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내 눈 밑으로 열을 지어 유유히 없는 길을 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내려다본 적 있다, 16층이었다

 

  기럭아, 기럭아

  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

  내가 몹시 잘못했다

 

 

 

- 안도현 시집 [북항],에서

 

 

 

눈 아래로 저 멀리 물가에서 노니는 황조롱이들의 등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망원렌즈 속에 잡힌 그네들의 등이 포실하니 햇살을 받아 따사로운데

입술이 마르고 눈이 부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등을 본다는 건 말할 수 없이 스미는 모종의 쓸쓸함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별을 밥 먹듯이 하는 질긴 인연의 등이거나,

혼자 밥술을 뜨는 사람의 어두운 등이거나,

하루치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 여윈 어깨에 이어내려온 얇은 등이거나,

갈수록 곱사등이가 되어가는 등을 짊어지고도 미모의 시절 지녔음직한 도도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늙어가는 사람의 등이거나,

두려운 일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다.

그 소리 철렁, 들릴까 봐

획 돌아서지도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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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2-1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할머니가 되어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도 않는 도도함으로 혼자 헤매일까 두렵기도 합니다. ㅋㅋㅋ

프레이야 2013-02-17 18:33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좀 도도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라로 2013-02-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을 보는 일이 쓸쓸하기도 하더군요,,,요즘 남편의 등을 보면 괜히 애처로와요,,,많이 늙은건가요???ㅎㅎㅎㅎㅎㅎ

프레이야 2013-02-17 18:34   좋아요 0 | URL
젊어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전 고3때 엄마의 등이 잊혀지지 않거든요.
중학생 때 본, 원피스 입은 엄마의 등도 그렇고요.^^

이진 2013-02-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히 시를 읽고 등가죽이 위로 바짝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비님 말처럼 등은 통증의 부위이군요. 쓸쓸할 뿐더러 이면적인, 늘 그림자져있는, 그러한 부위.
안도현의 시는 언제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구석이 보여서 좋아요.

프레이야 2013-02-17 18:35   좋아요 0 | URL
안도현의 '북항'은 이전의 시와는 좀 다른 느낌으로 와요.
저 시는 그중 상대적으로 짧게 찌르는 시였어요.
등을 사랑하자구요^^

다크아이즈 2013-02-1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님 제 버전은요,
<내 통증만 살피느라 너의 등을 못 보았구나
기럭아,내가 몹시 잘못했다> 입니다.

눈썰미 좋은 모든이들은 시인입니다. 휴~~

프레이야 2013-02-17 18:36   좋아요 0 | URL
팜므님의 버전이 제 마음이기도 하네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등골을 빼먹고 살아온 모든 우리들..

순오기 2013-02-1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등을 볼 수 없다는 게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이기도 하다는...
21일엔 우린 어떤 등을 갖고 만날까 기대도 하는...

프레이야 2013-02-17 18:42   좋아요 0 | URL
전 자주 제 등을 봐요. 거울 비춰서요.^^
남의 등도 제대로 못봐주고 사니 자기 등은 오죽할까요.
등 밀어주는 사람이 제일 좋아요 ㅎㅎ
그날 등 토닥여주며 만나요 우리.

2013-02-1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7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02-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오랜만에 들려요. 잘 지내시죠?

사랑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라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 듯해요.^^
그럼 잠을 잘 때도 마주 보고 자야 되나요?ㅋ


프레이야 2013-02-18 13:10   좋아요 0 | URL
페크님, 그말이 정답이에요^^
사랑한다면 등을 보며선 안 되죠!! ㅎㅎ
그래서 배신하는 행위를 등돌린다는 말로 대신하나 봐요.
일상의 소소한 배신들, 조심해야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