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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ㅣ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 ‘카핑 베토벤’ 속 베토벤은 ‘내 영혼은 창자에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담긴 영감을 표현할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진 않는다. 이순신이 ‘나의 애를 끊나니’라고 읊었던 절절함 그 너머의 근원성을 떠올릴 수 있는 정도다. 그것도 관념으로만. 사랑스러운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미국에 사는 두 러시아 망명자의 저서 [망명 러시아 요리]의 구절을 인용해 ‘고향에서 뻗어 나온 가장 질긴 끈은 영혼에 닿아 있다. 아니, 위(胃)에 닿아 있다’ 했다. 애국심이나 민족혼 따위는 2,3순위가 된다. 그녀에게 영혼은 위(胃)에 있는 셈이다. 그녀의 말대로, 아니 망향의 한에 몸부림친 그 두 명의 망명자 말대로 ‘이렇게 되면 끈이 아니라 밧줄이요, 억센 동아줄’이다. 고향, 생명이 뿌리 내렸던 아련한 원초적 그리움의 그곳은 감각의 기억과 굳게 연결되어있다. 내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안 하든.
사실 후각이 좀더 원초적일 거라 생각했다. 미각은 후각과 샴쌍둥이 정도 될까. 나같은 몽상가 타입은 맛에도 이상을 그려두기 쉽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등등. 실상은 현실에 뿌리내리는 일에 서투른 나는 맛에 대한 이상향이 있지도 않고 내 미각의 고향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웅숭깊고 뜨듯한 아랫목 같던, 외할머니의 진한 된장찌개 정도? 마리 여사의 표현을 빌자면, 나도 새로운 음식에 열린 미각을 가진 혁신주의자도 아니고 새로운 음식에 미각을 닫아거는 보수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살기 위해 먹는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먹기 위해 산다는 낙천적인 족속도 못 된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마리 여사의 표현대로 대개의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사람과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서 살게 마련이지 않나.
아직은 몸에 좋다는 음식보다 혀에 좋은 음식에 더 당기는 나는 그래도 둔하지 않은 혀와 약하지 않은 위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내 혀가 타인에게 반감을 줄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가지 못 먹는 음식 앞에서 고개를 젓는 나를 가끔 까탈스럽게 보니 그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편견은 발이 빠르다 했지만 발 빠른 편견이 또 틀리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뭐라 부정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해도 미각을 포함해 모든 감각은 주관적이고 개별적이니 강요하지 마시길. 아무튼 미식가의 대열에 끼지도 못하는 나는 ‘미식견문록’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이 책을 내가 원해서 벗에게 선물로 받았었다. (나비님 고마워요)
보드카병 뒤로 돔형의 사원 지붕이 마치 술병의 뚜껑처럼 보이는 하얀색 표지, 어려서부터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체코와 프라하에서 살았던 작가의 유년시절 에피소드를 비롯해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서 일하며 체험했던 갖가지 일화, 음식에 얽힌 크고 작은 역사와 그 배경에 덧붙인 뼈있는 한 마디들이 술술 읽힌다. 서곡으로 시작해 총 3악장과 그 사이 휴식과 간주곡, 이렇게 음악의 악장 형식으로 글들을 묶어둔 것도 즐거움을 준다. 작은 것이 작은 게 아니란 건 다들 아실테지. '처음 구운 핫케이크에는 멍울이 생기기 쉽다'는 등 두루 인용되는 인상깊은 러시아 속담들과 ‘커다란 순무’등 친숙한 동화와 우화들, 음식과 심리의 배경에 대한 추적 뒤의 독특한 해석,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박함, 그리고 통념의 반전과 의외의 결론이 주는 재미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에 비하면 아주아주 조금 못할 뿐이다.
