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시집을 찾게된다. 특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더욱,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가는대로.  

시인의 상상력이 뻗어간 언어는 한없이 부럽기도 두렵기도 한 세계다. 나는 시인의 눈을 흠모하는 사람에 불과하여 늘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길 여러 해. 그렇다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독자도 못 되고 그저 내게 시란 문득 생각나면 들르고픈 한갓진 찻집 창가 한구석 비슷한 것이다. 게으르지만 끊이지는 않는 지리멸렬한 시읽기. 너무 어려우면, 뭐야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내팽개치고 싶다가도 어느새 마음 기울이고 있는 아둔한 연애 같은 것. 사는 일이 연애질과 닮았으니. 무심결에 만난 반짝반짝 빛나는 한 구절에도 불 꺼진 방에 불이 켜지듯. 시는 입술로 읽을 것!

 

<자두나무 정거장>의 박성우 시인이 '시란 아침밥 같은 것'이라고 느릿하고 구수한 전라도 말로 고백할 때, 아 그렇겠구나, 생각했더랬다. ebs fm 시콘서트 감성지기라 부르는 강성연의 질문 "시란 무엇이에요?"에 이은 대답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아침밥을 잘 안 챙겨먹는다고, 그렇지만 어느 날 한 번이라도 아침밥을 챙겨먹고 나온 날은 속이 참 든든하다고, 시는 그런 아침밥 같은 것이라고. 천년초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는 어느 농부가 아침이면 천년초들 앞에서 백석의 시를 읽어주며 하루를 여는 장면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다. 백석의 시를 아침밥으로 먹고 자란 천년초는 어떤 영혼의 성분을 지니게 될까 싶었다. 업의 업의 업의 인연법으로 몇 생을 살겠지만 우리 서로 구업은 짓지 말자. 아마도 농부는 그런 마음으로 천 년을 살자고 시를 아침밥으로 먹이고 또 먹었을까. 포슬포슬 갓 지은 하얀 밥알을 호호 불어 동글려 삼키듯.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만 올라 안타까운 고은 시인의  시집.

'시인 생활 50여년, 시집 여럿'이 책날개에 적힌 약력이다.

다른 시집보다 좀 두껍다. 장도 나눌 필요 없이 모두 11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읽다보면 새파란 날을 세우고 번득이는 눈으로 세상의 사막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청년의 영혼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여든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무지무지한 허허망망의 울음'('타클라마칸 사막' 중)이 갖는 힘, 거침없이 약동하는 상상력, 변혁과 초월의 열망,

언어 이전의 언어 그 너머의 너머를 향한 강렬한 바람, 발전과 발명에게 내리는 멈춤의 포고, 

세상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인식의 환기. 사람에 대한 믿음,

시간의 잔인함과 세월의 무상함에 무릎 꿇지 않는 패기와 생명력, 토속적이고 다정한 시어들, 생경한 조합들.

개그 익살 웃음이 판을 치는 세상이 못마땅해 '시 너 죽어줘 푹 죽어줘'('시에게' 중)라고 하면서도

'이거 죽어도 헛소리 아니오라 다 시가 되느니 다 시이니 세상이 시이니' 라고...('취중' 중)

 

시인의말, 에서 시인은 <내 변방은 어디 갔나>에 실린 모든 시 못지않게 절창이다.

 

그러므로 나는 태생(胎生)이나, 난생(卵生), 습생(濕生) 넘어서 저만치 실안개 어리는 化身일 것이다.

실재와 부재의 경계를 모르는 그것이며, 구상과 추상의 담장도 없는 맨마당의 그것. 그것도 아닌 그것.

 

오래전의 죽은 별로부터 산 채로 오고 있는 뭇 시대의 별빛을 받아오는 내 세월에 더이상 무슨 종교가 있겠는가.

오로지 내 몇십년의 백지가 아직까지도 내 교조(敎祖)이다.

다못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철없이 철을 읽듯이 어떤 깨달음도 느낌도 굳이 물리치고 싶은 나는 오늘도 그저 공으로 운다.

울음이야말로 다른 세계에서 내 세계에 귀기울이는 굿이다.  (232, 233p)

 

 

 

마지막 시 한 수만 인용.

