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감기몸살이 오고 말았다. 매년 이맘때면 그런다. 밤샘도 몇 날 하고 몰아붙여서 마무리한 몇 가지 일들이 후유증을 남기는 것 같다. 병원에 갈까 하다 귀차니즘도 발동하고 좀 꺼려져서 생강차 진하게 마시고 좀 누웠다가 일어났다. 며칠전 고교 동기의 아버지가 향년 87세로 돌아가셨는데 골절로 입원 중 코로나 감염이 되었던 게 원인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접견도 못했고 빈소도 채 차리기 전에 화장부터 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날도 흐린데 옛생각도 나고 황망하여 마음이 무척 안 좋았다. 하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 놓고 토요일 저녁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친구 빼고 나머지 유가족들은 별로 침통해 하지 않고 의외로 얼굴들이 좋아서 또 놀랐다. 싱글거리는 것까진 좀 아닌 것 같아 이상하다고 여기며 나왔는데, 그 아버지가 병석에 오래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하여 가족들 사이가 별로였다는 말이 들렸다. 꼭 그래서만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좀 납득이 안 되고... 한 사람, 한 집의 비하인드 스토리야 어찌 말로 다할까. 아무튼 나라는 인간, 어서 낫고 힘내야 하는데 에고... 연말까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8월 말부터 10주간 점자도서관에서 성인 시각장애인 대상으로 '테마가 있는 시 감상' 수업을 했다. 원래 상하반기 나누어 하는데 코로나 이후 줄여서 이루어졌다. 개근상 드려야 할 분이 다섯 분 있고 외워서 낭송도 잘 하시고 시를 쓰는 일에도 관심을 보여 쓰시고, 모두 삶에 시가 들어오면서 느끼는 게 많아지신 것 같아 나 또한 감사했다. 매 시간 다른 테마로 시를 골라 소개해 드렸는데 4차시에는 '관계, 타인이라는 의미'를 테마로 했다. 그중 김언의 시 두 가지. 

김언은 1973년 부산 출생이다. 운전중에 들은 EBS라디오 윤고은 시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김언의 시 '미학'을 듣게 되어 시인을 알게 되었다.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미학 / 김언



나는 혼자서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시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얼굴을 때리고 싶은

상황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꺼지지 않는 불씨를 들먹이는

너를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너 또한 내일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 꺼지지 않는 불씨를

확인하려고 네가 만나는 사람과 내가 만나는 사람.

거기서 시가 오는가? 거기서 시를 배우는가?

우리의 만남이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도 시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다. 억울할 정도로

길고 오래간다. 꺼지지 않는 이 불씨가

시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쟝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말한 즉자존재(사물)와 대자존재(인간)를 떠올려 보면, 인간은 사물과 달리 고정화하지 않는 존재이므로 나를 사물화하고 대상화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타인은 내게 지옥이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관계가 왜곡될 때 타인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1943년 카뮈와 교유를 시작했고 이 무렵부터 저항운동을 하는 지하잡지에 기고했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거절했고 1980년 사망하여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태어나서 1년 후 아버지를 잃고 10년 동안 외가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의 기억을 <말Les Mots>에 자전적으로 담아 1963년 발간했다. 사르트르 자신은 <말>이 문학에 대한 고별이었다는 뜻의 말을 여러 번 하였지만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품 활동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학적 관심 그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1954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 자서전에 거듭 수정을 가해 다른 어떤 문학작품보다 더 문학적인 문체를 이루어 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사르트르는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았고 1973년부터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나는 천직을 포기했다. 그러나 환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달리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슬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곳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그 쓰러져 가는 낡은 대궐, 즉 나의 속임수는 나의 성격이기도 하다.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나는 오직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글을 쓴다고 진심으로 주장하지만, 현재의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상 그런 명성은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족히 과거의 미몽은 보정된 셈이다. 그러나 혹시 내가 아직도 남몰래 그 미몽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꿈을 변형한 것 같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죽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때때로 남의 오해를 받으며 사는 것이 신나는 것이다. (270-271쪽)




 

(첫문장) 1850년 무렵, 알자스 지방에 살고 있던 한 초등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들볶이다 못해 식료품상으로 직업을 바꾸고 말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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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1-10 1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공~감기 빨리 낳으시길요^^
부모님 부고 소식이 잦네요?
시간도 그러할 것이고,계절도 그러한 것일까요?
......저희 동창들도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종종 전해주곤 하더라구요.ㅜㅜ
날이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길요♡

프레이야 2021-11-10 15:53   좋아요 3 | URL
그렇죠. 우리 나이가 ^^
결국 병원 갔다 왔어요. 주사 맞고 약 받고 ㅎㅎ
좀 빨리 나으려구요.
날이 차요. 책읽는나무 님도 감기조심!!

mini74 2021-11-10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결혼식 돌잔치, 지금은 장례식 갈 일이 더 많아지네요. 프레이야님 시 수업 저도 둗고싶네요 *^^*감기 얼릉 나으세요 ~

프레이야 2021-11-10 17:40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미니 님 ^^
주사 맞고 왔으니 언능 나아지겠지요 에구.
시 낭송도 해 드리고 시인 이야기도 하고요 ~

2021-11-10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0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11-10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씨도 추운데 밤샘까지 하셔서 감기 몸살이 걸리셨군요 ㅜㅜ 빨리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21-11-10 19:34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님. 으샤!!
감기 조심하세요 ~^^

붕붕툐툐 2021-11-10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성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수업이라니, 너무 멋지세요~~
서로에게 풍성한 시간일 듯 하네요~
프레이야님, 얼른 쾌차하시길 빌게용!!🙏
(밑줄친 첫문장 완전 공감이요~ㅎㅎ)

프레이야 2021-11-10 23:17   좋아요 2 | URL
신나게 ~ 붕붕님 고마워요 ^^
시를 좋아히시고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마음에 들어하셔서 저도 감사한 일이죠.
좋은 시간이었어요. 마지막 시간에 시 낭송하고 소감도 듣고 울컥하더라구용. 아이들한테 들볶이다 직업 바꾸실라요 ㅎㅎ 계속 국어샘 붕붕님으로 계셔주세요.

희선 2021-11-1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감기몸살 좀 나아지셨는지... 감기몸살은 잘 쉬어야 낫는 듯합니다 그동안 밤새우셔서 몸이 쉬라고 아픈가 봅니다 사르트르 나중에 눈이 안 보였군요 사르트르 이름만 알고 잘 모르지만, 다른 것보다 눈은 중요한데...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듣고 글을 쓴 사람도 있군요 그런 사람 대단합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1-11-13 07:51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아직 헤롱거리고 있어요.ㅜㅜ
어제는 뱅쇼를 만들어 두 잔 벌컥이고 오늘도 계속 생강차 흡입중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한계를 이겨내며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연구하고 예술활동을 하는
위대한 인간들의 업적, 참 존경스럽습니다.

2021-11-13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