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무라카미 하루키




시계 깨우기 / 배혜경



오렌지색 둥근 벽시계가 또 멈추었다. 시곗바늘이 12199초를 가리킨다. 오전일까, 오후일까. 시곗바늘을 피하다가 노려보다가 두어 달째 그러는 중이다.


꼼꼼한 아버지는 잘 보이는 벽마다 시계를 걸었다. 집 안 곳곳에서 시계가 우리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시곗바늘이 섰거나 정확하지 않으면 칼같이 맞춰 두었다. 어른이 되고 내 살림을 꾸리며 나도 시계를 늘려 갔다. 특히 앤티크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사 모았다. 언젠가부터 시곗바늘이 자주 멈추었고 전지를 갈아주면 한동안 가다가 서길 반복하더니 아예 걸음을 멈추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전지 가는 일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책장 위에서 두 번째 칸에 잠든 탁상시계 세 개를 나란히 올려 두었다. 가끔 쳐다보면 정물로 박인 시계가 나를 보는 건지 내가 시계를 보는 건지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정체한 삶의 테두리, 그 바깥의 세상마저 정지한 것 같았다.


시곗바늘이 멈춘 시계가 집에 있으면 좋은 운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오래도록 잠자는 시계 세 개를 모두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내어주었다. 총총걸음을 더 이상 놓지 않겠다고 버티는 시계와 때가 되었다는 듯 가뿐하게 헤어졌다. 다른 데 가서는 또 툭툭 털고 일어나 걸음을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별을 고한 그 시계의 바늘 중 하나는 105139, 또 하나는 72922, 다른 하나는 8932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따로 묶어 보관해 둔 것도 아닌데 나는 이 시간이 어쩌면 훗날의 안녕을 위해 유예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미래의 열매에 과즙이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믿었다. 시곗바늘들을 쳐다볼 때마다 시간을 상기했다. 하루하루 잊고 지내다가도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남아 달랑거리면 새삼 그 존재를 깨닫게 된다. 돌이켜보면 멈춰 선 그 시곗바늘은 나를 지켜보며 역설적으로 말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도도한 나를 좀 보란 말이야.


철도 녹슬게 하는 시간이라는 괴물은 생각보다 강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자비롭지도 않다. 시간의 정체를 나는 모른다. 무엇보다 영원한 미스터리인 시간이 이렇게나 스피드광인 줄 그땐 미처 몰랐다.


그 무렵 나는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고 안자이 미즈마루가 삽화를 그린 이 쿨한 에세이 시리즈는 서울-부산 고속철에서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빠르게 스치는 창밖 풍경에 눈을 씻고 넋을 잃어도 다 읽기에 무리가 없는 두께다. 하루키의 개인적 에피소드마다 나도 하나둘 추억과 상념이 따라붙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묻혔던 기억에 잠시 빠졌다가 돌아와도 완독하기에 너끈한, 내용이 아니라 포장이 가벼운 책이다.


'시계의 조촐한 죽음' 편을 읽다가 "전지식 시계의 죽음에 차갑고 무거운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라는 글귀에 잠시 정차했다. 서른일곱 살 아는 여자의 죽음과 동시다발로 예전에 그 여자에게서 받은 시계가 새벽 두 시 십오 분에 정지해 있더라는 사연이다. 우연이었을 수도 있지만 삶의 정교한 암시를 등한시하지 않는 세심함이 마음에 들어왔다. 고양이 밥을 주고 커피를 끓이는 안온한 일상의 스케치에 이어서 이런 문장이 따라온다.


“ ... 그러고 보니 그 애도 이제 죽고 없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시계는 마치 삶의 여운에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딱 멈춰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해 2월에 본 박제된 시간의 원형이 떠올랐다.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에 있는 집필실 시계는 박경리가토지를 마무리한 새벽 두 시에 시곗바늘이 멈추었다. 깊은 잠에 빠진 오래된 그 시계는 목숨줄을 끊고 박제한 동물의 형상처럼 으스스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중성을 띠고 야릇한 인상을 풍겼다.


