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람의 손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다. 내게 가장 커다란 손은 아버지의 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게 앞을 비질하고 전자기기들를 꼼꼼히 닦고 기계를 수리하고 무거운 짐도 거뜬히 들어올리던, 검고 두꺼운 손. 아버지의 손아귀에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세남매가 아버지 손가락 하나에 매달려 팔씨름을 하거나 꽉 쥔 손아귀를 한 번 펴보라는 주문을 받을 때면 온 힘을 다해 앙다물고 덤벼도 우리 셋은 아버지 한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의 악력은 대단했다.  

그런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우물 안으로 빠질 뻔한 기억은 악몽이다. 급성 신장염에 걸려 치료를 해야했는데 쓴 알약을 안 먹겠다고 악을 쓰던 아홉살 나는 어느 날, 거꾸로 들려선 우물 안의 시퍼런 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정신이 혼미해져서야 풀려났다. 그래도 발이 땅에 닿자마자 '나 죽는다'고 펄펄 뛰던 나도 참 어지간했구나 싶다. 크고 두터운 손은 성실하고 믿음직스럽지만 나는 그런 손이 두려운, 이중의 감정을 갖고 있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거의 가물가물하다. 그런 애정의 결핍이 내 손을 꽉 잡아주는 손을 무한정 좋아하게 만들었던지도 모르겠다.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당신의 악력은 어느 정도였나 생각해보게 된다. 홀로 피난 내려와 자수성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의 악력은 서글프리만치 굳센 것이었을 테다. 요즘 점자도서관에서 녹음과 편집을 동시에 하고 있는 리처드 예이츠의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 휠러(영화에선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가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손에 관련된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에선 묘사되지 않았던 부분이 책에서 나오고 이 소설은 다분히 프랭크에 초점이 맞춰진 인상이다. 아무튼 냉소적인 문장들이 나쁘지 않다. 2/3 읽었다.)   

 

 

 

 

 

  

 

   
 

(중략) 그러나 질투가 일어날 만큼 부러웠던 것은 아버지의 악력, 그 힘만은 아니었다. 자신만만함과 감수성 - 사람이 무언가를 붙잡을 때 전해지는 느낌 - 그리고 아버지 얼 휠러가 사용하던 모든 집기에 부여한 숙련된 힘의 아우라가 부러웠다.  - 61쪽

 
   

 나는 위의 문장을 읽다가 훅 멈췄다. 악력은 세상을 대하는, 세상을 살아내는 자신감만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대상을 붙잡을 때 내면에 전해지는 느낌이라는 말일까. 악력이 감수성과 무슨 상관이람, 이라고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김훈의 소설 <공무도하>에서 "악력을 좀 길러봐" 라고 장철수에게 말하던 노목희와 경사의 말이 떠올랐다. 다 늘어진 소맷부리 아래로 맥없이 내려와 있던 손목과 손등 그리고 손가락이 안쓰러워 충고한 말이다. 가느다란 손목에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 앙상한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흔히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말을 쓰곤 한다. 감수성은 '외계의 자극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대상을 포착하는 자의 심안에 좌우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붙잡을 때에도 악력과 감수성이 살아있으면 좋겠다. 내가 눈으로 마음으로 손으로 붙잡는 모든 것, 그게 꽃이든 눈빛이든 글의 소재이든 그 무엇이든... 동물 중 가장 악력(물론 동물이니 쥐는 힘이 아니라 입으로 무는 힘)이 센 건 뭐니뭐니 해도 악어란다. 거짓눈물을 흘리는 악력의 대왕 악어는 상상력도 풍부한 감수성의 대왕? 과연? 비오는 봄날 저녁의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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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4-2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력과 상관없이, 저는 길죽한 손가락을 가진 손을 보면 황홀해 한답니다. 제 손가락이 여자 손 치고는 좀 뭉툭해서 그런거 같아요. 불행하게도 우리집 팬더 손가락은 더 뭉툭해요.

종종... 길죽하고 큼직한 손을 가진 남자를 보면, 그 손으로 인해 사랑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공상을 해요... 햇살 나왔답니다~ 아 좋은 봄날이예요, 프야 언니.

프레이야 2010-04-27 22: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뭉툭하다시는 팬더손가락 상상하다가..
길죽하고 큼직한 손이요? 우힛~
오늘 여기 낮엔 햇살 좋았는데 바람은 여전히 쌩하니~ 앙칼졌어요.
우리 언제 만나지요?

