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봄선물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본 감동보다 훨씬 더, 어김없이 또 눈물이 흘렀다.
쟈베르가 강물에 투신하는 장면의 연출이 특히 돋보였고 에포닌의 죽음도 안타까웠다.
정성화는 저녁 공연에 나온다 하여 다른 배우의 '쟝 발쟝'을 보았는데 처음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는 느낌이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마지막에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포옹하고 있는 뒤에서 쟝 발쟝이 자신이 누구인가 울음 울며
혼자 노래 부르던 중 유난히 귀에 들어온 대사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이 보이지."
쟝 발쟝은 미리엘 주교의 한없는 사랑으로 새 삶을 살았고 새 사람이 되어 사랑을 베풀었다.
꼬제트를 키우며 그 사랑에 보답하고 자신 또한 신의 얼굴을 보았을까.
꼬제트와 마리우스도 서로 사랑하며 신의 얼굴을 보겠지.
신은 자애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질투와 원망도 서슴치 않는 존재가 아닐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자비한 듯 깊이를 모를 그 얼굴을 보며 한없이 '나'가 작아지고 '나'의 연약함을 통감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더 아낌없이 사랑하고 더 '나'를 내어주라고 이끄는, '나'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무한의 힘과 조롱같은 숙명의 입김.
변신을 거듭하는 신의 얼굴은 어떤 굴욕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저 믿고 사랑하라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읽고 있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무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기에 있습니다. 만약 무한에게 자아가 없다면, 그 자아가 무한의 한계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무한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무한에게는 자아 하나가 있습니다. 무한에게 있는 그 자아, 그것이 신입니다."
- <레 미제라블> 펭귄클래식, 77p
죽어가는, 예전의 혁명의회 의원이 그를 방문한 미리엘 주교에게 하는 말이다.
여러번 읽어도 나로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무한에게 있는 자아, 그것이 신이라니.. 신의 한계는 무한한 것이란 말일까.
혁명전사와 주교의 만남, 이 대목에서 나는 거룩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순에 조국의 부름을 받고 혁명에 가담하여 악습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이제 여든여섯의
병든 몸이 되어 지난 시간 받았던 박해, 조롱, 음해, 모욕, 저주를 떠올리며 무지하고 가엾은
군중이 자신의 얼굴을 저주 받은 얼굴로 여김에도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지라,
증오에서 비롯된 자신의 고립을 받아들인다고 고백한다.
왕당파에 기울어졌었던 미리엘 주교가 무릎을 꿇고, 혁명의회 의원의 얼굴은 더욱 엄숙해지며
숨을 거둔다. "그 이후, 주교는 어린아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에게로 향한 자애로움과 사랑을
한층 더 증대시켰다.(79p)"
특히 돋보였던 장면,
쟝 발쟝의 손에서 풀려나 도망친 쟈베르 경감이 강물에 몸을 던지며 한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쟝 발쟝, 당신은 나를 살려주었지만 나를 죽인 것이라네."
영화에서도 나는 쟈베르 경감이 투신하던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이번에도 그렇네.
뮤지컬 속 쟈베르 역을 맡은 배우는 마스크도 꽤 이국적이었다.
좋은 좌석에서 보게되어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이 잘 보여서 더욱 좋았다. 게다가,
떼나르디에 부부의 익살맞은 연기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장중한 서사에 양념 같은 역할을 했다.
떼라르디에 부인 역에는 박준면이 그 퉁퉁한 몸과 걸쭉한 목소리로 제대로 웃겨 주었다.
소향아트센터 3시, 2013, 3, 1
같이 본 동생의 친구는 남편이 프랑스 사람이다. 오늘 처음 만날 기회가 되었는데 한국말을 아주 잘해서
우리의 모든 농담과 경상도 사투리까지 다 너무나 잘 알아듣고 빵빵 터졌다. 쟝 발쟝과 레 미제라블, 모두 원어로
말해보라고 하니 겸연쩍어 하면서 발음하는데 꺅~ ^^ 본국에서 여러번 본 뮤지컬이지만 한국어로 하는 걸 봐도
또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다. 함께 식사하면서도 동행한 사람들에게 자상하게 웃어주고 배려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유학 가고 싶다고 동생에게 말하니, 아이구 유학까지씩이나.. 그냥 관광으로 만족하지, 이런다.ㅜㅜ
나이가 너무 많은가. ㅎㅎ 왜 그래 진짜.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