파릇한 시절의 나는 가난한 문학도에게서 약혼의 의미로 전지식 손목시계를 받았다. 그 시계는 우리의 첫 번째 분신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건네주었다. 전지식 시계는 우선 편리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전지를 교체하는 일이 꽤 성가시다. 전지 수명이 다된 시계는 유한성이라는 생의 한계를 냉정하게 빗대는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기계식 시계에 마음이 기운다. 기계식은 전지를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지만 태엽이 다 풀리면 발걸음을 멈춘다. 태엽이 풀리는 과정을 확대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궤도가 떠오른다. 태엽의 마지막 힘겨운 한 걸음까지 다 풀리면 삶의 여행자로서 우리의 지친 걸음도 쉬어가라는 듯 시계는 단잠에 빠진다. 언제든 다시 태엽만 감으면 잠에서 깨어나고 태엽이 서서히 풀리면서 시곗바늘을 생기발랄하게 되살려준다. 시간은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태도를 즉각 취하고 행동에 옮겨준다. 전지식이든 기계식이든 시계는 시간의 유한을 반복해 무한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든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지난 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삶은 없다. 과거를 다독여 현재와 미래로 나아간다. 삶은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어가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찰 때마다 태엽을 감고 시곗바늘을 맞춘다. 처음엔 번거롭더니 시나브로 이 작은 의식이 썩 마음에 든다. 태엽을 감고 시곗바늘을 2분 정도 앞서도록 맞추면 마음이 조금 느긋해진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기분에 빠진다. 백일몽 비슷한 기분이라 해도 잠자는 시계를 내 손으로 깨우고 시간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착각을 즐긴다. 잠자는 공주의 시간을 깨운 멋진 이웃 왕자가 되어...


잠자는 오렌지색 벽시계를 내려서 책장 아래 깊숙이 넣어 둔다. 태엽을 감는 기분으로 언제든 전지를 갈아주면 잠에서 깨어나리라.



- 월간 <수필과비평> 2022년 1월호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1-08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너무 잘 어울리는 멋진 글이네요. 이 글을 <수필과 비평>에 실으셨군요~!! 완전 멋집입니다. 어느순간 스마트폰이랑 워치 때문에 벽시계를 안쓰게 되더라구요. 저도 이 글을 보니 기계식 ⏰ 가 가지고 싶네요 ㅋ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프레이야 2022-01-08 21:58   좋아요 3 | URL
한때 뻐꾸기 벽시계가 살림템이었죠.
오래된 벽시계 좋아합니다. 요샌 편리하게 뭐든 변해가는데 오히려 아날로그가 더 편할 때가 있더라구요. 연식이 드러나는 건지. ㅎ 고맙습니다 새파랑 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mini74 2022-01-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정에 있던 커다란 괘종시계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시계밥 준다하시면 막 구경했던. 봐도뵈도 질리지 않던 풍경입니다 그시계가 매년 어느 순간조금씩 느려지고 초침이 떨어지고ㅠㅠ우리도 그 시계도 그 집에서의 그 시간을 잡고싶었던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러고보니 전 첫번째 시계가 미키전자시계였습니다 ㅎㅎㅎ 그것도. 제가 커서 번 돈으로 처음 산. 어릴 적 너무 너무 갖고 싶었거든요

프레이야 2022-01-08 21:57   좋아요 2 | URL
시계 밥 준다고 말했었죠. ^^ 미니 님 아빠도 시계 밥 잘 주시던 부지런한 분이시군요. 미키시계 로망이었죠. 전 중학교 들어가서 아빠가 사 주신 카시오 전자시계가 첫 시계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멋 없는 시계였지만 그당시엔 나름 검소한 아빠의 시계사랑이 제게도 전해졌던 거 같아요. 미니 님은 내돈내산하셨군요. 야무지고 대단하세요.

