가 사춘기랍니까? ^^ 하기야 요새 아이들은 빠른 것 같아요. 이말 하고보니 옛날 어른들도 그대로 하셨던 말일 것 같으네요.ㅎㅎ
님이나 저는 제 2의 사춘기 아닌가요!^^

춤추는인생. 2006-10-19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생각하기 마련이죠. 혼나고 나면 아마 내 천사같은 진짜 엄마는 따로 있을거야 라구요..^^ 부모의 방임하에 스스로 책임지게끔 저도 그렇게
자랐답니다.... 저는 엄마가 그렇게 해주신거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 희령이가 조금만 크면 엄마를 이해할수 있을텐데.. ㅎㅎ
귀여워요 희령이 한복입은 모습..

프레이야 2006-10-1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그래요. 희령인 지금도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는 아이에요. 그래서 고맙구요. 오늘 아침에도 '희령공주가 있어서 엄마는 행복해'라고 말해주었어요.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닭살멘트 수시로 날려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ㅎㅎ

한샘 2006-10-1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내가 예쁘다면 저를 사랑해 주세요."
우리도 그랬듯이 두 공주님들도 일기장과 함께 건강하게 성장해가고 있어요. 지혜로운 엄마가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있구요...^^감동페이퍼입니다~

프레이야 2006-10-1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샘님, 사실 제가 큰딸의 그 글귀에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다구요. 내가 잘못 했구나 싶어서요. 사랑을 충분히 못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방법이 잘못 되었던지요. 5살때 말이죠. 지금도 그런 생각하는지,, 수시로 점검해야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