 

 

화개(花開)

 

 

바야흐로 꽃의 날이다

 

다 그만두고

너도 울어라

나도 울어라

 

 

 

고은의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곽재구의 <와온 바다>는 팔월 말에 도서관에서 업어와 야곰야곰 보면서 9월의 절반을 지났다. 반납 기한을 넘긴 불량대출자를 자처하며. 9월은 내 탄생월이기도 해 나이만 한 개 더 먹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다소 생각이 많아지는 즈음에 선물처럼 내가 꼭 들어야될 말을 들었다. 불평하지 말고 지금에 감사하고 룰루랄라 하며 살라고, 기도하고 명상하며 덕담만 하라고. 콕 집어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도 모른다. 불평은 자신만을 위한 기도에서 온다고 했다. 아닐 땐 발버둥치지 말고 엎드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멀가까이서 늘 나의 안녕을 염려하고 물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 눈물나게 고맙다. 잘 지내요...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잘 자요. 친구와도 동감했듯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쉽지 않고도 고마운 일이다.

 

 

와온 바다, 곽재구

 

고은 시집 하나 더 <두고 온 시>

 

 

 표지가 아주 산뜻하다.

 문정희 <다산의 처녀>, 장석남 <젖은눈>과 함께 도착.

 

 

 

 

 

 

 

 

 

 

 

 

 

고은 시집 검색하다... 이런 여행에세이가 있었네. ^^  저 작가들 이름과 목차만 훑어봐도 급호감.

 

 

 

 

 

 

 

 

 

 

 

 

 

 

 

 

 

 


댓글(14) 먼댓글(2)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2-09-19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년초들 앞에서 백석의 시를 읽어주는 농부. 그분은 시인보다 더한 분이시군요.

이번 가을, 든든하시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2-09-19 21:03   좋아요 0 | URL
나인님, 든든해요!!
그 농부처럼 누군가에게 하루를 시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어요.
자신에게부터요.^^

아른 2012-09-19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 하면..저는 고정희님이 떠올라요...백여권 남짓한 시집들을 책장한구석에 잘 안보이게 쌓아 두었는데...이제 다시 꺼내볼 때가 온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9-19 21:05   좋아요 0 | URL
아른님, 반갑습니다.^^
다른 분 서재에서 뵌 것 같아요. 고정희 시집을 소장하고 있지 않아 부럽습니다.
잘 안 보이게 쌓아두신 시집들 하나씩 가을바람 쐬어주시지요.^^ 좋을 것 같아요.

치니 2012-09-19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팽개치고 싶다가도 어느새 마음 기울이고 있는 아둔한 연애 같은 것.' - 끄덕끄덕.
프레이야 님 오늘 이 글, 참 좋아요. :)

프레이야 2012-09-19 21:06   좋아요 0 | URL
치니님, 삶을 산다는 게 참 연애질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좋아해주셔서 전 느무 기쁘지요.^^

2012-09-19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12-09-2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와 고은 시인의 <차령이 뽀뽀>라는 동시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괜히 더 반가운^^
전 <내 변방은 어디 갔나>과 <순간의 꽃>을 가까이 두었지만 차분히 읽지 못했어요.
프레이야님 덕분에 그 시집을 펼치는 오후가 될 듯해요...

프레이야 2012-09-19 21:09   좋아요 0 | URL
차령이 뽀뽀!! 이름이 너무 이뻐요. 동시집이 있군요.
고은 시인의 언어와 상상력은 정말이지 뭐라 부연할 말이 있을가요.
'고통의 꽃'도 있군요. 역시 문학을 사랑하시는 자목련님^^ 고마워요.

자목련 2012-09-2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순간의 꽃>인데 고통의 꽃이라고.. 수정했더니 시각이 바뀌네요.
읽고 또 읽어야 진짜 사랑하는 건데.. 그렇지 못해요..

프레이야 2012-09-21 09:33   좋아요 0 | URL
네, 순간의 꽃!!! 바로 찾아서 찜해둘게요.

들꽃 2012-09-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먼댓글로 오게 된 곳이네요! 시란 아침밥 같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잘 거르지만, 한 끼 먹고 온 날은 든든하다고. 아직도 시를 즐겨 읽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이전에 비해서 시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어요.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읽기를 권했는지.

글 첫 문단이 좋아서 세번 곱씹어 읽었습니다.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 이래서 괜한 충만감이 드나봐요.

프레이야 2012-09-25 11:14   좋아요 0 | URL
서늘한달빛님, 고맙습니다.
작은 것에서도 충만할 줄 아는 능력, 시 읽는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가을햇살 만끽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