마녀고양이 2010-04-29 08:54   좋아요 0 | URL
진짜 한번 뵈었으면 좋겠다.... ^^
오기 언니두 그렇고 프야 언니두 그렇구 너무 머네요...
올 8월에 후애님 한국 들어오면, 엘신님과 한번 볼까 하는데..
그런데, 약속치고는 진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지 않았어요? ㅎㅎ
예전에는 누구랑 약속하면, 항상 1주일 내에 해치웠던거 같은데,,,
꾸물럭꾸물럭 거려여,, 제가 요즘.

프레이야 2010-04-29 22: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때라도 만나요.~~

섬사이 2010-04-2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추운 겨울날 내 손을 꼭 잡고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던 그 손이 가장 좋았어요.
주머니 안에서 꼭 잡은 두 손이 참 따뜻했거든요.
지금은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특히 막내에게) 많이 해주죠.^^

프레이야 2010-04-27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주머니에 손 꼭 잡아 넣어주면 참 좋던대요.^^
우리집 통통막내 저도 그렇게 해주곤해요.
근데 이제 제 손보다 더 커버렸어요.

순오기 2010-04-2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버지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난 그만 웃어버렸어요.^^
악력의 의미는 살아내야 할 세상과도 통하네요.
장철주==>장철수 ^^

프레이야 2010-04-27 22:44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앗, 철수였어요?? ㅎㅎ
그사람 뒤로 갈수록 참 연민이 이는 인물이었어요.
특히 후에에게 하는 것 보면 참..
하여튼 전 노목희의 생리 장면 때문에 기절할 지경이었어요.
김훈은 어째 그런 걸 그렇게 묘사할 수 있대요? 경험해보지도 않고서..
경험이 없으니 더 과장할 수도 있었을까요?

순오기 2010-04-27 23:28   좋아요 0 | URL
흐흐~ 나도 종종 틀리는 거 많아서 누군가 가르쳐주면 얼른 수정하니까 좋더라고요.^^ 장철수~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 흔치 않아서 우리 마음에 담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본문 수정은 안됐네요.
나도 언니의 화장 읽고서 김훈씨한테 어찌 그리 폐경 조짐을 잘 아냐고 질문했더니~~ 당신도 책에서 봤다네요.ㅋㅋㅋ그런데 정말 자기 경험을 털어놓는 것처럼 너무 리얼하죠.^^

Alicia 2010-04-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악력과 감수성은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는 거네요- 와!
악력이 강하다는 말은 뭔가 단단한 느낌을 주는데 보통사람에게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여린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데 이 둘이 같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이제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같은 느낌.^^

저는 손을 꼬옥 잡아주는 사람이 좋아요.
누군가 숨도 못쉬게 꽉 끌어 안아주는 느낌이 더없이 좋을때가 있었지요. :)

프레이야 2010-04-28 09:26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저도 그 비슷한 컴플렉스 아니 착각을 했더랬어요.
벗어날까요, 우리^^ 극과 극은 통하는지도..
헤헤~ 나도 그런 느낌 참 좋아하는데요.

전호인 2010-04-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자답지 않은(?) 손때문에 겪는 고초가 좀 있습니다. 손이 작고 곱다보니(저의 주관)우락부락한 친구녀석들과 오랜만의 악수를 나눌 때 꽉 쥐고 흔드는 장난기 어린 녀석들이 꽤 있어서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랍니다.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난감하죠. ㅋㅋ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잡히지 않고 손을 빼낼 수 있을 까를 고민한다면 말 다했죠.

2010-04-29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gimssim 2010-05-06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사람들이 좀 접근하기가 어렵다고들 해요.
아마 이런저런 말들을 듣기 싫어서 좀 무장을 하고 있는 탓인듯해요.
그래도 살아가면서 좀 부드러운 아줌마가 되고 싶어서 사람을 만나면 손을 잡습니다.
헤어질 때도 그렇구요.
좀 더 공손해지거나, 간절해질 땐, 잡은 손 위에 제 나머지 한 손도 덧붙이지요.

프레이야 2010-05-04 21:30   좋아요 0 | URL
부드러운 아줌마요?^^
그래서인지 저도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요샌 손을 잡게 되더라구요.

같은하늘 2010-05-0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얘기를 보니 지난 일요일에 결혼한 친구의 손이 생각나요. 여고시절 그 친구손이 유난히도 커서 친구들이 손을 잡으면 남자손 잡고 있는 느낌같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사실 그 시절의 여고생들이 남자손 잡아본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그 친구는 그런 자기손을 친구들이 좋아해줘서 더 좋다고 했었는데... 뒤늦게나마 자신의 반쪽을 만나 꼭 잡고 걸어가겠네요.

프레이야 2010-05-04 21:32   좋아요 0 | URL
그 친구분의 손을 잡아주신 반쪽은 더더 도탑고 큰손이겠지요.
꽉 잡아주는 손의 느낌이 좋지요.
다음에 같은하늘님 만나면 손을 잡아야겠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