stella.K 2022-01-08 2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전지식 시계는 편하긴한데 갈아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요.
지금은 시계점도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도 쉽지가 않은 것 같더군요.
그런 거 생각하면 기계식이 나은 것도 같은데 그건 하루에 한 번씩 태엽을 말아줘야하고.
예전에 그걸 두고 시계에 밥 준다고 하기도 했었죠.
어렸을 때 그 얘기 듣고 시계가 어떻게 밥을 먹는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가 어리둥절 하기도 했었다능.ㅋ

몇년 전 시계 라디오를 사서 쓰고 있는데 쭝국산이라 그런지
시간이 잘 안 맞더군요. 항상 앞서가요. 전기식인데 그것도 앞서가서 좀 벙쩠다능.
지금은 거의 제 시간에 맞쳐놓고 있는데 얼마 안 있으면 또 앞서갈 거예요.
2, 3분 앞서가면 마음이 좀 느긋하긴 하죠.^^

프레이야 2022-01-08 21:56   좋아요 4 | URL
우리집 시계는 모두 시곗바늘이 제각각이라 신경 안 쓰다가 불현듯 시계가 걸려 있다는 것만으로 그냥 무슨 의미인지 싶어서 벽시계를 좀 없앴어요. 건전지 갈아주는 것도 귀찮고 탁상시계도 마찬가지고요. 디지털시계가 정확하고 간편한 면이 있지만 어쩐지 시계는 저렇게 좀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거지 싶어요.
스텔라 님 시계도 좀 빠른 걸음이라 몇 분힉 앞서가나 봅니다. 그럼 그런대로요 ㅎㅎ 시계 밥은 제때 줘야 하지만 간헐적으로 줍니다 저는.
시간은 조금 밀고 당기고 그렇게 살자구요^^

2022-01-09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9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1-11 21: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들은 소설도 좋지만, 이전에 썼던 에세이도 좋았어요.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고요.
이제는 휴대전화를 많이 쓰지만, 그래도 벽시계가 없으면 답답한 걸 보면 정해진 공간에는 시계가, 달력이 있는 게 익숙한 생활 같기도 합니다. 얼마전 탁상시계가 고장이 났는데, 고치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보던 생각도 나고요.
프레이야님, 날씨가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22-01-11 22:22   좋아요 4 | URL
하루키 에세이 좋아하죠 대부분. ^^
시계를 좋아하는 건지 시곗바늘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 추워지네요 또. 감기 조심하시고요 굿나잇 ~

희선 2022-01-12 0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멈춘 시계가 집에 있는 것도 별로 안 좋군요 멈춘 벽시계는 없지만... 시간은 흘러가니 멈춰 있으면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습니다 소설 같은 데 그런 거 쓰였을 듯도 합니다 시계가 멈췄는데 그날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같은... 태엽을 감아주는 시계, 멋질 듯합니다 손목시계도... 지금은 거의 전지식이잖아요 멈춘 시계를 다시 깨울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01-12 01:15   좋아요 2 | URL
집에 걸렸거나 놓인 시계 갯수를 좀 줄였어요. 왠지 마음도 좀 느긋해지더군요. 여백이 생기니까요. 그게 2020년 봄에 대정리를 할 때였어요. 시간의 압박에서 놓여나도록 잘 조절해야겠지요. ^^
하루키의 태엽감는새, 생각납니다.
아 그리고 정리컨설턴트 말이 시계만 그런 게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모든 물건은 좋은 기의 흐름에 별로랍니다. 고장난 게 있으면 고쳐서 쓰거나 아니면 처분하거나 해서 미니멀하게요. 미니멀이 무조건 버리라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만 소유해서 충분히 잘 쓰는 것이라는 말이죠. 공감되었어요 이말이 제일. 막힘없이 잘 흐르고 통하게!! 시계든 뭐든 안 쓰고 쟁여둔 게 얼마나 많은지. 책도 그렇겠죠.

2022-01-12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