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Der Untergang) Dawnfall, 2004 / 올리버 히르비겔
영화 <색,계>의 붉은 다이어몬드하고는 비교하기 어려운 버얼건(조야한 붉음) 책표지,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에는 두 개의 영화가 나온다.
하나는 저자가 전체로는 다섯번, 부분으로는 스무번쯤 봤다는, 너무 아름답다고 그가(나도) 생각하는
이안 감독의 <색,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위의 포스터 <몰락>이다.
전자는 나도 세 번 보았고 후자는 보지 못했다. 꼭 찾아볼 영화다.
지난 주, <후궁, 제왕의 첩>의 마지막 정사신을 보며 자연스레 <색,계>가 떠올랐다.
권력의 쟁취(사랑하는 자가 권력을 쥔 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생각도 드는, 애매한)를
위한 중요하고도 중요한 장면, 복잡미묘한 온갖 감정이 뒤섞여 표현되어야할 그 장면에서 나는 아쉬웠고,
<색,계>의 탕웨이와 양조위, 아니 왕 치아즈와 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승 감독도 여전히 '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구나. (혈의누,가 훨씬 나았다)
계의 세계에서 오래 몸담고 살아왔다는 저자는 그 경계를 넘지 못할바엔 넓혀가기로 하고
조심스럽고도 도발적으로 그러면서도 여전히 착한 어조로 "욕망해도 괜찮아"를 말한다.
썩 재미나고 유익하고 통쾌하기도 한 책이다. 대부분의 '나'와 '너'를 살살 건드리고 까발려주니까.
많은 부분 공감되는 저자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지랄(에너지, 청춘, 이드id, 색)총량의 법칙에 따라 사는 우리는 숨겨진(억눌린) 욕망을 발현하기 위해
어느 시점 '탈선자'가 되거나 '사냥꾼'이 된다. 일탈의 길이나 사냥꾼의 길이나 본질은 같은 것,
결국 같은 출발지에서 나온 길이다. 사냥꾼은 남의 행복을 감시하고 훔쳐보고 상스러운 시선과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내 생각은, 우리는 훔쳐보기를 당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고 있지 않나 하는 거다.
드러내 보이고 싶은 노출증 환자랄까. 관음증적 욕망의 시선을 욕망하는...
욕망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역학작용이 아닐까. 서로 닮았고 또 닮아가는.
저자는 (모방)욕망은 발전의 원동력이지만 심하면 경쟁과 폭력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욕망이 가열되면 원래의 목표나 소망의 정체는 희미해지고 그저 경쟁만이 남아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탑을 쌓고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정작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위해 정상에 오르려하는지 스스로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하나의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를 밟고 쓰러뜨리고 또 짓밟고 오르기만 하는 모양새다.
욕망은 오욕칠정 중의 하나. 스스로 그걸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욕망이 하는 말을 억누르려 하지말고 들어주란 말이 된다. 선택은 자기 몫이고 자기 책임의 범주에 드는 일일 터.
내면이 굳건하지 못한 건축물일수록 그 안에서 살려면, 그것을 지키려면 규범이 많이 필요한 법이다.
쿵쾅대지 말고 살살 걸어라, 문턱을 밟고 서지 마라, 문을 살살 닿아라, 문단속 잘 해라 등등.
위의 포스터 영화 <몰락>은 "규범을 의심하라" 는 저자의 말에 뒷받침 되는 예시였다.
규범을 의심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으면 규범의 몰락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몰락의 규범'이다. 몰락할 수밖에 없는 규범이랄까.
저자는 형사정책 강의에서 신정아 사건을 예로 들어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자주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모방욕망, 스캔들, 만장일치의 폭력, 희생양으로 이어지는
르네 지라르의 탁월한 이론들을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재미있는 틀로 본다.
각각 <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이 책들에서도 희생양 메커니즘은 강화, 반복되고 있다며
희생양 이론을 알기 쉽게 정리해주는데,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욕망은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이 아니고 자기 고유의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모델)의 욕망을 흉내낸 것이라는 데서
출발하는 희생양 이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모방)욕망과 자기규범부터 의심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