미식가라기보다 대식가라고 자처하는 마리 여사는 미각으로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오랜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혀 끝에 떠올리며 그 이면에 숨어있던 맛을 곱씹는다. 대개는 사람의 본성과 생의 이면에 붙어있는 달콤하고 씁스름한 맛이겠거니.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면의 맛과, 일례로 염소젖에 대한 미각의 기억처럼, 끝까지 양보하기 싫어하는 천진한 단호함이 솔직하고 유쾌하다. 미각의 기억은 오래되고 집요하며 짧지 않은 생에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진다. 궤적을 그리는 그것은 성장하며 변화하기도 하고 어떤 계기로 사장되기도 한다. "식욕은 먹는 중에 생긴다." 그리고 먹는 중에 사라지기도 하고. 욕구와 욕망은 채우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 법. 그녀의 미각에 대한 기억과 그 욕망도 채워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거기서 한 발 나아간 명쾌하거나 아리송한 결론에 씨익 웃음 짓게 된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깨어지는 경우에도 경쾌하다. 새롭게 안다는 사실은 극도로 불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반가운 것이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 많은데, 곳곳에서 고국 일본에 쓴 소리도 마다않는다. 유연하고 발랄한 마리 여사는 재치있는 글을 통해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종교, 신화를 선들선들 건드리면서 심각한 문투는 취하지 않는다. 감자 이야기를 하다가 작가는 1825년 러시아 최초의 무장봉기를 한 데카브리스트들에 매료된다고 고백한다. 현실에 꺾이지 않고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이상을 관철한 젊은 귀족청년들의 이야기가, 땅속에서 열리는 감자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쓰고 있다. 이 외에도 밝게 자란 사람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이다.
또한 프라하 외국인학교 시절 엄마가 해다준 주먹밥 한 덩어리에 눈물나게 힘이 솟았다고 고백하는 솔직한 그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 쩝쩝' 말하지 말라는 노승의 말은 이쯤 되면 창고에나 넣어둬야한다. 고베 식도락 여행을 간주곡으로 연주한 '미식(美食)견문록' 에서 줄곧 삶의 개성 있는 미식(美識)이 읽히니 나같은 이런 독자도 참 병증인가싶다. 그래도 내게 이 책의 묘미는 그것이다. 이 책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마리 여사의 맛의 기억을 내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인지, 또 나는 관념으로 그것들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앎은 관념보다 경험이 우선일텐데,라는 말도 어쩌면 선입견이라 밀어붙이고 싶다. 이런 책을 즐독하는 수많은 간접체험자들의 앎은 그럼 어떡하라고.
가령 아래의 인용글 같은 것은 작가도 인용한 글이지만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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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바란 우선 일정한 밀도와 끈기와 온도가 될 때까지 재료에 거품을 낸 결과요, 둘째로 이렇게 해서 생긴 여러 가지 거품을 섞은 다음 저어가며 식히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할바는, 과자의 품질도 맛도 끈기도 재료에 의해서도 아닌, 어디까지나 조리하는 기술에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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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바는 '터키꿀맛'과 동일한 것 같은데,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눈의 여왕이 소년을 유혹할 때 내놓던 그 하얀가루가 발린 과자가 아닌가싶다. 눈가루를 배경으로 얼마나 빛나던 유혹덩어리였던지. 작가에게는 기가 막히게 맛나다는 할바의 재료가 별거 아니듯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재료도 서로 도토리키재기일지 모른다. 비교는 우월감과 동시에 열등감을 자초하는 일이니 금물. 그저 내게 주어진 재료를 조리하는 기술에 성패가 달려있지 않은가. 기술이 좋으면 맛은 당연한 부산물일 테고. 맛만 내려고 성급하다거나 쓸데없는 멋을 부리다가는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맛은 반드시 혀로 보아야 하는 것!
에필로그를 읽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한 번 더 웃는다. ‘미모의 적이자 생활습관병의 원흉이라고 지탄받는 지방을 자고 있는 동안 전력으로 전환하는 간단한 장치만 발명된다면, 다이어트 문제와 에너지 문제는 일석이조로 해결되니 그 발명가는 억만장자가 될 것이다.’(245쪽) 그런 사람이 꼭 나타날 것이라 믿는 작가는 귀엽기까지 하다. 대식가라면 당연히 따라올 걱정이 발명의 어머니를 낳은 셈이다.
참, 살라미 소시지를 좋아하는 마리 여사는 뱀파이어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도 안 되...지 않는 추측의 근거는 책 속에서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