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처음으로 녹음하게 된 책은 회원신청도서다.
점자도서관 책꽂이에 썩 내키는 책이 없어 내가 갖고 있는 <일곱번째 파도>를 녹음할 예정이었는데
지난 주에 가니까 팀장이 작은 책 한 권을 내밀며 한 분이 꼭 내가 녹음하는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다.
내가 녹음한 시디를 몇 장이나 구입하기도 한 분이라며.
신년부터 이렇게 감사할 데가... 조용히 그냥 하는 일이라 이런 말을 들으면 보람있다.
그리고 이 책이 새해부터 내게 온 인연에 기쁘다.
범우사에서 나온 김일엽 스님의 에세이 <청춘을 불사르고>
검색해보니 알라딘에는 이미지가 없어 김영사에서 새로 나온 이걸로 대체.
김일엽(1896-1971)
평남 용강 출생으로 본명은 원주.
이화학당과 이화전문, 일본 도쿄 영화학교 수료 후, <신여자> 창간, 주간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제창,
왕성한 문필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8년 입산, 수도생활에 정진하다 1971년 열반.
간단하 저자 소개와 사진으로 나는 김일엽이 여승인 줄 알게 되었다.
초판은 1976년, 내가 녹음한 건 2004년 3판 1쇄.
일엽스님은 기독교 목사 아버지와 진보적인 어머니 슬하에서 불행한 유년을 보냈지만 어머니의 신교육관 덕에
당시 여자의 몸으로 배움의 길을 걸었고 여성운동을 제창했다. 나혜석도 동지였다. 윤심덕과의 두 번의 악연도 나온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는 1962년 문선각에서 처음 간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낭독하기에 상당히 긴 문장이 많았지만 대체로 문장에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솔직한 회고의 진술과 깨달음과 진심.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글에서는 울컥했고 실패한 사랑과 결혼, 세속 극복의 글에서는 연민이 짙게 일었다.
제목 '청춘을 불사르고'(1962)에는 "다 버려야 우주화한 인간이 된다"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내가 나를 임의로 쓰게되는 나, 내 정신과 영혼, 내가 하는 말을 내 맘대로 운용할 수 있는 존재라야 귀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 스님은 내가 임의로 쓰게 되는 나는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나, 네 나도 내 나도 아닌 공동적인 나,
너라는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나, 일체 우주와 온갖 존재가 하나화한 나를 증득하여 운용하게 되는 인간이라야
귀한 인간이라고 썼다.
"나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자신만 누구나 가지면 절대 평등권적 생인 까닭에 반드시 인간이 됩니다.
생은 길지만 일은 시한적이니, 이 일에 지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아니 살 수 없는 영원에서 영원을
이어갈 현실 생활입니다. 死前 일, 즉 반드시 현실 생활의 채비가 먼저 돼야할 것이 아닙니까.
이름커녕 몸과 마음까지 사라져야 할 이 중은 아직 청춘[小我]을 불사르는 중이니만큼 존재를 보존하고 알릴 만한
인간이 못 됩니다. 합장"(91쪽)
스님은 청춘을 '소아'로 보았다. 사람의 일생이 기나긴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이라면 소아, 즉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우주화한 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경지일까. 이 글을 쓴 당시 입산한 지 30년이 넘은 스님이건만 청춘(소아)를 불사르는
중에 있었으니 하물며 우리 같은 속세의 범인들이야 청춘을 불사르기나 할 수 있을까.
죽기 전, 그러니까 사는 내내 우리는 청춘(소아)이라는 태명과 멍에를 지고 사는 셈,
그걸 다 불살라 버린 후에야 대우주의 품에 안길 수 있겠으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