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벚꽃이 좀 서둘러 피었다. 문학집배원이 보낸 아래 시가 참 좋으네. 김경미 시인의 시다.
봄, 무량사 /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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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색을 입은 꽃을 차례대로 맞고 떠나보내며 봄을 맞는 일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이맘때면 피었다 지는 벚꽃은 세상의 환함과 허무함을 함께 지닌다.
그러한 것이 비단 벚꽃 뿐일까마는, 장렬하게 떨기를 떨구는 목련보다 더,
가냘프고 작아서 더 애련한 그 꽃잎 아래서
각자의 빛나는 등불을 밝히고 춤추고 노래하며 하느작거리는
그 꽃잎이 되고 싶은 것인지도.
이래저래 좀 뜸했는데 덕분에 말들이 밀려있고 묻혀간다. 그건 그것대로 좋을 듯.
3월에 읽고 있는 녹음도서 정리 좀 하자.
살아야 하는 이유 / 강상중 / 사계절
2013년 3월 6일 녹음 시작, 2013년 3월 20일 총 9시간 소요 완료
빅토로 에밀 프랑클의 책 이후, 삶에 대한 담담한 의지와 태도의 문제를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로 말한다. 이반 일리치 등의 문학작품과 테리 이글턴 등의 사회과학 도서를 인용하고 특히 소셰키의 문학작품을 많이 예시하고 소셰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일본 3.11 사태 이후 절박하게 깨달은 생각을 현실감 있게 푼 이야기라 우리 사회에서도
적절하고 유용하다. 소비지향적인 자본주의 사회, 행복지상론, 자기계발의 종용, 지나친 자아찾기, 익명의 공간 등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여러 여건들 속에서 그래도 살아야하는 이유는 인생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적 태도에 달려있겠지만, 바람직한 사회는 '존엄'이라는 것이 의식되는 사회, 사람의 '유일성'이나 '일회성'이 의식되는 사회이나, 이런 것들이 사회를재검토할 때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기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땐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191p)
생각이 나서 / 황경신/ 소담출판사
2012, 5, 11 녹음시작, 9시간 소요 완료.
편집중 내일 편집 완료 예정 (녹음속도가 빨라 편집이 많이 밀렸다. 어서 해야지)
감성 제대로 돋는 글과 사진, 아주 예쁜 책이다.
작가의 일상 여운과 여행 느낌, 문학작품의 독서 이력도 군데군데 엿볼 수 있다.
가벼운 듯 하지만 발랄하거나 진지한 의외의 느낌을 건질 수 있고
사진의 톤다운 된 색감이 곱다.
쓰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릴케의 말을 믿는다.
끝이 나면 쓸 수 있다'보다 '씀으로써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로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슬픔 자체는 끝이 없지만 '어떤' 슬픔에는 끝이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어떤' 사랑은 끝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생각이 나서, 마지막 장 인용)
톰은 톰과 잤다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2013, 3월 20일 녹음 시작, 현재 63쪽까지.
'투명인간', '내가 잠든 사이'등 9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투명인간이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나는 망막 역시 투명하기에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투명인간은 장님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눈이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인류란
매번 존재했으나 매번 멸망했다가 매번 새로 탄생해야 했던 인류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야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그처럼 나는 날마다 아버지를 잃었다. - 투명인간, 3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