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은 아껴서 야금야금 읽는 맛이 좋다.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도 내겐 그런 시집이다. 65년생 경북 출생의 그는 책날개에 아주 간단히 소개되어있고 그 말미에 적힌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단문이 인상적이다.
알라딘 지기님의 시집 소개로 알게된 이 시집의 시들은 읽으면 가슴에 멍이 드는 느낌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원래 멍이 잘 든다. 살짝만 부딪히거나 긁혀도 멍이 들고 오래 가는 편이다. 몸이 그래서 마음도 그런가. 여기 있는 시들은 그런 뻐근한 멍을 선사하는데, 멍이 들고 그게 풀리는 과정도 그늘과 사귀는 법에 자연스레 속하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오늘 눈에 드는 두 편은 '몸'에 관한 詩다. 목욕탕에 가면 나를 포함해 여자의 몸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이대도 다양하고 살아온 과정도 다양할 건데 어떤 공통의 궤적이 몸에 그려져있고 그런 것들이 스산한 풍경으로 보이기도 한다. 과거는 흘러가지만 몸은 흘러가지 않으면 좋겠다. 욕심이지, 지금 이대로라도 간직하고 싶은 건. 나이 들어가시며 몸이 이곳저곳 부서지고 망가지고 그래서 또 낙담하지만 부실한 이라도 앙물고 다시 일어나겠다 결심하는 엄마. 구부정해진 등, 정맥이 튀어나온 종아리, 후들후들 약해보이는 하체, 숱이 아주 적어진 머리카락 그러나 아직 피부는 고운 나의 어머니가 외손녀의 등을 밀어주고 있고 그 옆으로 싱싱하고 가벼운 몸 둘이 호호거리며 지나갔다. 순간의 스침이지만 강렬한 그 무엇이, 안타깝고 애잔한 탄식과 경배가 함께.
절 ㆍ1
늙은 몸은 절하기 위해 절에 온다
절 가지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있고
절 없이도 일은 되기도 안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모든 걸 다 들어 바치는 절은
내가 받는 듯, 난감하다
온몸으로 사지를 구부리고
두 손에 그 힘을 받쳐 올렸다가
다시 통째로 내려놓는 절
성한 데 없는 늙은 뼈가 웅웅
또 저만 빼고, 일문의 안녕을 엎드려 비는데
나는 그만 절을 피해
배롱나무 그늘로 들어간다
늙은 나무가 가득히 피워놓은 붉은 꽃들
또한 절하는 자세여서,
절 안에서 내다보면
그늘 밖에는 햇볕에 타는 어지러운 한세상이
꽃잎에 싸여 엎드린 아름다운 몸이, 있다
결정적인 일은 다 절 가지고는 안 되었는데
몸은 아직 더 결정적인 일이 남아 있다는 거다
몸은 무너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무너졌는데도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다
아, 꽃잎은 그런 당신을 끝없이 적신다
어머니 뼈는 저 자세에서 가장 단단하고 구멍없다
저 자세는 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절 이미 받고
이 몸 헤롱헤롱 두 발로 잘 걸어왔으니,
결정적인 것들은 잠시 미결로 두라 하고
한번 시들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꽃그늘 아래서
나는 당신 몸에 오래 절하고 싶다
몸
몸은 제 몸을 껴안을 수가 없다
사랑할 수가 없다
빵처럼 부풀어도
딴 몸에게 내다 팔 수가 없다
탈수하는 세탁기처럼
덜덜덜덜덜덜덜덜덜, 떨다가
안간힘으로 조용히
멈춘다, 벗을 수 없구나
몸은 몸속에서 지쳐 잠든다
몸은 결국 이렇게 죽는다
- [그늘과 사귀다] 이영광 시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